[보조 발제문 ②] 더 이상 ‘힐링’은 필요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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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설명] 『사회주의자』 주최 토론회 “청년과 자본주의, 청년과 사회주의”(8월 9일(금),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발표할 발제문을 게재합니다. 

주 발제문: 김민재 (『사회주의자』 기자) – “당당하게 외치자, 내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다”

보조 발제문 ①: 심지후 (『사회주의자』 독자) – “이제 그 이름을 말하자 – 청년의 삶을 힘들게 하는 주범, 자본주의”

보조 발제문 ②: 임가희 (『사회주의자』 독자) – “더 이상 ‘힐링’은 필요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흙수저, 헬조선, ‘노오력’, 이생망, 혐생, n포세대까지. 우리의 각박한 삶을 자조하고, 세상을 비관하는 식의 신조어들이 늘어가고 있다. 한때 ‘88만원 세대’였던 청년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n포 세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신조어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상을 반영하는데, 용어만 바뀌었을 뿐이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모두 같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만큼 우리가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기 위해 ‘노오력’ 같은 경쟁에 몰두하거나, 반대로 ’소확행‘ 같은 힐링으로 위안을 받곤 했다. 하지만 벼랑 끝에 내몰린 우리의 삶, 이 암담한 현실은 털끝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그런 ’정신승리’는 그만 둘 때가 왔다. 우리가 처한 현실의 배후에는 이 모든 문제를 야기한 자본주의 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발제문을 통해 한 명의 청년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을 비추어, 왜 우리가 더 이상 ‘힐링’ 따위가 아닌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주장해야만 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노오력’ 해보았지만…

치열하게 살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교에 입학하고, 무사히 졸업을 하면 돈에 쪼들리는 삶이 저절로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대학교를 입학하기 위한 등록금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액수였다. 월급을 많이 주는 대기업이나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는 공기업에 취업을 하면 더 이상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풍족하고 넉넉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런 곳에 취업을 하려면 남들과 ‘경쟁’을 하고 ‘스펙’을 쌓는 ‘노오력’을 하는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더 좋은 곳, 더 좋은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얻은 것이라곤 자책과 자기비하들 밖에 없었고, 남은 거라곤 스펙 쌓으랴 시험 치랴, 텅 빈 통장뿐이었다. 경쟁에서 실패했다는 패배감,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생계 걱정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늘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주변 또래 친구 누구를 만나든지 모두가 취업 걱정, 앞으로의 생계 걱정을 토로했다. 걱정이 없을 줄 알았던 취업한 친구들은 엄청난 업무량과 괴롭힘 등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취업을 못 한 친구든 취업을 한 친구든 모두 힘든 상황이었다. ‘좋은 직장’, ‘노력’, ‘경쟁’, ‘스펙’ 따위는 모두 허상이었던 것이다.

동네 알바 자리조차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구해서 일을 시작했지만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잘릴까봐 매일 사장의 눈치를 보는 신세에, 하루 절반 일을 하고 받는 월급은 100만원이 채 안되었다. 여기다 월세까지 집주인에게 내고 나면 남아있는 돈이랄 게 없어 생활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내 삶 전반에는 취업 문제뿐만이 아니라,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등 각종 문제가 뒤얽혀있던 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내가 아무리 ‘노오력’을 거듭해봤자 도저히 풀 수도 풀리지도 않는 문제들이었다.

자기기만의 늪, ‘힐링’ 놀이에 빠지다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본 것 같은데 무얼 더 노력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점차 ‘노오력’의 방향이 경쟁에 몰두하느라 보살피지 못한 몸과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미래 같은 건 걱정도 생각도 하지말거나 아예 없을 거라고 포기한 채로, 그냥 지금 이 순간, 삶에 만족하며 하루하루 긍정적이게 살자는 식의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없는 돈을 쪼개서 밥을 안 먹고 생필품을 아껴 몇 달 간 모아 여행을 다니고, 유명한 맛집을 탐방하며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업로드하길 즐겼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밀린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고된 일의 회포를 풀며, 관념적인 수사구가 가득한 힐링 서적을 읽으며 내가 겪는 고통을, 또다시 반복될 문제들을 잊어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달콤한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책을 읽어도 책을 덮으면 끝, 맛있는 걸 사 먹어도 다 먹고 나면 끝이었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면 월세를 감당하고자 허덕이는 삶은 여전했고, 하루의 절반을 알바노동을 하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현실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TV와 신문에서는 각종 ‘힐링’ 상품들을 청년 세대의 대표적인 문화인 것 마냥, 각박한 삶의 대안인양 떠들어댔다. ‘혼자이고 싶어 떠나는 힐링 여행’이라든가, ‘청년들을 위한 힐링 치유 상담’, ‘청년을 위한 역사 힐링’등 온갖 데에 힐링을 붙여 팔았다. 그러나 그런 상품도 돈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게는 더 이상 힐링을 유지할 돈도 그 돈을 벌 여력도 남아있질 않았다.

제도 개선의 시도들, ‘자본주의’라는 벽에 부딪치다

‘노오력’도, ‘힐링’도 모두 기만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오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고, ‘힐링’처럼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현실을 잊어보려 애를 써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벼랑 끝에 내몰려 아등바등 살 바에는 한 번쯤이라도 나의 처지를 바꿔보고 해결해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내가 처한 상황이 단지 개인만의 문제거나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구조의 문제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나름대로 내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제도 개선의 흐름에 동참해보았다. 혼자 살기에는 월세가 부담스러워 함께 거주할 사람들과 주거공동체를 꾸릴 방법을 찾아보았고, 생계를 유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월급이 불만스러워 기본소득 학습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번번이 한계에 부딪쳤다.

혼자 살든지 누군가와 함께 살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집이 있어야한다. 집을 빌려 같이 사는 사람들과 월세를 나누어 부담했지만, 나는 그조차 감당하기가 힘에 겨웠다. 주거비를 계속해서 지출해야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와 같이 사느냐를 논하기에 앞서, 집이 없고 그걸 살 돈도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본소득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조건 없이 받는다는 말이 매력적이었지만 지금 현실에서는 월세를 내고 나면 끝나는 돈에 불과했다. 설령 사장이나 집주인 같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더 많은 액수를 받는다고 해도 그들은 어차피 나의 월급을 줄이고 임대료를 올릴 것이다. 부족한 월급 때문에 기본소득을 받으려 했던 것인데, 도리어 기본소득 때문에 월세를 감당 못해 고시원을 전전하게 될 판이다.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동참했던 제도 개선의 흐름들은 최악의 일자리문제, 저임금문제, 불안정한 고용 상태, 치솟는 월세 그 어느 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제도를 개선해보고자 시도하면 할수록 벽에 부딪쳤고 역설적으로 처음과 같은 문제 상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집주인이 월세를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만 했지, 집주인이 자기가 살지도 않는 집을 소유하며 월세를 받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월급이 너무 부족해서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지, 내가 일한 결과물을 모두 자기 것으로 가져가면서 내 월급은 겨우 살 만큼만 주는 사장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처럼 내가 했던 제도 개선의 시도들은 토지와 주택이 사적으로 소유되고 거래된다는 벽, 노동은 노동자가 하는데 일터의 주인은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라는 벽에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 벽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라는 벽이었다.

‘자본주의’를 부수기 위한 확실한 방법, ‘사회주의’를 학습하다

지금 와서 위와 같은 한계를 분명히 짚을 수 있는 것, 냉소를 이겨내고 당당히 사회주의를 주장하게 된 것은 모두 사회주의를 접하고 학습한 덕분이다. 지금부터는 사회주의를 학습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문제의식을 갖고 변화한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회주의를 학습하기 전, 그러니까 사회주의자가 되기 전에 나는 여태 수많은 알바 노동을 하며 살아왔으면서도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노동자라고 하면 왠지 거창하고 힘센 남성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편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학습하면서 노동력 말고는 갖고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벌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자는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이 존재하고 유지되려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점차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갖게 되면서 나 또한 한 명의 청년, 한 명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을 탓하던 습관을 줄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불합리한 것이더라도 무조건 ‘노오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부서지면서 나를 둘러싼 문제의 원인들이 뚜렷해져갔다. 동시에 노력이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난하거나, 마냥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며 가난한 처지를 불우하게 여기던 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늘 경쟁 상대라고 여겨왔던 또래의 청년들에게 경쟁의식이나 열등감이나 부러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작게나마 해방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자본가 계급에 열등감이나 부러움을 갖지 않고 분노하게 되었다. 내가 맺어온 고용관계가 착취가 전제된 불평등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우리는 취업할 때 계약서를 쓰고 월급을 받기 때문에 마치 자본가와 주고받는 것이 동등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지만, 자본가는 잉여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는 한 우리를 절대 고용하지 않는다. 자본가와 계약을 맺은 노동자는 일정시간 노동을 한다.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노동자 자신이 생계에 필요한 임금으로 지급받는 비용을 생산하는 ‘필요노동시간’과 자본가들의 이윤을 생산하는 ‘잉여노동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자본가들은 이 ‘잉여노동시간’에서 이윤이 나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최대한 오래 일을 시켜 잉여노동을 뽑아내는 데에 매달린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 대부분의 청년들이 노동자로서 착취를 당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를 착취해서 얻은 이윤으로 자본가들은 더욱 더 부를 쌓는다. 부러움이 아닌 분노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발전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값싼 상품 취급이나 당한다. 일자리를 구해서 노동을 하건 안 하건 간에 우리는 빈곤한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를 부수고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인 것이다. 한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한 명의 청년, 한 명의 노동자로 각박한 삶을 살다보면, 아무리 체제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도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짚어주는 확실한 전망,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있으므로 그런 순간마다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나와 같은 노동자를, 피착취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주체이자 역사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내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유다.

당당하게 주장하자, 사회주의 하자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를 안다. 청년실업이니 저임금이니 구구절절 늘어놓자면 끝도 없는 문제들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매일 포털 사이트에 쏟아지는 ‘청년’ 관련 기사만 해도 수백 수천 개다. 수구세력, 자유주의 세력할 거 없이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청년의 현실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도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진짜 문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도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가 계급을 비호하며 이득과 지위를 보장받는 지배계급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아무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해봤자 그들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가 주체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의문을 던지고, 사회주의를 과감하게 주장하고 토론한다면 지배계급은 우리의 힘에 큰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있는 곳엔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회주의가 고양되고 있다. 자본주의 중심부인 미국에서도 2008년 공황과 월가투쟁을 계기로 사회주의가 계속해서 확대되어왔으며,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미국 청년들이다. 아직도 ‘사회주의는 낡았다, 이미 실패했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미국 청년들은 그런 말이 틀렸음을 직접 나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생각할 때 많은 이들이 소수의 위인이나, 통치자들에 의해 역사가 창조되고 대다수 민중은 힘없고 무지한 존재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명백한 착각이다. 역사를 발전시키고 창조해낸 주체는 우리와 같은 청년이자 민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을 이어왔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문제 해결에 앞장 설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이는 지금 벼랑 끝에 내몰린 수많은 청년들과, 나,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이제 냉소와 패배감은 걷어차 버릴 때다. 더 이상 우리에겐 노력이나 힐링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진짜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당당하게 주장할 것이다. 사회주의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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