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발제문]당당하게 외치자, 내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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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설명] 『사회주의자』 주최 토론회 “청년과 자본주의, 청년과 사회주의”(8월 9일(금),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발표할 발제문을 게재합니다. 

주 발제문: 김민재 (『사회주의자』 기자) – “당당하게 외치자, 내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다”

보조 발제문 ①: 심지후 (『사회주의자』 독자) – “이제 그 이름을 말하자 – 청년의 삶을 힘들게 하는 주범, 자본주의”

보조 발제문 ②: 임가희 (『사회주의자』 독자) – “더 이상 ‘힐링’은 필요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청년’에 대해, 20년 가까이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어 왔다. 기성세대 정치인이나 교수든 청년 당사자든 마찬가지다. 먼저 지금 청년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사는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다. 청년실업 문제, 주거 문제, 빈곤 문제, 학자금 대출 문제. …… 그 다음에는 해결책으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정책들이 제안된다. 한 달에 몇 십 만 원 정도의 청년 수당을 조건 없이 주어야 한다, 청년에 대한 각종 주거지원 정책들을 더 촘촘하게 마련해서 사각지대가 없게 해야 한다, 청년을 고용하는 중소기업에 장려금을 주어야 한다, 청년들의 각종 자치공동체를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해야 한다. …… 이제는 지겹다 못해 다 외울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반복되는 20년 동안, 우리 청년들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즉 20년 동안 되풀이되어온 각종 정책적인 ‘해결책’들은 우리 청년들이 겪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청년실업 문제, 주거 문제, 빈곤 문제, 학자금 대출 문제 모두 그대로이거나 더 악화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문제가 기발한 정책이나 법제도의 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 체제, 자본주의 체제 자체로 인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청년실업만 보더라도, 자본주의에서 실업은 만성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이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력이 발전하면 자본 중 생산수단에 투자되는 자본의 비중이 높아지고 노동력의 구매에 사용되는 자본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생산규모가 늘어나는 것에 비해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거나 심지어 줄어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구직 훈련을 시켜 주고, 청년을 채용하는 중소기업에 장려금을 주는 것으로 청년실업이 해결될 리가 만무한 것이다. 우리 청년들을 특히 괴롭히는, 치솟는 임대료와 주택 가격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인간이 잠시 점유할 뿐인 토지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자기가 살지도 않는 주택을 수십 채 소유하고 상품으로 판매, 구매할 이유 역시 전혀 없다.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말이다. 바로 자본주의이기에, 이런 ‘상품’들에 대해 건물주가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그저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대출을 받고 빚더미에 앉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게 여겨진다. 바로 그렇기에 자본주의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건물주의 ‘횡포’만 규제하는 정책, 청년들이 전세보증금 대출을 받을 때 우대해주는 수준의 정책은 청년 주거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 청년들이 겪는 문제들의 진짜 주범은 자본주의 체제인데, 20년 동안 이런 이야기는 전혀 없이 변죽만 울리는 답답한 소리가 지겹게 계속되어 왔고, 우리의 고통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우리는 왜 그런 지겨운 이야기를 20년 동안 계속 가만히 들어주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이 발제문의 화두다. 청년들 사이에서 ‘이번 생은 망했다’ ‘너무 힘들다’는 말은 자주 들리는데, 세상을 향해 ‘그런 지겨운 정책 논의 좀 그만해라, 다 필요 없다, 이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착한 청년’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너무 살기 힘들다는 것과, 우리 스스로가 ‘노오력’하는 것으로는 그 힘듦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데, ‘내가 문제다’만 말하고 기껏해야 지배계급을 향해 ‘우리 문제 해결해주세요’라는 청원이나 하며, 너무나 착하고 온순한 청년들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년 가까이 ‘내가 문제다’만 말해온 ‘착한’ 청년들

혹자는 청년들이 ‘내가 문제다’만 말해왔다는 이 발제문의 진단에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계속 고통을 호소해온 것,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나 ‘헬조선’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노오력’ 운운하는 꼰대 정치인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우리의 시선은 사회와 세상보다는 늘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하며 경쟁에 목매거나, 자기 내면을 돌보고 위로하는 데 치중하거나, 혹은 사회운동에 나서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의식을 바꾸자’는 프레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20년 동안 우리는 주로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보여 왔다.

‘그래도 노력하면 나는 잘되겠지’라는 착각 속에서 ‘내 탓’만 했던 우리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그래도 남 탓하지 말고 내가 잘해야 한다,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라고 우리는 배웠다. 하지만 입시 경쟁이든,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위한 경쟁이든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의 공통적인 결과는, 대다수가 결국 패배자, 낙오자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을 만큼 노력하더라도 남들이 나보다 더 노력했다면 나는 취직을 하지 못하고 정규직이 되지 못한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당연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의 목적은 사람들이 각자 노력한 만큼 보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청년들을 노력이 부족하다는 명분으로 솎아내고 이를 ‘공정한 경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래도 노력하면 나는 잘되겠지’라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멘탈 관리,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계획을 세워서 남들이 쉴 시간에 열심히 노력하면 이에 대한 보상을 받아 취업할 수 있고,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우리들 중 거의 대부분에게 그 결과는 ‘남들은 하는데, 나는 뭐가 부족해서 자리를 잡지 못할까’라는 ‘내 탓’과 열등감과 박탈감뿐이다. 20대, 30대의 정신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다음 기사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 1.7급 국가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공시생 김모(32)씨는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도 가끔 가슴이 답답해지고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컴컴하고 좁은 고시원 방과 학원을 오가며 수험생활을 한 지도 벌써 7년째. 공무원 학원 간판만 봐도 숨이 턱턱 막힌다. 매년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마다 빠듯한 형편에도 학원비와 생활비를 대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2~3년 만에 시험에 합격한 친구들이나 대기업에 취직해 결혼한다는 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열등감과 박탈감이 몰려온다. 김씨는 기약없고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때면 우울해지고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뉴시스, “’20~30대 화병 부르는 사회’…취업·결혼에 스트레스·박탈감↑”, 2017. 5. 4.)

사실 우리 스스로도 모르지는 않는다. 매일 아침 ‘그래도 나만큼은 다르겠지, 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겠지’라는 똑같은 생각을 하며 일어나는 청년이 나 말고도 수십 만, 수백 만 명이고 이들 중 누군가는 실업자,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렇기에 애초에 이것은 개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까지 ‘그래도 나만큼은 다르겠지’라고 생각해왔다. 결국 내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 속에서 체제 탓은 하지 못하고 ‘내 탓’만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혀왔다. 솔직히 이것은 ‘정신승리’가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나는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신승리’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아닐까?

숨 막히는 세상, ‘소소한’ 숨구멍에 만족하며 살아온 우리들

사실 우리 청년들은 노력해도 그만큼 보상받기 힘든 사회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어쨌든 비정규직 신세, 최저시급 일자리 신세를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 어렵게 구한 일터에서 상급자가 아무리 ‘꼰대’같이 굴어도, 교묘한 꼼수로 노동강도를 강화해도, 심지어 불쾌한 성적 발언이나 원치 않는 신체접촉 등의 성폭력을 당해도, 빠듯한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어렵다. 또 아무리 커피 값을 아끼고 간식 값을 아껴도 죽을 때까지 자기가 살 집 하나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돈이 없으니 부모 등 원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여, 같이 살기 싫은 원가족과 같이 살아야 하거나, 같이 살고 싶은 사람과 같이 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정신건강조차 위태로워지고 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까지 나온 지 오래다.

한마디로 숨이 턱턱 막히는 감옥 같은 현실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은 이 숨 막히는 감옥에서 나갈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세상을 이렇게 감옥처럼 만들어 놓은 자들에게 화를 내거나 욕 한 번 시원하게 퍼붓지도 못했다. 대신 숨 막히는 감옥 속에서 아주 작은 숨구멍을 찾아 숨을 쉬는 것으로 만족해 왔다. 그 숨구멍은 바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힐링’ 같은 것들이었다.

‘소확행’은 요즘 청년들의 ‘새로운 행복론’으로 언론에 자주 언급된다. 청년들이 많이 사용하는 SNS에서도 ‘소확행’ 같은 해시태그를 달고 혼자 맛있는 밥을 먹거나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거나 DIY 인테리어 소품을 만드는 사진이 자주 올라온다. 2018년 3월 30일에 나온 한 기사에 따르면, 3월 29일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소확행’ 해시태그를 사용한 게시물은 4만개에 이르렀다(박상은 기자, ““그래, 이게 행복이지” 소확행에 위로받는 2030“, 국민일보, 2018. 3. 30.). 비슷한 시기 프레시안에는 ‘소확행’ 트렌드에 대한 출판계 인사 두 명의 좌담 기사가 실렸다. 다음의 대목은 ‘소확행’이 숨 막히는 감옥 속에서 탈출을 단념하게 만드는 작은 숨구멍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장은수) 계층 사다리에 오르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확행은 이에 답하는 트렌드입니다.

……

(이홍) 소확행이란 내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 안에서 온전한 나의 시간을 확보하고, 온전한 나를 찾겠다는 태도입니다. 기존 우리 사회관으로 이해하려면 소확행의 표면만을 훑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성 삶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게 소확행의 출발점이겠죠.

(이대희 기자, “소확행, 촛불 이후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프레시안, 2018. 3. 30.)

한마디로 우리는 “계층 사다리에 오르는 게 불가능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대신 ‘소확행’에서 작은 숨구멍을 찾고 있는 것이다. ‘소확행’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니라,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한 말이기에 이는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를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에 갇히게 만든 자본가들은 ‘소확행’을 내건 각종 상품들과 정교한 광고, 마케팅으로 돈을 벌고 있다.

그렇다면 ‘소확행’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 전체의 답답함과 숨막힘을 망각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소확행’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상품들을 구매하다 보면 ‘소소한’ 행복이라도 내 손에 잠시 들어오는 것 같지만, 일자리도 형편없고 제대로 된 집도 없고 다음 달 생활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행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은 그대로다. 서점에 즐비한 각종 ‘힐링’ 서적들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말고 편하게 놓아주어라,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해도 괜찮다,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언어’를 나누면서 위로받아라. …… 이런 메시지들은 지친 마음을 잠시 동안 위로해줄지 모른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붙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은 그대로다.

이런 세상을 차라리 확 뒤집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이제까지 우리는 각자 자신의 방에서 개인적인 ‘소확행’과 ‘힐링’을 추구함으로써 잠시나마 문제를 잊어버리는 편을 택해 왔다. 숨 막히는 세상, 전복이나 탈출을 꿈꾸는 대신 ‘소소한’ 숨구멍에 만족해 왔다. 물론 잠시나마 고통을 달래고 싶은 마음에서 ‘소확행’과 ‘힐링’에 의존하는 개인들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태도를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숨통이 트이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아닐까?

법제도적 개선, 인식·문화의 변화에 상상력을 가두고 기존 질서에 흡수되어온 우리들

우리가 보여 온 또 하나의 태도는 법제도적 개선, 인식·문화의 변화에 스스로의 상상력을 가두고 변화를 외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기존 질서에 흡수되는 태도였다. 이 태도는 어떻게 보면 앞서 말한 두 가지 태도보다는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사회가 문제라는 것과 청년들이 모여서 사회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긍정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진단한 나머지, 법제도적 개선이나 인식 내지 문화의 변화로 청년의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만 힘을 쏟는다. 청년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있음을 짚지 않기에,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 기존의 질서를 강화하고 거기에 흡수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가령 최근에는 청년 주거 문제와 관련하여 ‘비혼 공동체’를 포함한 다양한 가족형태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원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 주목받고 있다. 이 운동의 문제의식 자체는 타당하고 긍정적이다. 청년 주거에 대한 각종 지원이나 혜택이 현행 법률혼을 기초로 한 ‘정상 가족’ 위주로만 되어 있다 보니 동성 커플인 경우나 친구들끼리 함께 사는 경우는 아무리 실제로 서로 가족처럼 살고 있다 해도 그런 혜택이나 지원에서 배제되어 사각지대에 놓인다는 것이다. 결혼을 못 하거나 안 하는 청년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오늘날, 그런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살 권리, ‘정상 가족’ 이외의 주거 공동체를 모색할 권리도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이러한 타당한 문제의식을 철저하게 밀고 간다면, 매우 강력하고 힘 있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앞서 살폈듯이, 따지고 보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여 함께 살고 싶은 사람과 함께 살지 못하고, 함께 살기 싫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현실은 토지와 주택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바꾸기 어렵다. 예컨대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된다 해도, 임대료를 지불할 여유가 없어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수 없다면 동성 커플이나 비혼생활자들이 안정적인 ‘함께 살기’를 꿈꿀 수 없는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를 정면으로 문제 삼는다면, 누구는 주택을 수십 채 소유하고 누구는 자기 한 몸 누일 곳도 없는 현실 자체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주택을 상품으로 만들어 사고 파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아예 모든 주택을 국유화하라고 과감하게 요구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당장 건물주들로부터 주택을 몰수하여 모두 국유화하고 ‘정상 가족’을 구성한 청년이든 아니든, 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무상 공급하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간다면, 건물주들과 정부의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까? 이는 매우 과감하고 강력한 운동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비혼 공동체’ 운동은 그렇지 못하다. 언설은 급진적인 듯하지만, 사실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에 흡수되고 있다. 일례로 작년 하반기부터 화제가 되었으며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담은 계간지까지 발행하고 있는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이하 ‘공덕동하우스’) 소속 활동가들은 현 정권과 체제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 정권을 도와주고 현 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2018년 12월 21일 여성가족부에서는 청년들이 분과별로 정책을 제안하는 중앙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인 ‘청년 참여 플랫폼 로드맵’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공덕동하우스 활동가가 두 명이나 참여했고, 둘 중 하나는 공덕동하우스의 대표로 이름이 알려진 홍혜은 씨였다. 가족 분과에 참여한 다른 활동가가 요구한 것 역시 다양한 가족에 대한 가시화와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대출 금리 인하, 생활 동반자 법률 등의 주거 정책”이었다. 기존 정책을 비혼 공동체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사각지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매우 소박한 요구에 그치는 것이다.

또한 올해 2월, 공덕동하우스 홍혜은 대표는 아예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산하 ‘성 평등 태스크포스’ 팀에 외부 전문가로 참여했다. 이 위원회는 내년에 수립될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준비하기 위한 위원회인데, 2006년, 2010년, 2015년에 각 수립되었던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은 어떤 대통령 하에서든 민간보육 시장을 노골적으로 활성화하겠다고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에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보육을 시장화하였고, 여성들이 출산을 하고 다시 일터에 복귀하려면 시간제 일자리가 도움이 된다는 거짓말을 통해 여성 노동자를 비정규직화하였다. 그런데도 공덕동하우스 대표는 청년들, 특히 여성 청년들의 현실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한 정책을 만드는 데 직접 참여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비혼’에 대해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닌 운동이자 정치적 선택이라고 한 바 있다. 청년이 겪는 문제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시도는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우리 청년들이 겪는 문제의 원인이 과연 무엇일지 끝까지 파고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저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결여, 문화의 편협함 또는 법제도의 미비 정도로만 진단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과감한 요구가 충분히 가능한데도 ‘사각지대’를 없애 달라는 수준의 소박한 요구에 머물렀고, 체제에 도전하는 힘 있는 운동이 아니라 기존 체제에 흡수되는 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사실 청년 운동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이 이런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만 또 하나 들면, ‘청년 노동조합’으로 한때 주목을 받았던 청년유니온이 그러하다. 2017년 6월 9일 서울시와 여러 청년 단체들의 공동주최로 열렸던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시작! 청년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청년토론회”에서 청년유니온 김민수 위원장이 제기한 요구 역시 청년기본조례의 제정, 청년을 ‘거버넌스’에 참여시키는 것 정도였다. 게다가 청년유니온의 초대 위원장 김영경은 올해 4월 서울시의 청년정책 전담부서 ‘청년청’의 장까지 맡았다. 아예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파트너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기존 체제에 흡수되어버리는 식이라면 ‘청년 운동’을 아무리 오래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태도를 전환하자, 내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다!

‘그래도 나는 노력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정신승리하는 태도, 숨 막히는 세상에서 ‘소확행’이나 ‘힐링’ 같은 소소한 ‘숨구멍’에만 만족하는 태도, 법제도적 개선이나 인식·문화의 변화만 주장함으로써 맞서 싸워야 할 기존 질서를 오히려 강화하는 태도. 이 세 가지가 우리가 20년 동안 보여 온 태도였다. 앞의 두 가지가 노골적으로 ‘내가 문제다’라면, 마지막 것은 그보다는 조금 더 진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청년이 겪는 문제의 원인이 체제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기에 결국에는 화살을 청년들 스스로에게 돌리게 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문화와 인식을 바꾸자’ ‘우리가 거버넌스에 열심히 참여하자’처럼 말이다. 결국 셋 다 ‘내가 문제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태도다.

그렇다면 20년 동안 청년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거의 바뀌지 않은 것도 놀랍지 않다. 지배계급 입장에서 우리는 거의 ‘호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매일 힘들다고 호소하고 ‘이생망’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사회, 체제 탓은 못 하고 늘 스스로를 탓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착하고 온순한데, 지배계급이 굳이 왜 우리를 두려워하겠는가?

계속 같은 행동을 하면서 결과만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과가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가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내가 문제다’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다’를 외쳐야 한다.

먼저 시선을 ‘나’로부터 바깥으로 돌려서 ‘세상’을 바라보자. 내가 마음가짐을 바꾸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정신승리’는 이제 그만 하자. 남들은 모두 배신당하더라도 나만은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도 벗어나자. 그런 정신승리와 착각을 반복하면 결과는 모두가 더 잔인하고 가혹한 경쟁 속에서 서로를 괴롭히며 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서 내 한 몸 건사할 수나 있을까?’ ‘내가 한 사람의 몫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런 걱정은 나 혼자의 노력이나 멘탈 관리로 해결될 수 없으며, 오직 사회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다.

또한 소박하고 체념적인 태도에서 당당한 태도로 전환하자. 앞서 ‘소확행’이나 ‘힐링’을 비판한 것은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자거나,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의미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말고 인간다운 삶에서 나오는 제대로 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고, 아픈 세상에서 ‘힐링’을 찾아 헤매는 대신 처음부터 아프지 않고 살 권리가 있다. 체념하거나 자조하기보다는, 세상과 사회를 향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당당하게 요구하자. 사실 우리 대부분은 굳이 더 지킬 것도 없고 더 잃을 것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마지막으로, 현 체제 내에서의 변화에 상상력을 가두지 말고, 체제를 바꿀 수도 있다는 과감한 상상을 해보자. ‘굳이 왜 체제를 바꿔야 해?’라는 질문을 하지 말고, ‘굳이 왜 지금의 체제를 옹호해야 해?’라는 질문을 하자. 주거 문제, 청년실업 문제, 청년 비정규직 문제, 학자금 대출 문제 등 어떤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든, 계속 나가다 보면 특정 시점에서는 일터에서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사장님이고, 교육이든 집이든 모두 상품인 것이 당연해지는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와 부딪히게 된다. 이 때 생각을 멈추지도 말고, 문화니 인식이니 이리저리 돌려 말하며 이 충돌을 무마하지도 말자.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자. 일터와 공장을 굳이 사장이 소유하며 운영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운영하면 되고, 주택이나 토지에 가격을 매겨 판매하는 것, 그저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 수천 만 원의 빚을 져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한번 자본주의와 싸워보자고, 사회주의 못 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당당하게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더 이상 ‘착한 청년’이 아니게 될 때

혹자는 ‘우리가 태도 하나 바꾼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어?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라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보면 청년들의 태도 전환이 그 자체로 지배계급을 겁먹게 하고, 사회를 뒤흔드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이다.

요즘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의 앞날을 걱정하며, 앞장서서 자본주의 비판까지 하고 있다. 일례로 170억 달러 규모의 재산을 가진, 세계최대의 헤지펀드 브리지워터(Bridgewater) 창립자 레이 다리오(Ray Dalio)는 “나는 자본가다. 그러나 심지어 나조차 자본주의가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고, 진화하거나 아니면 죽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왜 미국의 CEO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걱정하는가」(파이낸셜 타임즈), 「‘자본주의를 개혁하라, 그렇지 않으면 혁명에 직면할 것이다’, 밀켄 콘퍼런스에서 억만장자들이 말했다」(LA 타임즈) 같은 기사 제목들이 연일 미국의 신문 지상을 뒤덮고 있다. 주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원래 자유주의 성향에 가까웠던 엘리자베스 워런 등의 민주당 대선 주자들조차 샌더스 등의 사회주의자들을 따라하며, 부유세 걷어서 학자금 부채 탕감해주기, 대학 무상교육 실시 등의 공약을 앞 다투어 내놓고 있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미국의 청년들이 앞장서서 자본주의 반대, 사회주의를 기세등등하게 외치고 있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포드 재단 의장 대런 워커(Darren Walker)에 따르면 “그들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경제를 조직하는 방식으로서 사회주의를 점점 더 편안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이터를 보았을 때다.” 작년에 2018년 여름 스물여덟 살의 알렉산드리아-오카시오 코르테스가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내세움으로써 민주당 하원 예비경선에서 거물급 민주당 정치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은 이미 한국에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올해 2월 5일 트럼프는 연두교서에서 사회주의를 맹비난했지만, 그 결과 오히려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트럼프 지지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더 네이션(The Nation)』의 기사에 따르면 5월 17일 갤럽 여론조사 결과 트럼프의 지지율은 42%였던 데 반해, 20일 발표된 또 다른 갤럽 여론조사 결과 사회주의가 나라를 위해 좋을 것이라고 답한 미국인들의 비율은 43%였다. 그리고 18세에서 34세 사이의 경우 이 비율은 58%였다. 열 명 중 거의 여섯 명의 청년들이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20대, 30대 청년들의 기세가 사회를 뒤흔들고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이 청년들을 무서워하는 상황, 혹자는 ‘이게 한국에서 되겠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먼 나라의 일로만 치부하거나 부러워만 할 일이 아니다. 미국 청년들도 처음부터 급진적이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미국은 전통적으로 사회주의가 약세인 나라였다. 하지만 2008년 대공황으로 인한 고통이 청년들의 급진화의 중요한 단초가 되었고, 2011년 ‘Occupy Wall Street’ 운동과 2016년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의 대선 출마 같은 계기들을 거쳐 이런 급진화가 거센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급진화의 핵심 속에는 미국 청년들의 태도 전환이 있었다. 미국의 21세-32세 청년 중 66%는 은퇴 자금을 전혀 저축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저축을 못하는 것도 있지만, 2018년 3월에 나온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이는 ’자본주의가 그때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32세의 한 여성은 “저는 이 세상이 자본주의를 앞으로 10년간 또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를 하든지 아니면 망하든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나만은 열심히 저축하고 노력해서 잘 살 수 있겠지’라는 헛된 꿈을 꾸지도 않고, ‘세상이 힘들어도 소소한 행복을 찾자’같은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저축을 할 수 있게 한 달에 몇 십 만원 청년수당을 달라는 시시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어려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단순하게, 체제가 바뀌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청년들의 태도 전환이 얼마나 큰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청년들이 더 이상 ‘착한 청년’이기를 그만둘 때, 내 탓을 그만두고 체제 탓을 할 때, 세상은 요동치고 변화한다. 우리라고 이렇게 못할 이유가 있을까? 체제의 문제를 제기하자는 것은 무슨 어려운 철학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살면서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속시원하게 말하자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취업이 되지 않고, 집도 구하지 못하고,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탓이 아님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매일 일터에서 사장에게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아도 빠듯한 생활비 때문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조차 못하는데 ‘소확행’, ‘힐링’ 따위를 위안 삼으며 버텨야만 하는 것이 솔직히 비참하지 않은가? 건물주들은 수십 채의 집을 갖고 돈을 버는데 우리는 이 대도시에 자취방 하나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정부를 상대로 ‘청년들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게 해 주세요’는 청원밖에 못하는 것이 솔직히 너무 시시하지 않은가? 우리도 항상 느끼고 있었다. 우리 탓이 아니라 체제 탓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내 탓만 하는 ‘착한 청년’ 노릇을 그만두자. ‘나’로부터 시선을 돌려 세상을 보고 다른 청년들을 바라보자. 소소한 행복 말고 진짜 인간다운 삶에서 오는 행복을 요구하자. 더 이상 상상력을 자본주의 체제에 가두지 말자. 기성세대 정치인들과 교수들이 20년째 한가롭게 반복하고 있는 그 지겨운 이야기들을 더 이상 예의 바르게 들어 주고 있을 이유가 없다. 참신한 척하지만 너무나 진부한 ‘정책 제안’들만 난무하는 이 숨 막히는 분위기에 이제 ‘내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다’라는 외침으로 파열구를 내자. 우리가 더 이상 ‘착한 청년’이 아니게 될 때, ‘내가 문제다’ 대신 ‘체제가 문제다’를 외칠 때 비로소 세상은 뒤집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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