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수당, 박원순식 리얼리즘의 기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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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mayor Park Won-Soon AFP/Getty

청년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미 절벽 아래에 떨어져 절규하는 이들도 넘쳐난다. 돌아온 하반기 취업시즌, 취업 실패에 좌절한 취준생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주 한잔을 털어 넘기는 동안, 정치권의 공기는 청년수당 이슈로 후끈 달아올랐다. 작년 11월 5일에 서울시가 사업계획을 공식 발표한 날부터 새누리당은 “위험한 발상”,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같은 표현까지 써가며 맹비난을 퍼부었고, 이번 서울시 국감에서도 청년수당 이슈가 도마 위에 올랐다. 청년수당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정책 하나를 놓고 찬성과 반대 사이에 팽팽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9월 5일에도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은 국회연설에서 “일부 정치인이 현금은 곧 표라는 정치적 계산으로 청년들에게 현금을 나눠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청년수당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박원순의 행보를 겨냥하듯 “무분별한 인심 쓰기이고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하는 인기영합용 무상복지”라고 일갈했다. 이에 서울시장 박원순은 자신의 SNS에 “청년수당은 포퓰리즘이 아닌 리얼리즘”이라고 적으며 자신의 진정성(?)을 호소했다.

리얼리즘이라…, 박원순의 표현에 따르면 청년수당은 청년의 절박한 현실을 반영한 정책이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궁금증이 뒤따르기 시작한다. 청년수당이 정말 청년의 현실을 ‘리얼하게’ 반영한 정책일까? 아니, 그 이전에 청년이 처한 현실적 처지는 어떻지? 과연 청년수당은 청년의 처지를 바꿔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미친 세상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청년수당에 관한 비좁은 공방전

97년 IMF 사태 이후로 청년실업이 고질적인 사회 문제로 굳어져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30만 청년실업자”를 언급하며 청년 실업 해결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았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청년 실업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자신의 주요 기조로 삼았다. 둘 다 월드컵으로 한창 뜨거웠던 2002년 일이다. 88만원 세대와 n포 세대가 될 아이들이 빨간 티셔츠를 입고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뛰어다니던 시절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년실업 문제는 IMF 사태로 야기된 일시적인 현상으로, ‘반드시 이겨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 자란 월드컵 어린이들은 필승 코리아가 아닌 헬조선을 외치며 절규하고 있다. 이제 실업은 일상적이다.

2000년대 초 30만 청년실업자 시대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이제는 100만 청년실업자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청년 실업 문제는 김무성조차 동의할 만큼 정치권의 공통 핵심과제로 부상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작년 11월 서울시 청년수당 정책이 수면위로 올라왔다. ‘청년활동지원사업’ 이라는 공식명칭을 가진 이 정책의 주요 골자는 정기적인 소득이 없는 만 19세~29세 장기 미취업 청년의 취업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여기서 논란이 된 지점은 바로 수당 지급, 최대 6개월 간 월 50만원의 취업활동 지원금을 제공하는 지원 방식이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탄력적이고 유연한 노동시장 정책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유권자를 매수하는 포퓰리즘 행위”라는 혹평을 던졌다.

논란은 정치 공방으로 그치지 않았다. 작년 12월 3일, 보건복지부는 청년수당을 사회보장사업으로 규정하고 서울시에 협의를 촉구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사회보장사업은 사회보장기본법에 따라 반드시 복지부 장관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사회보장사업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협의할 일이 아니라며 복지부의 통보를 튕겨냈다. 그리고 12월 24일, 서울시 의회는 복지부와 협의 없이 청년수당 사업 예산을 편성했다. 복지부는 집행정지결정 신청과 지방교부세 감액을 거론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였고, 1월 14일에 서울시 의회를 대법원에 제소하였다. 이에 맞서 서울시는 복지부의 지방교부세 시행령을 놓고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초장부터 ‘법대로 합시다!’까지 가버린 셈이다.

물론 서울시가 복지부의 완강한 반대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서울시는 3월 7일에 사업계획서와 협의요청서를 복지부에 제출하면서 협의 요구를 거둬들였다. 복지부도 원만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협의가 순풍을 타는 듯 했으나, 여러 번의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다가 끝내 사업은 반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려 깊은 서울시장께서는 청년들의 곤궁과 고통에 비통해하며 청년수당 사업 강행을 선언하였다. 8월 3일에 서울시는 선정된 최종 대상자 3000명 중 약정서에 동의한 2831명에게 현금 50만원씩을 우선 지급했다. 복지부는 다음날 바로 직권취소 처분을 내렸고 사업은 결국 중단되었다. 8월 19일, 서울시가 직권취소 처분에 대해 대법원에 제소를 넣으면서 갈등은 법의 중재를 받게 되었다.

작년 11월 서울시의 사업 계획 발표부터 올해 8월 대법원 제소까지, 놀랍게도 이 모든 갈등은 법과 제도권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왔다. 이 게임에서 선수는 서울시와 복지부가, 심판은 법원이 담당하고 있다. 막상 사업에 가장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청년들에게는 입법 및 행정 절차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낄 자리가 없다. 그저 대의를 책임지는 박원순에게 기대거나 청년이 고통 받고 있음을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다. 모든 과정이 법의 명분과 합법적인 집행권자의 손에 따라 흘러간다. “청년 메이드” 정책이 무조건 웰메이드 정책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아무리 웰메이드라도 정책 그 자체는 체제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의 체제에서 정책을 승인하고 집행할 권리는 정치인과 정부 관료의 손에 있을 뿐이다.

청년수당이 외면하는 리얼리즘

서울시 청년수당 선전물
서울시 청년수당 선전물

서울시에서는 직권취소 명령이 떨어지자 “청년의 삶까지 직권취소할 수 없”다는 글귀가 담긴 선전 포스터를 서울 시내 곳곳에 게시했다. 포퓰리즘이라는 프레임을 뒤집고, 청년수당이 청년을 구제하기 위한 사업이라는 점을 호소하려는 의도로 비춰진다. 물론 청년수당이 포퓰리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년의 절박한 처지 그 자체다. 여기서 문제는 청년수당이 우리의 처지를 얼마나 바꿔낼수 있는가이다. 대의와 절차에 내포된 모순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사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고민하고 따져봐야 했을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따지는 행위부터가 우리의 처지를 바꾸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정치를 시작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청년수당이 청년의 삶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를 따지기에 앞서, 청년이 처해있는 현실을 보자. 취업이 곧 생존이고 생존이 곧 취업인 세상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획득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7월에 서울시에서 발표한 청년수당 지원자 6309명의 지원서 분석결과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원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바로 ‘취업’이다. 총 6580번 언급되었다. 많은 청년들이 취업 실패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 그 악순환을 요약하면 이렇다. 취업 실패→경제적 곤궁→아르바이트→시간 부족→취업준비 부족→취업 실패. 이 악순환의 시작은 취업 실패이지만 취업 실패는 원인이 아닌 결과다.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일자리 부족이 낳은 것이다.

이 와중에 박근혜 정부는 정작 일자리 문제는 방치하면서 창조경제를 외치며 청년 창업가 육성에 나서겠다고 한다. 10명 중에 2명도 살아남기 힘든 생존율 17% 자영업계 현실에서 창업을 부추긴다. 취업시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기업은 비정규직 도입과 구조조정도 모자라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명예퇴직을 권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그 와중에 박원순은 청년들을 “신뢰” 한다며 우리를 굳게 닫힌 취업시장과 가혹한 창업시장에 밀어 넣는다. 원인은 나 몰라라, 경쟁은 알아서. 이것이 바로 박근혜와 박원순의 공통 표어다. 왜 쓸모도 없는 무한 스펙 경쟁에 뛰어들어야만 하는지, 그런데도 왜 우리 중 일부는 항상 잉여인구로 남아야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자리 문제 방관은 둘째치더라도, 청년수당이 청년의 생활 조건을 얼마나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일을 하든지 일을 하지 않든지 불안정 근로빈곤 상태에 놓여있는 근로빈곤 위기계층청년만 이미 47.4%이다. 생존 자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는 청년들을 모두 구제하기에 청년수당이 포괄하는 3000명이라는 숫자는 턱없이 작다. 규모를 확대한다고 하더라도 빈곤이 곧 보편이 돼버린 이 사회에서 모든 청년에 대한 구제는 불가능하다. 미취업 청년의 한 달 생활비가 58만원이라는데, 여기에 만약 월세 35만원까지 더하면 이미 100만원에 육박한다. 취업 및 창업 준비비는 아직 포함시키지 않은 금액이다. 청년수당 50만원이 청년의 삶에 단비를 내리기에 그 비는 너무 일찍 그쳐버린다.

그런데 청년수당이 지니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한계는 따로 있다. 청년의 삶을 야만으로 내몰고 있는 자본주의를 털끝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년실업이라는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시대의 청년들도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자신의 몸뚱이를 상품으로 내다 팔아야만 하는 노동자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할수록 노동자의 생존 조건은 더욱 악화된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사회적 필요가 아닌 이윤의 증식이며,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본가는 반드시 노동자를 착취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부가 증대할수록 노동자는 빈곤할 수밖에 없으며, 이윤을 위한 생산 체계가 더욱 발달할수록 노동자는 더욱 값싼 상품이자 잉여로 전락하게 된다. 청년수당이 잠시 동안 우리의 명줄을 이어줄지는 몰라도, 우리를 빈곤과 착취의 늪에서 구제해주지는 않는다.

청년수당은 청년들이 직면한 현실을 미약하게나마 개선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청년수당이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기만이다. 오히려 “청년의 건강한 정신을 파괴하는 아편”이라고 표현한 이인제의 비난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마치 아편을 복용하면 할수록 그것에 더 의존하게 되듯, 청년수당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은 시스템의 근본적인 모순을 가리는 동시에 우리를 찰나의 달콤한 공약과 정책에 의존하게 만든다. 물론 하루살이조차 힘겨운 우리의 삶에 최소한의 사회보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조건을 악화시키는 근본 원인이 바로 이 체제이기에 사회보장 요구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겨냥하는 투쟁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처지는 쳇바퀴 돌 듯 제자리에만 머물게 될 것이다.

애초에 정치력을 쥔 국회의원과 관료의 손에 민중의 삶이 달려있다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이미 기득권을 쥔 그들은 이 체제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이상 사회로 상정해 놓고서, 이 사회는 부패한 정권과 자본에 의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우리의 처지는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만 바꿔낼 수 있다. 막연한 자본주의 반대가 아니라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구체적인 요구를 함께 외치며 이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나가야 한다. 무상 교육, 생필품 공급,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 등 여기에서 모두 다루기에는 너무 큰 주제이지만 체제에 정면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민중의 삶을 이롭게 만드는 여러 가지 정책 요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요구와 함께 자본주의에 맞서는 공세적인 투쟁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에 달려있다.

현실을 바꾸는 진정한 힘

박원순은 현재의 청년실업을 두고 “준전시준공황 상태”라고 일컫는다. 입시 전쟁과 취업전쟁에 목숨을 거는데도 제대로 팔리지 못해 결국 실업자 신세를 못 면하는 우리의 처지를 보고 있자니 말 자체는 틀리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박원순도 절대 말하지 않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상태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떻게 기인하는가이다. 현실에 대한 묘사는 매우 그럴 듯하게 내놓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인은 분명하게 따지지 않는 것이 바로 박원순 식 리얼리즘의 기만성이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고민의 칼날도 더욱 예리해져야 한다. 이제는 현실이 왜 모순덩어리로 가득 차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원인을 짚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시켜온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모순을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회가 시키는 대로 따르며 살아왔는데, 사회는 우리에게 모든 위기와 모순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다. 이같은 현실을 놓고 박원순은 상위 1%에 저항하는 99%의 거대한 반란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내놓는 답은 ‘정권 교체’다. 모든 사회적 부가 상위 1%에 집중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모순을 짊어진 99%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권 따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회다. ‘박근혜 퇴진’과 ‘정권 교체’를 부르짖는 박원순 류 정치 인사들은 새로운 사회로 향하는 민중의 상상과 저항을 꺾어버릴 뿐이다. 이제는 달을 감추는 더러운 손가락이 아니라 진짜 달을 보아야 할 시점이다.

박원순이 말하는 준전시․준공황 상태는 자본주의로부터 기인했다. 청년수당과 같은 정책이 등장한 배경도 점점 더 야만스럽게 변해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비슷한 정책으로 서울시에서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프랑스의 청년보장(La Garantie Jeunes) 사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프랑스 청년들은 청년 보장을 마냥 달갑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소박한 전진인가? 변장된 후퇴인가?(Petite avancée? Recul déguisé?)” 그들은 청년보장을 근본적 대안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개악 반대 투쟁을 저지하기 위한 정부의 회유책으로 여긴다. 프랑스 민중과 청년들은 그럴듯한 문구팔이에 주춤하지 않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요구를 외치며 거리와 광장으로 나서고 있다.

Nuit Debout, 10/04/2016. Photo by Olivier Ortelpa. Flickr.
Nuit Debout, 10/04/2016. Photo by Olivier Ortelpa. Flickr.

프랑스의 사례는 정치권에서 내놓는 정책이 일시적으로는 민중의 삶을 위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직업 정치인 및 국가 관료들은 자본주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정책을 수립한 뒤 입법과 행정을 거쳐 민중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민중을 수동적인 역할로 머무르게 하며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이를 자각한 프랑스 민중과 청년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 체제와 그 위에 수립된 정치제도를 신뢰하지 않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야만 그 자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이제 그 의문은 거리로 번져 투쟁의 활력이 되었으며, 밤샘 시위(Nuit Debout)를 통해 점점 첨예한 의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현실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노동자 민중, 즉 우리 자신에게 있다. 국가와 자본은 그 힘이 두려워 매순간 우리를 개개인으로 쪼개고 분열시키려 한다. 그러나 체제의 수레바퀴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서 더 이상 고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대로 굴러가지도 못하는 체제를 질질 끌고 가는 이들이 노동자 민중이기에 그것을 멈추는 것도 곧 노동자 민중뿐이다. 억압과 착취가 민중을 짓누르고 있는 한, 체제를 향한 분노는 민중에게 끊임없이 쇄도하여 민중의 무기력한 발걸음에 제동을 걸 것이다. 이제 낡은 체제의 본질을 폭로하고 분노를 조직하자! 그리고 조직된 분노를 통해 낡아빠진 자본주의를 멈춰 세우고 오직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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