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어(poor)’들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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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지난 8월 9일. 문재인 정부가 정책 하나를 요란하게 발표했다.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을 대폭 줄여, 현재 63% 수준인 건강보험 보장률을 70%대까지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집권여당과 친여 성향의 언론들은 ‘메디푸어(medi poor)’ 해결의 길이 열렸다며 요란을 떨었다. 메디푸어. 항간에 유행하는 ‘푸어’ 시리즈의 하나다. 하우스푸어, 워킹푸어 같은 말들이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이다. 요사이에는 캠퍼스푸어, 허니문푸어, 베이비푸어, 에듀푸어, 실버푸어, 싱글푸어 같은 신종 가난뱅이도 늘어났다.

어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직장인 70% 이상이 스스로를 “월급은 받지만 가난한 푸어족”이라 여긴다고 한다. 빈곤은 더 이상 쪽방촌 같은 데 사는 소수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결과다. 실제로 이제는 평균치 이상의 가구소득을 올리고, 정신적으로는 이른바 중산층이라는 허위의식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빈곤화(貧困化)가 문제가 되고 있다. 푸어 시리즈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어엿한 직장인’들이 평생에 걸쳐 빈곤의 터널을 걸어가고 있는 현실을 표현한다. 이들이 지금껏 지나왔으며, 앞으로 지나가야 할 빈곤의 터널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생애주기 별 푸어 인생

이들의 푸어 인생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된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 그러나 당장 수백만 원이나 되는 학비가 앞을 가로막는다. 집안이 넉넉지 못한 이들은, 등록금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충당하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는 저렴한 시급제 아르바이트로 해결한다. 이들에게 캠퍼스의 낭만 따위는 그림의 떡이다. 취업준비에 집중할 여력은 없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바쁜 이들은 스스로를 캠퍼스푸어라 부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웬만한 직장에 다니며 급여를 받게 되어도 이들이 캠퍼스푸어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몇 년에 걸쳐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부모 곁을 떠나 있는 처지라면 주거비 지출 때문에 저축은 꿈도 못 꾼다. 매달 적자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들에게 연애는 사치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비슷한 처지의 상대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계획한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비싼 결혼 비용 때문에 목이 움츠러든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신혼살림을 시작할 집값이다. 참고로 지난 2010년에 여성가족부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신혼집 구입을 포함한 결혼 평균 비용으로 남성은 약 8천만 원, 여성은 약 3천만 원이 든다고 했다. 지금은 그보다 높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상당 금액을 빚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부모 도움을 못 받은 이들은 대체로 빚과 결혼한다. 그렇게 채무노예가 된 그들은 스스로를 허니문푸어라 부른다. 물론 허니문푸어가 되지 않는 길도 있다. 혼자 살면 된다. 다만 그런다고 월급 모아서 부자가 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보다 혼자 살면서도 가난한 싱글푸어가 될 확률이 백배는 높다.

한편 허니문푸어가 된 이들은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빚을 갚아 나간다. 그 동안에 예쁜 아기가 태어난다.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적잖은 비용을 요구한다. 아이가 먹고 자고 입는데 필요한 비용은 기본이다. 문제는 육아다. 맞벌이를 계속하려면 매달 수십만 원씩 들여 어딘가에 아이를 맡겨야 하고, 직접 키우려면 둘 중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말 그대로 딜레마다. 지출을 늘릴 것인가, 소득을 죽일 것인가. 선택은 이들의 권리이지만, 결과는 한 가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 때문에 빈곤에 떨어지는 이들을 베이비푸어라 부른다. 그리고 푸어 시리즈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에듀푸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내 아이만 뒤처지게 할 수는 없어’라면서.

빈곤의 터널이 끝없이 이어지는 동안 이들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이사를 다니며 집 없는 설움을 축적한다. 어느덧 중년의 문턱에 들어선 이들은 지천에 널린 아파트 분양 광고지에 눈길이 간다. ‘가지고 있던’ 아파트 값이 뛰어서 목돈을 챙겼다는 이야기도 주변에서 종종 들려온다. 그래서 다짐한다. 번듯한 아파트에서 이사 걱정 없이 살아보자고. 그리하여 집값의 일부는 기존 전세금으로, 나머지는 은행 대출금으로 충당한 채 일을 저지른다. 대출이자가 부담이지만, 그쯤이야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과 집값상승의 기대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하지만 빚으로 얻은 기쁨이 오래 가겠는가. 원리금 상환 때문에 매달 월급은 반 토막이 나고 만다. 매사에 덜 쓰고, 줄이고, 아끼며 집값 오른다는 소리를 기다리지만, 들리는 건 부동산 거품 빠지는 소리뿐이다. 비로소 집 있는 가난뱅이, 즉 하우스푸어로 전락한 자신들의 처지가 눈에 들어온다.

빈곤의 터널에는 또 하나 복병이 숨어 있다. 바로 질병이다. 공공의료보장 제도가 허술한 사회에서는 중환자가 생기면 무지막지한 진료비 때문에 웬만한 집의 기둥뿌리가 뽑힌다. 첨단 진료로 환자의 목숨은 건지더라도 그 대가는 심각한 빈곤으로 돌아온다. 메디푸어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메디푸어가 되지 않는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큰 병에 걸려도 아픔을 참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하거나, 아니면 제 살을 깎아서라도 비싼 민간 보험에 잔뜩 들어놓거나. 물론 정부와 여당은 이번 건강보험 급여 강화 정책으로 메디푸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건강보험 보장률 70%대로 메디푸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망상이다. 이미 노무현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률 목표는 80%였고 박근혜, 이명박 정부의 보장률 목표도 75%였다. 그렇다면 이미 메디푸어는 해결되고도 남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캠퍼스푸어에서 하우스푸어까지 줄곧 빈곤의 터널을 걸어온 사람들은 노년기에 이르면 당연히 실버푸어로 전락한다. 이처럼 보편적 노동자들의 생애에 걸쳐 줄줄이 이어지는 푸어 시리즈는 실은 자유주의 언론이 만들어낸 말장난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중산층이라는 허위의식에 휘둘리던 보편적 임금노동자들이 채무노예로 전락하거나 빈곤의 늪에 빠지는 다양한 계기와 경로를 보여준다. 다만 젠체하는 자유주의자들도 각각의 빈곤화 현상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자본주의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저 푸어 시리즈를 개인들의 과도한 욕망 탓으로 몰고 간다. 또한 빈곤화 현상이 마치 후진적인 나라에서나 나타나는 것처럼 왜곡한다. 하지만 모두 거짓이다.

푸어 시리즈가 후진국이 아니라 자본주의 강국에서 나타난 이유

사실 푸어 시리즈의 원조는 199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워킹푸어(working poor)이다. 2006년에는 일본 NHK 방송에서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일을 해도 가난한 노동자, 또는 그런 처지’를 뜻한다. 근래에는 ‘일할수록 가난해진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열심히 일하면 사는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라는 뜻이다. 그런 현상이 ‘헬조선’이 아니라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선진국 미국이나 일본에서 먼저 드러났다는 건 결코 의아한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은 이미 19세기에 『자본론』 등을 통해서 법칙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워킹푸어는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을 독점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을 직접 착취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잉여노동을 끊임없이, 그리고 점점 더 많이 착취당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생산력이 높아지면 일자리가 줄어들고, 일자리가 줄어들면 실업노동자가 늘어나며, 실업노동자가 늘어나면 취업노동자의 임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노동자는 예전과 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해야 하며, 반대로 같은 시간을 일하면 임금은 하락하여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워킹 푸어’가 어느 가난한 후진국이 아니라 미국,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강국에서 먼저 나타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생산과정에서 잉여노동을 착취당하고 알량한 임금을 받은 노동자들은, 그 임금마저 소비과정을 통해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빈곤의 늪으로 미끄러진다. 요사이 유행하는 푸어 시리즈가 그 반증이다. 예컨대 하우스푸어 뒤에는 주택 분양사업으로 ‘개이득’을 본 건설자본이나 금융자본 등 ‘하우스리치(house rich)’가 반드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캠퍼스푸어 뒤에는 비싼 등록금으로 배불린 사학자본, 즉 ‘캠퍼스리치’가 있다. 베이비푸어나 에듀푸어 뒤에도 자본주의적 경쟁심리를 이용하여 양육과 교육을 손쉬운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베이비리치’나 ‘에듀리치’가 버티고 있다. 메디푸어 뒤에는 질병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의료자본이 있다. 따라서 메디푸어와 메디리치(medi rich)는 동전의 양면이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생산물을 얻는 것, 그리고 무엇이든 되도록 많이, 되도록 비싸게 팔아먹는 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의 숙명이며 미덕이다. 그러나 잃는 자가 있으면 얻는 자가 있다. 또한 얻는 자가 있어서 잃는 자가 생긴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이 그들의 임무에 충실할수록 더 많은 푸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동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자본가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내릴 명령뿐이다. “자, 이제 무덤으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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