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핵심협약 비준 논란에서 드러난 문재인 정권의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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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겨레]

국제노동기구(ILO) 설립 100주년인 2019년을 즈음하여 문재인 정부는 ‘ILO핵심협약 비준’을 선언했다. ILO핵심협약이란 189개 ILO협약 가운데 모든 회원국이 의무적으로 비준해야 하는 8가지 협약을 이른다.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금지, 아동노동 금지 등의 원칙과 관련된 것들이다. 지난 1991년에 ILO 정식 회원국이 된 한국도 당연히 핵심협약을 비준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한국은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4개 협약에 대한 비준을 27년 동안이나 미뤄왔다. ‘제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협약’, ‘제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협약’, ‘제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제105호 강제노동의 폐지에 관한 협약’ 등이다.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면서도 ILO핵심협약 비준을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그러나 20년이 넘도록 국제사회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인권단체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아왔다. 지난 2006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ILO 핵심협약 가운데 제29호와 제105호라도 우선 비준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특히 한국 정부는 지난 2011년에 한-EU(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도 ILO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지만 그 이행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협정 위반을 EU집행위원회가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12월 17일, 마침내 EU집행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조치가 충분치 않다”며 ILO핵심협약 비준에 관한 공식 협상을 요청해왔다. 사실상 협정 불이행에 따른 분쟁 절차를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노동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ILO핵심협약 비준은 정부의 의무이지 노사 흥정거리가 아니다

항간에는, 이번에 비준이 이뤄져 뒤늦게나마 한국의 노동기본권이 국제노동기준에 따라 어느 정도 신장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하지만 그 추진 과정이 첫발부터 순탄치 않다. 심지어 ILO핵심협약 비준을 빌미로 정부가 노동기본권을 후퇴시킬 조짐마저 보인다. 자본가들의 반발과 논란을 의식한 문재인 정부가 비준과 관련한 논의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로 넘겨버린 까닭이다. 사회적 갈등의 소지가 많은 곤란한 의제들을 이른바 ‘사회적 대화기구’에 떠넘겨 온 고질적 수법을 재현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의 의도는 경사노위에서 노사가 대화하여 국제노동기준에 걸맞게 노동 관련법 개정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국회에서 보완입법을 한 뒤에 협약을 비준하는 것이다. 이른바 ‘선 입법 후 비준’ 전략이다.

하지만 순서가 바뀌었다. ILO핵심협약 비준을 노사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 자체부터 잘못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자본가 단체에서는 ILO핵심협약 비준 대가로 ‘사업장 점거파업 전면 금지’,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적용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ILO핵심협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내용들이다. 그런 가운데 경사노위 내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에서 ILO핵심협약 비준과 관련된 공익위원 권고안이 제출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자본가 측 요구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어서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ILO핵심협약 비준은 경사노위에서 노사가 대화로 풀어갈 의제가 아니다. 현 정부의 대선 공약이며 역대 정부 스스로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 약속해온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즉각 이행해야 할 사안인 셈이다. 자본가 단체에서도 불만은 있을지언정 ILO핵심협약 비준을 대놓고 반대하기 어려운 국면임을 감안하면 정부 주도로 비준부터 해놓고 나중에 국제기준에 따라 보완 입법을 추진하는 게 순서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가 곧바로 비준 절차에 돌입하지 않고 ‘선 법 개정, 후 비준’ 방침을 고수하며 갈등을 증폭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ILO핵심협약 비준을 노동착취 강화의 계기로 이용하려는 자본가정권

ILO핵심협약 비준을 계기로 노동자들이 당장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사실상 미미하다. 현재 경사노위 내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에서 나온 권고안에 따르면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가입 허용’, ‘공무원노조 가입 범위 확대’ 정도를 기대할 수 있다. 해고자 노조가입을 이유로 법외노조 통보를 받은 전교조는 법적 지위를 되찾을 수 있다. 또 학습지노동자, 보험설계사, 대리운전기사, 택배원 등 특수고용직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요컨대 이들 노동자들이 국민연금 직장가입 자격을 취득할 수 있을 전망이다.

하지만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도 협약 비준과 별개로 당장 대통령의 통보 한 마디면 합법노조 전환이 가능한 사안이다. 또한 권고안은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대의원 또는 임원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공무원, 교사의 단체행동권이나 정치활동이 여전히 묶여 있는 점도 문제이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조합법상 권리가 유보되었다는 점도 국제노동기준에 못 미친다. 이처럼 권고안 내용을 기준으로 봤을 때 ILO핵심협약 비준으로 인해 당장 노동자들이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실업자, 해고자, 공무원들의 ‘노조 할 권리’가 약간 늘어나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의 권고안에 대해서도 자본가 대표들은 펄쩍 뛰고 있다. 이들은 “해고자들로 구성된 노조가 사사건건 경영활동을 방해할 것을 우려한다”며 ILO핵심협약 비준의 조건으로 ‘사업장 점거파업 전면 금지’,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적용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무력화하고 강제노동에 대한 제약도 풀겠다는 것이다. ILO핵심협약 원칙에 역행하는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자본가들의 의도에 부응하고 있다. 중립을 가장한 경사노위 정부 측 위원들 사이에서 ‘사업장 점거파업 금지’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ILO핵심협약 비준 약속의 이행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와 이에 반발하는 국내 자본가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전략은 빤하다. 먼저 문재인 정부는 ILO핵심협약 비준에 대하여 ‘노동계의 숙원’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그로써 ILO핵심협약 비준은 ‘정부의 의무’가 아니라 ‘노동계의 오랜 숙원’을 들어주는 시혜 행위로 둔갑했다. 더불어 문재인 정부는 경사노위에 협상 테이블을 차려놓고 ILO핵심협약 비준에 역행하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노동계가 직접 수렴하도록 기획했다. 정부가 앉아야 할 자리에 노동계가 앉아서 제 살을 깎아먹는 협상에 임하도록 획책한 셈이다.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인 ILO핵심협약 비준에서조차 꼼수 부리는 문재인 정부

근래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노동조합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서 한국의 노사관계가 후진적”이라거나 “ILO핵심협약이 비준되면 ‘노조천국’이 될 것”이라는 말도 흘러나온다. 이러한 억측과 호들갑은 ILO가 마치 급진적 단체나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실상은 거꾸로다. ILO는 탄생 때부터 노동자들을 위한 기구가 아니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출현하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19년 3월에 코민테른이 창설되자 지배체제에 위협을 느낀 제국주의 세력이 국제연맹 자매기관으로 창설한 것이 바로 ILO이다. 노동자 계급의 도전에 겁먹은 제국주의 세력이 노동착취의 적정 수준을 유지하여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할 목적으로 창립한 기구인 셈이다.

ILO의 의결구조는 각 회원국의 사용자와, 정부와 노동자 대표로 구성된다. 지금 한국의 경사노위와 비슷한 합의방식이다.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지만 노동자들을 위한 기구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단지 노동자들의 동의에 의해 노동착취를 정당화하는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ILO협약에 담긴 국제노동기준은 곧 ‘국제착취기준’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기준은 오늘날 자유무역협정 등 국제무역 질서를 유지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요컨대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EU집행위원회가 한국에 ILO핵심협약 비준 이행을 촉구한 것도 양국 자본 간의 공정한 가격경쟁을 위해서다. 즉 무역 상대국의 자본가들이 자국에 비해 지나친 노동착취로 인건비를 절감하여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한편 ILO협약은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옹호를 가장 중시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의 기본권이 아니라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의 권리로 명시되어 있다. ILO협약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 보장 수준인데도 그것을 노동자 특유의 권리로 포장하여 노동자계급의 반발을 완화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착취질서를 도모한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ILO핵심협약 비준이 성사되어도 이른바 ‘노조천국’이 도래할 일은 결코 없다.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그로 인한 노동착취는 지속될 것이다.

물론 한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감안하면 ILO협약 수준의 노동조건 확보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런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협약조차 그냥 비준하지 않고,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 누더기로 만들고 있다. 정부의 당연한 비준 의무를 노동자에 대한 시혜로 호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노동권 이전에 인권의 문제라 할 수 있는 ILO핵심협약 비준 논란에서 재차 문재인 정권의 저급한 수준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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