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들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현실 거꾸로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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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헬 조선’에 역사 열풍이 불고 있다. 올 봄에는 뒤틀린 100년의 역사가 바로잡히고 온 나라에 ‘민족정기’가 솟구치며 ‘애국심’이 넘쳐흐를 듯하다. 정부, 언론매체, 지방자치단체, 민간단체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또는 ‘친일잔재 청산’ 등의 명분을 내걸고 갖가지 역사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 까닭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빌미로 문재인 정권 특유의 이벤트 정치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새해 벽두부터 지상파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역사물 특집을 내놓으며 역사 바람을 일으켰다. KBS는 1월 1일부터 독립운동가 100명을 소개하는 5분짜리 미니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나의 독립 영웅’을 방영 해왔다. KBS2 TV ‘도올아인 오방간다’는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를 버라이어티 방식으로 소개한다. MBC도 1월 초부터 미니다큐 ‘1919-2019 기억․록’ 100부작을 방영 중이다. MBC스페셜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도 유사한 프로그램이다. EBS도 다큐 10부작 ‘역사의 빛, 청년’을 방영하고 있다. 더불어 EBS 1TV ‘다큐 시선’은 음악, 미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잔재한 친일 문제를 다루고 있다. SBS 또한 1월 6일에 ‘의렬단의 독립투쟁’을 방영하며 역사물 경쟁에 뛰어들었다.

오마이뉴스, 한겨레, 경향신문 등 활자매체들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연일 쏟아내며 분위기를 거들고 있다. 심지어 역사에 반동적인 경제신문이나 스포츠신문에서도 100주년 관련 기사를 흔히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말모이’는 이미 1월 초부터 전국의 개봉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MBC는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대극 ‘이몽’을 5월 방영을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하는 중이다. SBS도 올해 상반기에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역사드라마 ‘녹두꽃’을 내보낼 계획이다.

역사 이벤트에 ‘올인’한 문재인 정권

‘100주년’과 같은 숫자에 기대어 이와 관련된 역사 상품을 만들어 파는 건 자유주의 매체들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런데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계기가 정부의 의도에 의해서 마련되고 있다는 점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 7월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직속 기구인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100주년 사업추진위’)를 출범시켰다. 원로 학자 한완상과 현직 국무총리 이낙연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4개 분과위원회에 걸쳐 사회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67명의 추진위원이 참여하는 기구이다. 여기에 ‘총괄위원회’와 ‘범부처협의회’, ‘기념사업추진단’ 등 실무 집행을 위한 별도의 단위도 포진하고 있다. 특정한 기념사업을 주관하는 기구치고는 매우 방대한 조직이다.

추진위원들 면면도 흥미롭다. 김정인 참여연대운영위원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등 자유주의 인사들이 각 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는 건 식상해 보인다. 하지만 대한상의 회장 박용만이나 경총회장 손경식 같은 자본가 대표들과 함께 민주노총위원장 김명환, 한국노총위원장 김주영 등 노동조합 대표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라크 파견 자이툰 부대의 장교와 지금은 대학생이 된 세월호 생존학생도 있다. 축구감독 차범근도 추진위원이다. ‘미투’운동을 의식해서인지 여성계 인물이 많이 포함되었다. 전반적으로 청년에서 노인까지 연령도 다양하고 직업도 다채로운 구성이어서 마치 대선 캠프를 연상케 한다. 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 확산을 고려한 느낌이다.

100주년 사업추진위는 이미 지난해 12월에 전체 회의를 통해 104개의 핵심사업을 담은 종합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그에 따라 100주년 기념기간으로 지정된 3월1일부터 4월 11일까지 42일 동안 집중적으로 행사가 배치된다. 대표적인 행사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리는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다. 2019년을 상징하는 2019명의 참여자가 전국 100곳을 횃불로 연결하는 빅 이벤트이다. 쉽게 쓴 3.1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보급, 3.1운동 100주년기념주화 발행, 각종 학술대회 등의 사업도 벌인다. 미국, 중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행사가 열린다. 효창공원의 독립공원화, 중국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전시관 개관, 우토로 기념관 건립 등의 기념사업도 진행 중이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기념 공모사업’을 벌이고 대상자로 선정된 지자체에 특별교부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전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들도 경쟁적으로 3.1절과 관련된 여러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는 자체적으로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100주년’ 슬로건을 내걸고서 다양한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여러 가지 기념사업과 더불어 ‘친일잔재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전광역시, 전라북도 등은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시리즈를 대규모로 준비하고 있다. 제2공항 건설 문제로 시끄러운 제주도는 3.1절을 맞아 2천여 주민이 참여하는 ‘제주 만세 대행진’을 계획하고 있다. 이밖에도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과 행사들은 그 수효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사진: 뉴시스]

과거의 그늘로 현재의 그늘을 덮겠다는 발상

이처럼 수많은 기념사업에는 적게는 수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인력도 필요하다. 이런 부담을 무릅쓰고 문재인 정권이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 이벤트를 추진하는 속내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과거의 그늘로 현재의 그늘을 덮으려는 것이다. 지독한 억압과 착취, 심각한 불평등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가리는 건 역대 지배세력의 해묵은 수법이지만, 문재인 정권은 여기에 더하여 자유한국당으로 대변되는 수구세력의 어두운 과거를 들추어냄으로써 자신들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 하고 있다. 결국은 이미 퇴조하고 있는 수구세력과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가려는 속셈인 것이다.

촛불에 편승하여 대선에서 승리한 문재인 정권은 임기 초반 대중적 기대감과 몇 가지 개혁 이벤트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집권 2년차인 지난해 문재인 정권은 반노동 행보로 계급적 본질을 노골화하면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사회적 위기를 자본주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한 자유주의 정권에는 답이 없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세 번에 걸친 남북정상회담 같은 빅 이벤트를 연거푸 연출했음에도 지난해 말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지도는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추월하는, 이른바 데드크로스(dead-cross)를 기록했다. 그처럼 지지기반이 무너지는 위기 속에서 문재인 정권은 집권 3년차를 맞았다.

대중을 현혹할 밑천도 떨어지고, 선거 때 표를 얻느라 남발한 공약들은 부메랑으로 날아오는 국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재인 정권은 지난 역사를 끄집어내어 현실의 방패로 삼아야 했다. 때마침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명분도 적당한 터라 문재인 정권은 행정 역량을 대거 동원하여 ‘친일’ 프레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못해서 나라가 이 꼴”이라는, 항간의 편협한 역사 인식에 기대어 이벤트 정치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이 여전히 정치권력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친일부역자들의 후손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 한국 사회 지배계급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게다가 이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에 수구세력은 뉴라이트를 앞세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고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건국절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런 마당에 임시정부를 부각시키며 ‘친일 청산’이나 ‘역사 바로 세우기’ 같은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문재인 정권은 지지율 하락을 어느 정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역사와 관련된 ‘이벤트’의 물량을 늘린다고 해서 100년 동안 뒤틀린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 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현실 거꾸로 세우기’

요컨대 3.1절 기념행사를 많이 벌인다고 해서 3.1운동의 정신과 의미가 확대되는 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역사이벤트는 어디까지나 자유주의 지배세력의 역사관을 단순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100주년 사업추진위는 3‧1운동의 정신과 성격을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은 요릿집에서 입으로 조선독립을 선언한 엘리트 인사 33인의 정신일 수는 있어도 거리에서 일제 총검에 저항한 조선의 200만 노동자 민중의 정신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당시 조선의 노동자 민중에게 독립이란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부 지배세력은 물론이고 조선 내부의 지배세력에 의한 착취와 억압에서도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즉 ‘모든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한마디로 ‘인간해방’의 정신이다. 이는 3.1운동을 계기로 활발해진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3.1운동의 정신에서 저항과 해방을 지워버렸다. 특히 ‘비폭력’을 3.1운동 정신으로 내세움으로써 당시의 무장투쟁이나 의열투쟁을 3.1운동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자유주의 정부의 행정력을 동원한 역사 이벤트는 지배계급의 편협하고 모순된 반쪽짜리 역사를 반복 재생할 뿐이다. 애초에 자유주의 지배세력에게는 바로 세울 역사 따위는 없다. 결국 문재인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현실을 거꾸로 세우고 있는 셈이다.

한편 ‘친일 청산’ 프레임으로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에도 문제가 있다. 친일청산을 부르짖는 이들은 흔히 “제때에 불의를 처단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정의와 공정성이 무너졌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비록 친일 부역행위 당사자들은 대부분 사망했거나 살았어도 저승을 눈앞에 두고 있는 100세 안팎의 노인들일 터이지만 지금이라도 이들을 단죄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이는 상징적이고 표면적인 조치일 뿐이다. 친일부역자의 후손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까지 정치, 경제, 언론, 학계, 문화예술 등 여러 부분에서 세력을 형성하며 부를 축적해왔다. 그 물적 기반을 해체하는 것이 진정한 친일 청산이다.

하지만 친일부역자들의 물적 기반에 대해서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문재인 정권의 친일 청산 캠페인에는 알맹이가 없다. 그것은 단지 과거를 이슈로 현실의 모순을 은폐할 뿐이다. ‘헬 조선’으로 표현되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이 바로 서야 역사도 바로 선다. 그 점에서 문재인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사실상 ‘현실 거꾸로 세우기’인 셈이다.

3.1운동 100주년의 진짜 의미는 ‘자본주의 청산’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고 70년이 넘도록 불의의 상징인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다. 대신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역사의 정의를 실현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이 청산되었다. 지난 100년의 한국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제 때에 불의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불시에 정의를 청산해버린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사회주의자 탄압과 청산에 가장 앞장선 세력이 바로 친일파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학살함으로써 살아남았다. 사회주의 세력이 건재했다면 진즉에 친일청산이 이뤄졌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역사는 이런 사실을 외면한다. 문재인 정권의 역사 이벤트 또한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반쪽짜리 이벤트로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건 자유주의 정권의 기만에 불과하다. 친일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필요한 것은 정부 주도의 이벤트가 아니라 체제의 변혁이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적 소유와 상속의 문제를 해결해야 가능하다. 결국 자본주의를 청산하지 않는 한 어두운 역사를 폭로할 수는 있어도 청산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3.1운동 100주년의 진짜 의미도 여기에 있다.

2 댓글

  1. 기사의 논지에는 동의하나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노동자민중”보다는 “인민대중”이나 “민중”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합니다.

  2. 반쪽짜리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점 맞습니다. 근데 진보진영은 3.1운동을 기념해서는 안되나요? 오히려 대중성을 견지하면서 민주당 정부와는 다른 관점으로 기념하는 이벤트를 열어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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