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생태론을 말하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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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ontecruz Foto/Flickr, CC BY-SA]

『사회주의자』는 지금까지 생태문제에 대한 다양한 기사를 게재해왔다. 이 기사들은 기후변화, 핵에너지, 쓰레기 대란, 재생에너지 갈등, 미세먼지 등 모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생태문제들 중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게 거론된 문제들을 다룬 것이었다. 이러한 생태문제들은 그 심각성이 거론된 지 오래되었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 기후변화: 심지어 미국 자본가들의 언론인 『포브스』조차 최근 “자본주의에 변화가 없다면, 2050년이 되면 그것은 인류를 굶어죽게 만들 것이다”란 제목의 기사를 내서 악화되는 기후변화를 경고했다. 이 기사는 “기업 자본주의는 아무리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한다 할지라도 가차 없는 성장 추구에 온 몸을 바친다”고 시인했다.
  • 핵에너지: 얼마 전 8주기가 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경우 여전히 사고가 수습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방사능 오염수가 바다로 방류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핵발전소의 고준위폐기물 수용능력에 한계가 와서 더 이상 폐기물을 저장할 곳이 없는 지경에 다르고 있다.
  • 미세먼지: 최근 2-3일간 한국은 최악의 미세먼지 속에서 살아야 했다. 대기 중 미세먼지가 개선되고 있는 추세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발생한 데에는 기후변화로 인한 대기상태의 변화가 지적되고 있다.

이제 “위기”라 불러야만 할 생태문제의 해결은 미룰 수 없는 시대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생태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문제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 이론이 없다면 생태문제를 올바로 분석하고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관된 실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 매체에서 여러 생태문제 관련 기사를 게재해온 만큼 이제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와 그것이 왜 장점을 지니는지, 다시 말해 맑스주의 생태론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맑스주의 생태론을 다루는 이 기사는 분량상 2회에 걸쳐 게재한다. 첫 번째 기사에서는 맑스주의 생태론이 생태문제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부상하는 과정,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올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매우 정확히 설명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다음 기사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초기 맑스의 생태적 문제의식,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 개념, 자본주의의 반생태적 본성 등 맑스주의 생태론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맑스주의, 생태문제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부상하다

사실 생태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맑스주의는 생태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는 주장은 낯선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 신사회운동과 더불어 현대 생태운동이 등장했는데, 그 운동은 맑스주의에 대해 현재 인류가 직면한 생태위기를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생태학이라고까지 비판했다. 미국의 저명한 맑스주의 학자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마르크스의 신진대사 균열론」(『생태 혁명: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인간사랑))이란 글에서 이러한 생태운동의 입장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맑스의 사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생태주의적이며, 소비에트의 실천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 (2) 맑스가 생태주의에 빛을 비춰주는 통찰을 제공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프로메테우스주의”(친기술적, 반생태주의적 시각들)에 굴복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 …… (3) 맑스는 농업 안에서 생태주의적 퇴보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였지만, 그의 핵심적 사회분석과 분리된 채로 남아 있다고 논하는 경우.

이런 비판은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생산의 증대를 중시하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권의 모습에서, 그리고 생태문제에 대해 적극 대응하지 않은 당시 사회주의 세력들의 태도에서 일정 정도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이론 그 자체가 문제라고까지 결론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 이 기사가 주장할 내용인 바 애초 맑스주의에는 생태문제를 올바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 틀거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한때 근거 없는 것처럼 치부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맑스주의 이론으로 생태문제를 설명하려는 흐름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맑스 사상의 중심에 풍부한 생태학적 통찰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 결과 ‘생태문제에 무관심한 맑스주의’라는 인식은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됐다.

맑스주의 이론으로 생태문제를 설명하려는 흐름의 대표적 인물은 2017년 작고한 맑스주의 학자 제임스 오코너였다. 그는 1988년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란 학술잡지를 창간하고 그 첫 호에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 이론적 서설」이란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오코너는 자본주의에 과잉생산 공황을 야기하는 1차 모순 외에도 과소생산 위기를 낳는 2차 모순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소생산 위기란 이른바 ‘생산조건’의 희소한 성격에서 기인한다는 것이었다.

오코너는 맑스주의 틀에서 생태문제를 설명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이론 그 자체는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주장은 우선 생태문제를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특정한 원인으로만 바라보는 협소한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또한 생태문제를 이른바 계급문제, 노동문제와 별도로 존재하는 병렬적 존재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존 벨라미 포스터와 생태문제에 천착한 또 다른 맑스주의 학자 폴 버킷의 비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생태문제들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이 반드시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위기론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맑스주의적 생태주의 분석이 발전된 견해로 인식되는 정도가 이것이 특수한 경제위기론으로 통합되는 정도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문제가 이러한 방식으로 틀지어질 때에 기어들어오는 일종의 경제주의와 기능주의가 존재한다.

– 존 벨라미 포스터,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공감))

오코너가 제시하는 “두 가지 모순”이라는 이분법은 생산조건을 자본의 노동착취에 “외부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요구하는 조건과 인간적 발전이 요구하는 조건 사이의 구별을 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완화가 노동자의 투쟁과 생태적 투쟁을 인위적으로 분할하고, 후자를 기본적으로 “비계급적” 투쟁으로 정의하는 효과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내부적” 모순과 “외부적” 모순 사이의 이원론은 차이와 특수성이라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정치에 대한 오코너의 비판을 약화시킨다.

– 폴 버킷, 「적색과 녹색의 융합」(『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공감))

오코너의 이론이 나온 지 10년이 지났을 무렵인 1999년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인간사랑)과 폴 버킷의 『마르크스와 자연: 적록 전망』(한국에는 미출간됨)이 출판되면서 오코너의 한계를 넘어선 본격적인 맑스주의 생태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둘의 이론이 지닌 의의는 주류 생태운동의 맑스주의 비판을 추종,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 자체에 생태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틀이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 소개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 서문을 보면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애초에 책 제목을 『마르크스와 생태학』으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탐구의 결과 몇 가지 이유에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으로 바꾸게 되었다. 제목의 변경은 지난 몇 년 동안 마르크스(그리고 생태학)에 관한 내 생각이 극적으로 변화했음을 나타낸다.

마르크스는 종종 반생태학적 사상가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글들에 매우 익숙해 있었던 나는 이러한 비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알기로 마르크스는 저작의 많은 지점들에서 깊이 있는 생태학적 깨달음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의 세계관이 매우 생태학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생태학이 …… 체계적이라는 점, 이러한 생태학적 전망이 그의 유물론에서 나왔다는 점을 결론으로 내리게 [됐다.]

포스터와 버킷의 책이 나온 후, 맑스 사상의 생태적 함의가 분명히 밝혀지면서 사회주의 세력들은 생태문제에 대해 이론적 자신감을 가지고 생태운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맑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는 주류 생태운동의 주장은 이제 힘을 잃은 실정이고, 맑스주의의 주장대로 생태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 및 계급문제와 결합시켜 보는 것이 점차 사람들에게서 많은 설득력을 갖게 됐다.

그 한 예로 기후변화에 대한 급진적 구호인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변화를’을 들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자』 11호에 실린 대니 캐치의 인터뷰에서 확인되듯이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생태적 전망을 결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세워 미 하원에 입성한 오카시오-코르테스가 가장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 청정에너지로의 전환과 녹색 일자리 창출, 천만 달러 이상 자산 소유자에 대한 70% 과세 등의 내용을 담은 ‘녹색 뉴딜'(green newdeal)이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포브스』와 같은 자본가 언론이 기후변화의 원인은 자본주의에 있다고 실토하고 주류 남성잡지 『GQ』에서조차 “억만장자가 기후변화의 주된 원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리는 것은 또 다른 예일 것이다. 매년 여름 폭염 때 온열질환으로 아프거나 사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후변화의 영향이 사회경제적 처지에 따라 다르게 미친다는 점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절감하게 됐다. 반면 생태문제가 특정 생산체제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일으킨 문제이자 인간 전체에게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주류 생태운동의 관점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사진: stephenmelkisethian/flickr, CC BY-NC-ND]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하는 맑스주의 생태론

그렇다면 맑스주의 생태론이 강점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맑스주의 생태론의 내용은 다음 기사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지점을 말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맑스주의 생태론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는 유물론이라는 철학에 기반을 둔 사상이다. 유물론은 물질이 의식에 비해 본원적이라고 보는 철학으로, 물질이 모든 것에 선차적이며, 물질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며, 인간의 의식 역시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철학이다. 따라서 유물론은 일체의 종교적, 관념적 견해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제공한다. 유물론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맑스 이전 근대 여명기의 유물론은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우선 모든 자연현상을 기계의 부품처럼 최소단위로 분해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기계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이전의 유물론은 인간의 특성을 올바로 고려하지 못하여 인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지닌 유물론적인 태도를 버리고 보수적이거나 관념론적 태도를 취하곤 하였다.

맑스는 이러한 유물론을 추상적 유물론이라고 규정했다. 이를테면 맑스는 『자본론』 1권 15장에서 “자연과학의 추상적 유물론(즉, 역사와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자들이 일단 자기의 전문영역 밖으로 나왔을 때에 발표하는 추상적이고 관념론적인 견해에서 곧 드러난다”고 말했다. 맑스는 기존 유물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맑스는 유물론에 변증법적 방법론을 결합시켰다. 변증법적 방법론은 현상을 여러 현상들과의 연관 속에서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자, 이 현상을 생성, 발전, 소멸이라는 구체적인 운동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인간의 역사에도 적용시켜나간다. 즉 역사유물론을 발전시켰다.

역사유물론은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지닌다.

첫 번째는 인간을 자연 속의 존재로서 파악한 점이다. 이는 인간을 다른 자연대상과는 분리된 어떤 고귀한 존재이거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보는 관념론과 철저히 단절하고, 인간을 자연의 발전 속에서 나온 하나의 생명체로 봄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인간의 역사 역시 자연의 운동처럼 생성, 발전, 소멸의 구체적인 역사발전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방법에 따라, 인간이라는 생물의 발전과정이 인간의 역사이며,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인간이라는 생물이 생존하기 위하여 자기 주변의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세 번째로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수한 성격으로서 노동을 강조하였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하는 것은 바로 노동을 통해서이다. 맑스는 자본론 1권, 7장에서 노동과정에 대해 분석하며 이를 분명히 하였다. 맑스에 의하면 “노동과정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는 인간의 공통된 특징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자 유기체의 하나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불가피하며, 이는 어떤 사회형태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자연이 부과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을 통해 외부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인간 내부의 자연, 즉 인간의 본성 역시 변화한다. 맑스는 이런 인식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어느 한쪽의 일방향적 영향을 받는 수동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임을 보여주었다. 즉 인간이 자연에 마냥 예속되어 그것에 수동적으로 적응해야만 하는 존재도 아니고, 그와 반대로 자신을 둘러싼 자연 조건을 초월해 자신의 생각대로 자연을 마음대로 변형하고 이용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 노동형태

이런 이론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것이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추상적인 노동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노동이 어떠한 형태를 띠느냐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에 대해 중요한 지점을 지적한다.

개인들은 그들이 그들의 삶을 나타내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에,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에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일치한다.

또한 생태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도 인간의 구체적 노동형태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생태문제는 본질 상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상호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이 발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류 생태운동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존재 자체, 혹은 인간의 자연 이용 자체가 생태문제를 낳는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맺는 특정한 노동형태가 어쨌느냐에 따라 자연과 인간 사이에 파괴적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상생하는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 국지적인 자연파괴, 생태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이 자연과 서로 상생하는 관계 속에서 살았던 시기 또한 매우 길었다. 지금과 같은 전 지구적 생태위기가 발생한 것은 자본주의가 들어서고 난 후부터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문제의 원인으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지목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요컨대 현재 인간이 생태위기에 직면한 것은, 단순히 인간이 지닌 어떠한 본성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라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노동형태, 생산방식 자체 때문이다.

이 기사는 맑스주의 생태론을 말하다 ②로 이어집니다.

농민의 자식이라는 성장배경이 생태학에 대한 관심을 싹 트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운동을 접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떴다. 노동해방실천연대 회원. 번역서로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2012), 『마르크스의 생태학』(201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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