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실천을 위해 올바른 이론이 필요하다: 변혁당의 반론 「사회주의, 그리고 페미니즘」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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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지난 달 초 『변혁정치』에 「사회주의, 그리고 페미니즘-페미니즘과 여성해방론의 차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변혁당 측에서 『사회주의자』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다」라는 글에 대해 반론 글을 발표한 것이다. 사실 필자는 『변혁정치』에 나온 글을 읽고 반가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필자를 포함한 『사회주의자』의 필진들은 지금까지 “사회주의자가 바라보는 여성해방” 토론회,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의 출간 등을 통해 여성해방론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을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변혁당의 답변으로 인해 더욱 깊이 있게 논의할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변혁정치』의 글에서 이야기 하듯 “현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여성억압에 맞선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이라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해당 글이 여성억압의 기원이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규정 등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의 경계에 있는 중요한 이론적 쟁점들을 회피하기 위해 ‘실천’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통해 운동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의무인 바, 정교한 이론의 정립을 등한시하기 위해 실천을 우위에 두는 것은 올바른 사회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다.

또한 지금까지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가부장제의 효용성 문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합 문제와 관련해 수많은 논쟁이 이루어져 왔다. ‘이원론’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기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 터져 나온 자성의 목소리이며, 이원론과 비슷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기는 하나 ‘사회재생산론’이 그 나름의 대안으로서 제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의 역사에 대해 모르고 있지 않은 이상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제기를 단순한 용어상의 논쟁으로 축소시키기는 어렵다. 무의미한 개념 논쟁을 멈추고 실천에 집중하자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변혁당 측에서 과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의 궤적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변혁당 측에서 비판한 『사회주의자』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다」라는 글이 ‘페미니즘’을 ‘여성해방론’이라는 용어로 교체하자는 소박한 주장을 하고 있는 글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문제는 ‘페미니즘’ 혹은 ‘여성해방론’이라는 용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억압을 분석하고 여성해방의 전망을 내놓기 위한 이론적 틀의 차이에 있다.

이원론이 왜 문제인가

김민재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다」라는 글은, 변혁당이 공공연하게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에 섬으로써 이원론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변혁당은 이번에 나온 반론 글을 통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에 유물론적 분석이 필요한 이유를 제공”했기 때문에 “일각에서 그 입장을 이원론으로 평가하든 아니든 그 부분은 우리에게 있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해당 글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억압에 대한 역사유물론적인 분석을 가능케 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주지하듯이, 역사유물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와 발전이라는 총체적인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 자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역사유물론을 도입하기는커녕,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분리시킴으로써 역사유물론의 범주를 협소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앞선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계급문제는 자본주의의 문제이고 여성문제는 가부장제의 문제이며, 양자가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상이한 이론체계를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계급문제는 생산영역에, 여성문제는 재생산영역에 위치시켜왔다. 다수 여성이 겪는 임신·출산, 가사·양육 등의 문제는 경제 문제나 재화의 생산을 설명하는 생산양식이라는 틀 속에서 설명될 수 없으므로,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온 것이다.

변혁당은 꾸준히 이러한 이원론적 입장을 고수해왔다.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수행자를 성으로 가르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는 이성애 중심적 가족제도를 공고히 뿌리내리게 하면서 자본주의가 굳건히 유지될 수 있는 기본구조를 형성했다.

(「사회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2019. 10.)

…… 한국사회의 성별 임금 격차 현상은 배우 심각하다.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적 착취구조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구조가 상호작용하면서, 생산노동은 우월하고 재생산노동은 열등하다는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 자본주의에서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일은 곧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또 남성이 수행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매겨진다. 반면,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던 재생산 노동(가사, 육아, 돌봄 등)은 이러한 남성의 생산노동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므로, 재생산노동이 가정을 넘어 생산영역에서 이루어지더라도 이는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지속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것이다.

(「3.8세계여성의 날-3시 STOP과 여성노동자의 현실」, 2018. 3.)

이렇듯 변혁당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노동은 생산 노동보다 열등한 재생산 노동이라는 차별적 신화가 만들어진다는 설명을 통해 여성억압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잘못된 분석이다. 『자본론』에 따르면, “생산의 조건은 동시에 재생산의 조건”이며, “어떤 사회도 그 생산물의 일정한 부분을 끊임없이 생산수단, 즉 새로운 생산물의 요소로 재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산을 계속할 수 없다.” 즉, 재생산은 생산의 객체적인 조건과 생산자인 인간을 갱신하여 생산과정에 다시 투입하는 과정으로, 생산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또한 맑스·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생산의 세 번째 전제로 “자기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만다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내 번식시키기 시작한다”라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즉, 생산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재생산노동이라 칭하는 임신, 출산, 양육 등을 포괄하는 개념인 것이다. 때문에 여성이 겪는 특수한 억압이 ‘생산’이라는 틀 내에서 역사유물론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의도된 오독, 혹은 무지에서 비롯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원론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역사유물론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로서 결코 간과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당부하고 싶다.

여성억압의 기원에 대한 잘못된 설명

여성억압의 근원이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있다는 변혁당의 입장은 이원론적 함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여성억압의 기원에 대해 잘못된 설명을 제공하고 있으며, 개념 상의 오류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맞물리는 과정에서 여성억압이 탄생했다면, 자본주의 이전의 여성억압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고, 자본주의는 가부장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체제라면,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이전에 가부장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여성억압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가부장제는 도대체 언제, 왜 만들어진 것인가?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일단 핵심적인 문제만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① 가부장제론의 답습

먼저 해당 글은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함께 여성억압을 탄생시킨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으면서도, 가부장제, 가부장적 질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등 개념을 혼용함으로써 가부장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제가 봉건제, 자본주의 등과 동등한 위상을 지니는 하나의 체제인지, 이데올로기일 뿐인지 확실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해당 글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가부장제를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주장했으나, 과연 그런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한 체제의 성격을 나머지 하나의 성격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손쉽게 치환해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중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제를 지나치게 견고한 체제로 보았다고 생각한 이들은 자본주의에 무게 중심을 두고 가부장제를 하나의 수식어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독립된 체제로서의 위상을 가부장적 질서나 이데올로기로 낮춘 뒤, 가부장제를 가변적이거나 유동적인 개념으로 만든다고 해서 ‘가부장제’ 개념이 갖는 초역사성이란 한계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론은 ‘가부장제’라는 이름의 여성억압적 체제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한계를 갖고 있으며, 가부장제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고쳐 부른다고 해서 그 한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기원, 우리 식으로 바꿔 말하면 여성억압의 기원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제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②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자의적 규정

주지하듯이, 자본주의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임금노동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인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하지만 해당 글은 자본주의가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자의적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적 소유·임노동제와 가부장적 질서 중 무엇을 딛고 서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착취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변혁당의 반론글은 맑스주의에 대한 매우 기본적인 수준의 이해조차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든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든 간에 자본주의 자체를 여성억압의 ‘원인’으로 설정할 수는 없다. 물론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성별임금격차, 경력단절 등 자본주의에 고유한 여성억압이 탄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억압 자체는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해당 글은 자본주의 하에서 나타나는 여성억압의 존재감을 강조하려는 의도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성억압 자체의 고유한 기원을 무시하는 한계에 빠져들고 있다.

사회주의자는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에 임할 때도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도모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을 생산양식 외부의 독자적인 틀을 통해 설명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며, 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페미니즘 또한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다. 만약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체제를 상정하지 않았다면, 굳이 생산 노동과 분리되는 재생산 노동이라는 물적 토대를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무리하게 맑스주의의 기본전제를 왜곡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억압의 문제를 중요하게 보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을 기본 모순의 위치에 두기 위해 독자적인 이론틀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억압의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해 반드시 페미니즘의 문법을 따라야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시야에서 여성억압을 바라보는 것은 계급억압을 여성억압의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산의 변화와 발전이라는 총체적인 틀 속에서 여성억압을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억압의 기원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맑스주의의 틀을 협소화하지 않고도 자본주의 하 여성억압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닌다.

변혁당은 이번 반론글을 통해 “운동이 드러나는 것은 입장에 기반한 실천이며, 대중은 그 실천으로 운동 세력을 기억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중들의 뇌리에 남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올바른 실천과 입장을 통해 기억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늘 사회주의라는 총체적 이론 체계 내에서 실천의 방향을 일관된 방향으로 엮어 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여성해방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라면,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에 임할 때도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도모해야 한다.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이론적 간극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성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페미니스트’, 노동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사회주의자’가 되면서 양 진영을 오고 가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간다. ‘사회주의’를 통해 ‘여성해방’을 도모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서 ‘페미니즘’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회주의를 통해 인간해방을 달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니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칭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또한 이미 대중적으로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의 동의어로 알려져 있으니, 더 많은 대중들의 공감을 사기 위해 ‘페미니즘’의 틀 속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라면, 여성해방 문제에 대해 불철저하고 관성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문제는 사회주의의 틀 속에서 논의해야 하지만, 여성문제는 굳이 사회주의의 틀 내에 재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자체가 여성해방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라면, 일관된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여성억압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입장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실천을 통해 대중들에게 기억되어야 한다. 그것이 여성해방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다.

지금이야말로 여성억압에 맞선 실천을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이끌고 가기 위한 이론적 고민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인가’는 무의미한 개념 논쟁이 아니라, 여성해방운동을 만들어감에 있어 어떤 입장이 ‘실천’에서 유효한지 판가름하는 논쟁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회주의자라면, 진지하게 이러한 논쟁에 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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