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가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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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불안과 위기의 연속이다.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 신세에서 언제 해고될지 모르며, 치솟는 집값과 물가 때문에 얼마나 더 궁핍해질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지구의 온도가 어떤 재앙을 야기할지도 모르고, 군비경쟁과 패권다툼이 언제 전쟁으로 폭발할 지도 모른다. 여성들은 뒤따라 걸어오는 사람이 나를 강간하려는 것은 아닌지 불안에 떨며 밖을 나서야 하며, 병원비조차 감당하기 힘든 노인들은 내일 당장 아플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해야 한다.

불안과 위기만 존재한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현실은 더 비참하다. 숱한 실패와 절망으로 한편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로 인한 불만과 분노를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로 해소하려는 경우도 허다하다. 뉴스에서는 온갖 사건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주위에서는 입시 실패, 취업 실패, 창업 실패를 넘어, 인생 실패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온다. 박근혜를 사실상 끌어내렸다는 승리감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위기와 불안, 실패와 절망으로 점철된 현실은 단숨에 우리를 짓누른다.

현실이 전혀 살만하지 못하다면, 왜 그러한지 따져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육은 이미 주어진 답을 암기하고 기계처럼 답습하는 것만을 허락할 뿐이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으며,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현실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혁명이란 단어에는 알레르기를 느끼도록, 돈이 만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말은 일단 거부하도록, 현실이 똥이든 된장이든 그저 잘 순응하고 복종하는 “개돼지”로 살도록 훈련받아왔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삶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삶의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 갈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지금 이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사회가 주입하는 복종의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처지를 꿰뚫는 앎을 개척해야 한다. 그 앎으로부터 대안을 모색하고 삶의 변화를 위한 물질적 실천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당연하게도, 말은 이렇게 쉽지만 실행에 옮기려니 너무 막연하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과거에 같은 고민을 전개하고 실천으로 옮겼던 인물들에게 있다. 그러니 이제 마르크스를 읽자.

사회 혁명이란 탈인간화된 삶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다

세간에는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와 억측이 가득하다. 문제는 이러한 오해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계급이나 경제문제로만 국한시킨다던가, 노동자들이 겪는 착취에 비해 젠더, 인종, 민족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을 홀대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아마 오해와 억측만 가지고도 책 한 권은 족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얽히고설킨 오해를 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처음으로, 즉 마르크스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에 관한 어떤 것도 나에게 낯설지 않다.”라는 말을 자신의 경구로 삼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문제에 사려깊게 천착하였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탈인간화된 삶”에 반대하며 인간해방을 외쳤다. 그는 보편적 인간해방을 위해 “현 사회의 모든 비인간적 생활조건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모든 해방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인간 자신에게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인간해방이란 인간들 사이에 어떠한 억압과 착취, 소외도 발생하지 않는 삶의 조건을 이룩해가는 운동이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를 의미했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 운동이란 이미 실재하는 억압과 착취, 소외에 맞선 현실적 투쟁이었지, 머릿속에서 창조된 공상이나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춰 달성하는 이상이 아니었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이 현실 사회가 낳은 모순으로 잉태되었음을 역설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나가는 현실적 운동”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이 운동은 반드시 현실에 어떠한 억압이 존재하는지, 그것을 낳는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면밀히 탐구할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마르크스도 보통 인간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대에만 살았던 인간이기에, 오늘날 무수히 나타나는—한편에서 민족, 인종, 장애, 젠더 등 소수자에 대한 다양한 위계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모든 탈인간화된 삶”의 양상을 완벽하게 분석하지는 못한다. 이는 오히려 지금 우리가 보편적 인간해방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망을 이어받아 수행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산업 노동 계급”의 문제로만 국한시켰다는, 따라서 사회주의는 여성억압이나 생태위기 등 오늘날 회자되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적용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옳지 않다. 이미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보편적 인간해방의 의미를 지키면서 현실의 다양한 문제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들(가까운 예시:,)이 점점 등장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가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이 지닌 역할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언급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사회주의 운동이 오직 노동자 계급만의 이익을 위해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을 강조하는 이유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는 심장인 동시에 자본주의를 철폐할 물질적 조건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고민한 보편적 인간해방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가 고민했던 인간해방이 우리가 처한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출발하며,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이를 올바르게 인지하고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보다 포괄적인 시선에서 우리의 처지를 인식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해방 사회를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마르크스 읽기에서 도입부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의 진가는 그가 수십 년에 걸쳐 닦아놓은 과학적 세계관에서 드러난다.

세계는 완성된 사물들이 아닌 과정들의 복합체이다

마르크스가 “탈인간화된 삶”을 반대하며 인간해방을 외친 것은 예수처럼 전지전능해서가 아니라, 그가 관찰했던 사회가 이미 열악한 삶의 조건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의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살아야 했던, “악취” 나는 “하수구” 옆 비좁은 “혈거”에서 사는 것도 모자라 집세를 못 낼 경우 그 “혈거”에서 조차 쫓겨나야 했던, 먹을 것이라고는 썩은 감자가 전부였던 유럽 대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조건들을 목도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1831년과 1834년에 발생한 리옹 견직공들의 봉기, 183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영국 노동자들의 차티스트 운동, 1844년에 발생한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봉기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과학적 사회주의의 오솔길에 접어들도록 인도했다.

마르크스는 “선생 행세”하듯 노동자들의 투쟁을 멋대로 평가하고 재단하기 보다는, 그들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파헤쳤다. 그가 끊임없이 중요하게 여겼던 주제는 “프롤레타리아트란 무엇”인지, “또 그들은 자기의 이러한 존재에 걸맞도록 역사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지였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적 처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으로부터 기원하는지,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이 필연적으로 투쟁에 나서게 되는지를 고찰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해야 했고, 그의 관심은 자연스레 역사와 정치경제학에 대한 학습으로 이어졌다.

한편 그 당시 주류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영원한 체제인 것처럼 선전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적 관계를 ‘자연의 섭리’로 규정하였으며, 그들의 섭리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영원불변한 특성을 지닌 형이상학적 관념이었다. 엥겔스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경제학은 사적소유의 권능에 의문을 가져볼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근래의 경제학은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모순들을 은폐하기 위해서……자신의 전제들을 배반하고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궤변과 위선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의 이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꾸준하게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의미한 행위로 치부하는 데 사용될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주류경제학자들의 궤변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가 <공산당 선언> 첫 장에서도 서술하듯,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이나 자연의 섭리로 끊임없이 존속되어온 체제가 아니라 인류역사의 “장구한 발전과정의 산물”에 불과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 자연이 쉬지 않고 움직이듯 자연사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의 역사도 일시적이며 과도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한 평생을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파헤치는데 헌신하는 동시에, 역사유물론—인간의 사회와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자연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에 관한 과학적 근거를 보충하는데 몰두했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역사유물론이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역사 발전 5단계론이나 토대-상부구조론에 집착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인 현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저 도식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 한다며 교조주의자라는 비난을 남발한다. 그러나 역사유물론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 내부에서 자연과 분리된 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노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연과의 보편적인 “물질대사” 관계를 맺는데, 구체적인 물질대사 관계와 노동 방식은 사회가 구성되는 형태에 따라 서로 다른 특수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회구성체의 ‘발전 단계’나 ‘구조’ 자체가 아니라,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특수성에 따라 구체적인 물질대사 관계와 노동 방식도 변화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유물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에도 나름의 고유한 물질대사 관계와 노동 방식이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통해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생산의 근본적 목적이기에, 필연적으로 사회 전체 수요와 무관한 과잉생산 및 자본 간의 경쟁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이윤을 보장받기 위해 생산력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며, 생산 규모 또한 무제한적으로 확장시키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는 필연적으로 착취당하는 인간에 대한 궁핍을 극대화하고, 자연에 대한 수탈을 회복하기 힘든 수준까지 야기한다. 이러한 모순은 결국, 견딜 수 없는 야만에 내몰린 피억압 대중의 투쟁으로 터져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마르크스가 인간의 사회를 보다 총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자본주의 체제는 다른 사회 형태와 마찬가지로 일시적 성격을 띨 뿐만 아니라,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체제이다. 그리고 본질상 자기 파괴적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모두를 위협하는 체제이기에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지금 당장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역사유물론이라는 틀을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관점이 자본주의적 인간이 아닌 역사적 인간의 어깨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모든 생산도구들 중 가장 강력한 생산력은 우리 자신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우리는 주체보다는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간다. 거의 대부분의 인생을 학생이자 피교육자로, 노동자이자 피착취자로, 국민이자 피지배자로, 사람이자 피억압자로 살아간다. 이러한 처지에 불합리함을 느끼더라도, 홀로 이 거대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자조하며 마냥 꾸역꾸역 살아간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욕구는 가득하지만,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믿으며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모습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역사의 주체가 우리들 자신이라고 이야기한다. 사회를 바꿀 힘을 쥐게 될 사람들은 결국 착취당하고 지배받고 억압을 겪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봉건 사회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산출된 것처럼,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도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산출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사회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조건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수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모든 생산도구들 중 가장 강력한 생산력은” 우리 자신이자, “혁명적 계급 그 자체”라고.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이 사회의 모순을 통찰하고, 구체적 실천을 통해 모든 인간의 사회적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역사는 항상 억압받는 객체들이 변화의 주체로 거듭날 때 바뀌어 왔다. 인간은 이 진리를 무수히 증명해왔으며, 심지어 우리는 얼마 전 12월 9일에도 증명해냈다! 마르크스를 손에 쥐어야 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억압 속에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직업적 정치가나 소수의 지식인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우리에게, 지금 이곳에서 억압받는 당신이 바로 변화의 주체라고,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한 앎과 실천뿐이라고 말한다.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 스스로의 사업으로 달성되어야 한다.’ 이 명제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그것이 변화를 갈망하는 우리가 지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이유다.

 

한개의 댓글

  1. 자본론을 지은 칼 막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사치스런 부르주아였다.

    좀 알고써라

    공산주의가 망한지가 언젠데

    글고 무상복지로 망한 나라가 현재 내전을 겪고있는데도

    사회주의 신봉세력이 활개치는걸 보고 있자니ㅋㅋ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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