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프레임이 가리는 계급·착취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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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alktomeinkorean]

2014년 12월. 언니는 이륙을 위해 활주로로 움직이던 여객기를 회항시켰다. 봉지 째 내온 땅콩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년 4개월 뒤. 동생은 외주 광고회사 직원들을 향해 제트엔진 소음 수준의 고함을 지르며 물컵을 투척했다. ‘광고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국내 최대 운송자본인 한진 재벌 3세들의 이야기다.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이 사건들은 온갖 대중매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덕분에 사건의 두 주인공 조현아, 조현민 자매는 웬만한 인기 연예인을 능가하는 유명세를 누리게 되었다. 덩달아 이명희, 조원태 등 나머지 한진 자본 일가의 부당한 행위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건 대부분의 기사가 ‘물벼락 갑질’, ‘대한항공 갑질 비리’, ‘오너 일가 갑질 사태’ 등 ‘갑질’이라는 주제어에 따라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갑질’과 관련된 뉴스가 한진 일가 사건에만 국한 된 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이런저런 관계 안에서 벌어진 온갖 부당한 행위를 알리는 기사가 하루에도 수십, 혹은 수백 개씩 ‘갑질’ 키워드를 달고 생산되었다. 그 양상도 가지가지다. 기업체 대표가 자신의 자가용 운전기사를 폭행하고, 한 지방직 공무원은 자신이 관리하는 기간제 노동자들을 집안일에 강제로 동원했다. 어느 복지재단 설립자는 인사를 안 한다는 이유로 사회복지노동자를 때리기도 했다. 교수가 대학원생의 연구비를 횡령하고, 사립학교 이사장이 교사들을 폭행한 경우도 있다. 독점적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대상으로 벌인 횡포도 비일비재하다. 대리점에 대한 본사의 횡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부당행위들이 거의 매일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폭로되고 있다.

‘갑질’ 프레임에 갇힌 한국 사회

요컨대 인터넷 포털에서 ‘갑질’로 검색되는 뉴스 기사만 무려 27만 건이 넘는다. ‘갑질공화국’이라는 말도 나온다. 한국 사회는 ‘갑질’ 프레임에 갇혔다. 언론만이 아니다. ‘24시간 갑질 피해 신고센터’나 ‘갑질119’처럼 아예 ‘갑질’을 간판으로 내건 사이트가 시민단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 등 정부기관도 ‘갑질 대책’ 따위의 공식 문건을 내놓은 바 있다. 정치권이나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활동에서도 ‘갑질’이라는 표현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물론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행위들을 어떤 경로로든 파헤쳐 공개하는 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갑질’이라는 프레임에 구겨 넣어도 되는 걸까.

다들 알다시피 ‘갑질’은 ‘갑을관계’에서 비롯된 말이다. 계약서 작성 때 간명함을 위해 당사자의 이름 대신 ‘갑’과 ‘을’로 쓰는 데서 기인한다. 물론 거기에 ‘위아래’나 ‘우열’의 의미는 없다. 역법(曆法)의 천간(天干)에서 빌려온 이 말들은 그저 순서를 나타낼 뿐이다. 다만 현실의 계약자들은 주로 돈을 주고 사는 쪽을 ‘갑’, 돈을 받고 파는 쪽을 ‘을’로 부른다. 자본주의 경제활동에서 구매자가 우대 받는 경향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구매자가 우위를 누리는 건 아니다. 독점 대기업과 영세한 대리점의 관계처럼 판매자가 우위를 점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모든 ‘갑’이 ‘을’에 대하여 우월적 지위를 갖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평등한 권리관계에서 발생하는 부당행위나 횡포를 ‘갑질’로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환유(換喩)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질적 특징으로 전체를 보여주는 문학적 비유이다.

환유는 독자나 관객의 관심을 끄는 데 유리한 표현법이다. 그래서 흥행과 이미지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정치적 선전이나 선동에 유용하다. 예를 들면 ‘헬 조선’이라는 한 마디로 한국 사회의 복잡한 현실에 대한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금수저/흙수저’ 따위의 말은 불평등한 계급사회의 실상을 선명한 이미지로 압축한다. ‘갑질’ 또한 불평등한 인간관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부당함에 대하여 이른바 ‘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말이다. 억압에 치인 사람들은 비록 자조적일지라도 이처럼 현실을 꼬집는 유행어를 공유함으로써 촌철살인의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신세한탄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하는 게 나은 법이니까.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지워버리는 유행어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러한 유행어들은 눈앞에 드러난 현상을 공유하며 현실을 꼬집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 현상을 야기한 본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그런 점에서 ‘갑질’이라는 유행어도 수상하다. 이 말이 지시하는 범위부터 모호하다. 굳이 정의를 내린다면 “권리와 관련된 계약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이 상대적 약자인 ‘을’에게 가하는 부당한 행위”쯤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아무 데나 ‘갑질’을 갖다 붙인다. 그만큼 파급력이 큰 유행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노동자들 입에서도 ‘갑질’이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흘러나온다. 물론 대부분의 ‘갑질’이 고용관계에서 일어나며, 그 피해자도 대부분 노동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새삼스러울 게 없다. 하지만 그 흥행만큼이나 ‘갑질’이라는 유행어가 삼켜버린 것들에 대해 냉정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갑질’에서 ‘질’은 사람의 행위를 뜻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갑질’ 프레임은 체제의 부당함을 개인의 부족한 인성에서 비롯된 행위 탓으로 여기게 한다. ‘갑’의 분노 조절 능력이 문제라는 식이다. 따라서 특정한 자본가의 ‘갑질’에 대한 비난이 거셀수록 ‘갑질’ 하지 않은 ‘갑’은 정당성을 얻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더불어 ‘갑질’을 막으려면 부당한 행위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갑’들의 인성이 바뀌어야 하며, 피해당한 ‘을’들은 오로지 공권력의 처분을 바라보며 ‘갑’들의 마음에 자비심이 깃들기를 기대하는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야 한다. 물론 ‘갑질’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국사회 특유의 수직적 문화’가 문제라는 설명이 따라 붙는다. 역시 의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관념론적 착각이다. 게다가 불평등한 관계에서 일방이 저지르는 부당 행위가 한국에서만 일어난다고 보는 것도 오류이다. 그런 행위는 모든 계급사회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갑질’이 사라져도 계급적 착취와 불평등은 남는다.

한편으로 ‘갑질’이라는 말은 ‘갑’의 부당한 행위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동시에 ‘갑’의 지위 자체를 은연중에 인정해버리는, 이중적 작용을 일으킨다. 실은 저 유명한 ‘금수저’라는 말도 부유한 세습자의 일탈 행위를 꼬집는 동시에 부당한 세습제도 자체는 묵인한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유행어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노동자들은 ‘갑’에 굴종하는 ‘을’로 존재하며, ‘금수저’와 태생적으로 차별되는 ‘흙수저’에 머무르게 된다. 더욱 심각한 건 이러한 유행어에 매몰된 결과 노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계급의식이 지워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계급을 계급이라 이르지 못하고 착취를 착취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더욱이 임금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된다.

유행어는 패배와 체념과 절망을 확산한다

노동자들에게 이런 유행어는 마약과 같다. 그것은 당장 일상의 억압으로 짓눌린 마음을 풀어주는 청량제처럼 느껴지지만, 자칫 습관적 언어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투쟁의지는 지워지고 만다. 요컨대 ‘기울어진 운동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굳이 이기려들지 말라”는 경고로, ‘금수저/흙수저’는 “억울하면 부모를 탓하라”는 핀잔으로, 그리고 ‘헬조선’은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더욱 ‘노오력’하라”는 충고로 들린다. 덕분에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보다는 패배와, 체념과, 절망에 파묻히게 된다. 유행어로 현실을 아무리 꼬집어본들 운동장은 더욱 기울어지고, ‘헬조선’에서 사는 고통은 가중되고, ‘금수저’의 특권은 늘어나고 고용관계에서 ‘갑질’도 교묘해질 뿐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두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맺은 고용관계는 본질적으로 잉여노동에 대한 착취를 전제로 하는 불평등한 관계이다. 그 불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한 자본가는 결코 고용관계를 맺지 않는 까닭이다. 다만 판매자가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자유로이, 실은 어쩔 수 없이, 계약에 임했다는 점 때문에 불평등이 은폐될 뿐이다. 한마디로 고용관계는 계급착취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고용관계가 지속되는 한 ‘갑질’은 사라지 않으며, 설령 ‘갑질’이 사라진다 해도 일상적 착취는 여전히 남는다. 노동자들이 ‘갑을관계’나 ‘갑질’ 프레임에서 벗어나 ‘계급관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착취’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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