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세력이 편집해놓은 3.1운동, 이제 다시 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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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3.1 만세시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학교 시험에 “3.1운동에 대하여 쓰라”는 식의 서술형 문제가 출제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초등학교 6학년 이상의 교과 과정을 제대로 이수한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안을 작성하기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수험생의 수준과 답안 분량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모범답안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식을 열었다. 국내에서는 고종황제 독살설이 퍼져 반일 기운이 고조되었다. 이에 민족지도자들이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고, 마침내 1919년 3월 1일에 민족대표들이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을 계기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연해주, 미국 등 해외에서도 만세시위가 열렸다.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여기에 유관순 열사가 만세시위운동의 아이콘으로 소개되고, 3.1운동이 비폭력 평화운동이었음을 언급하면 더욱 모범적인 답안에 가까워진다. 게다가 이러한 3.1운동의 정신이 중국의 5.4운동이나 인도, 베트남 등 아시아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쳤거나 자극을 주었다면서 세계사적 의의를 덧붙이면 금상첨화다.

사실 위에 제시한 모범답안은 초등학교 6학년 사회교과서의 3.1운동에 관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검인정 역사 교과서의 3.1운동 관련 내용도 대체로 이 뼈대를 유지하고 있다. 신문, 방송, 출판물 등 대중매체에서 3.1운동을 다루는 방식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오늘날 한국인의 3.1운동에 대한 기억 또한 여기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이 모범답안은 의심의 여지없이 3.1운동의 성격과 본질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

윌슨이 주창한 것으로 알려진 ‘민족자결주의’의 실체는?

아쉽게도 이 모범답안에는 오류와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먼저 제기되는 오류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사실 민족자결주의를 처음 주창한 사람은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다. 러시아혁명 과정이던 1917년 4월에 볼셰비키 전국협의회는 레닌의 제안에 따라 소수민족의 자치와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민족자결권’을 결의한 바 있다. 그리고 혁명 이후인 1917년 11월, 볼셰비키 정부는 다시 민족자결주의를 확인하며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차르 정부와 비밀리에 맺은 ‘전리품협정’을 폭로했다. 이때 볼셰비키 외무장관 트로츠키는 “협상국들이 명목상 벨기에와 세르비아 같은 작은 민족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지만 정작 자신들의 식민지나 유럽의 약소국들의 자결권을 전리품으로 나눌 계획을 공모했으며, 이런 점에서 이들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의 윌슨 정부는 1918년 1월에 상원에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그중 제5조에는 “주권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결정하는 경우, 해당 민족의 이익이 향후에 권한을 부여받게 될 정부의 정당한 요구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역사가들은 이를 전후 식민지 처리의 일반 원칙으로 평가한다. 우리 기억에 탑재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를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로 보는 건 무리한 해석이다. 오히려 ‘향후에 권한을 부여받게 될 정부’라는 표현에서 보이듯, 제5조는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를 염두에 둔 두루뭉술한 표현이었다. 당시 국제연맹에 의한 신제국주의 질서를 구상하던 윌슨은 민족자결이 아니라 ‘피치자(the governed)의 동의’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오히려 며칠 후에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가 영국 노동조합연맹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자결권’을 언급했다. 그러한 분위기에 밀려 윌슨은 그해 2월이 되어서야 ‘민족자결’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것처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 처리를 위한 것이었으며 완전 독립을 추구하던 조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를 흉내 낸 수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그간 민족자결주의가 마치 윌슨의 고유한 작품인 것처럼 기술해왔다. 물론 최근에 개편된 몇몇 검인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레닌의 민족해방 정책을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 2003년판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공화국의 레닌은 세계의 식민지, 반식민지의 민족해방을 지원할 것을 선언하였다”(170쪽)고 설명한다. 또 2010년판 대한교과서 『한국사』는 “레닌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선언하여, 억압받고 있는 민족의 자유로운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교과서마저도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라며 모순된 결론을 맺고 있다. 대중의 기억 또한 이처럼 편집된 기억에 여전히 갇혀 있다.

[코민테른 2차 대회 대중집회에서 등장한 태극기. 코민테른은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19년 결성된 국제공산주의 조직이다.]

2.8독립선언서의 오독(誤讀), 또는 편향된 해석

1919년 2월 8일에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이 작성하여 발표한 ‘2.8독립선언’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일반적 기억도 재고되어야 한다. 이 기억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나 사료가 없는 까닭이다. 다만 일부 교과서는 2.8독립선언서 내용의 일부를 참고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의미하는 내용보다 오히려 “아국(러시아)은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또한 선언서 뒷부분에서는 자신들의 목표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한인 유학생들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들어선 소비에트공화국을 ‘정의와 자유를 기초한 신국가’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독립된 조선에 새로 건설할 국가의 모델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윌슨의 ‘무늬만’ 민족자결주의보다는 레닌의 전면적 민족자결주의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으며, 조선 독립 요구의 논거로 삼기에도 적합했다. 따라서 2.8독립선언서에 언급된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윌슨이 제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는 소비에트공화국에서 내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자유주의 역사 교과서는 2.8독립선언서를 오독하거나 편향되게 해석하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3.1운동의 역사에서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의 영향을 축소하거나 제거하려는 반공주의적 의도로 풀이된다. 이는 해방 후 최초의 역사교과서가 친미반공세력을 대표하는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탄생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당시 미국에서 윌슨 정부를 대상으로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 청원운동을 벌인 장본인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붉은색을 빼고 편집된 역사가 오늘날까지 3.1운동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민중을 불신한 민족대표들

3.1운동에 관한 기억에서 우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언식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3.1운동 당시 이들의 행적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명색이 민족대표라는 타이틀을 단 이들이 거사에 임하여 보여준 기이한 행적 때문이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 역사 강사는 이들의 행적을 ‘룸살롱(태화관)에서 낮술을 먹고 소란을 피우다 일제 경찰에 자수했다’는 식으로 희화화한 적도 있다. 그만큼 자유주의 역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민족대표들의 거사 당일 행적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익히 알려진 바에 따라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민족대표 33인은 본래 탑골공원에서 3월 1일 오후 2시에 공개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거사 바로 전날 밤에 갑자기 선언식 장소를 요릿집 태화관으로 변경해버렸다. 이 사실을 몰랐던 학생들 수백 명은 거사 당일에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들을 기다렸다. 약속 시각이 되어도 민족대표들은 나타나지 않자 학생 대표 강기덕 등은 민족대표들의 소재를 수소문을 하여 태화관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일방적인 장소 변경에 항의하며 “민족대표 중 한두 명이라도 탑골공원에 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민족대표 측에서는 “군중이 밀집한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거행하게 되면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일제경찰이 어떤 간계를 사용할지 모르므로 우리는 여기서 당당하게 잡혀가기로 했다.”며 학생들의 청을 거절했다. 결국 선언식은 두 곳에서 열렸다. 먼저 오후 2시가 되자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도 생략한 채, 한용운의 간단한 인사말에 이은 만세삼창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쳤다. 그리고 일제 경찰을 불러 스스로 체포되었다. 한편 탑골공원에 모여 목을 빼고 민족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오후 2시 30분경에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물론 민족대표들이 걱정하던 ‘군중심리에 의한 폭력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일제 군경의 폭력적 진압이 있었다.

이처럼 3.1운동은 민족대표와 민중이 단절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양측은 최남선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 말고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독립 요구를 표출했다. 100년 전 3월 1일에는 두 개의 3.1운동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역사교과서는 이 두 개의 사건을 하나의 3.1운동으로 뭉뚱그려서 설명한다. 여기에 ‘비폭력 평화주의’를 3.1운동의 원칙으로 강조하게 되면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요릿집에서 몰래 독립선언식을 치른 민족대표들의 처신도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비폭력 운운하는 이들의 변명은 탑골공원에 모인 민중을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잠재적 폭도로 여긴 데서 비롯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민족대표들이 요릿집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은 민중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었다. 이는 3.1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민중을 불신하는 엘리트들이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우리 기억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3.1운동의 표상으로 기억되는 유관순

한편 우리는 3.1운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유관순을 떠올린다. 유관순은 3.1운동의 표상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해방 전까지 유관순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3.1운동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사료는 유관순의 사진과 인적사항, 죄목, 형량 등이 기재된 ‘감시대상인물카드’가 유일하다. 다만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1919년 9월 2일자 『신한민보』에 “한 이화여학생 체포-소녀의 양친은 원수에게 피살”이라는 기사 중에 ‘서울 이화학당 학생 000여사는 자기의 양친이 오랑캐 왜적에게 피살을 당하여 분기의 맘을 단단히 먹고 각처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 왜적의 손에 붙들려 감옥에 피수하였더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사에 언급된 ‘이화학당 학생’이 유관순으로 추정될 뿐이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경이다. 그해 미군정청은 1946년 2월 21일자 관보를 통해 그해 3월 1일을 경축일로 정한다는 방침을 공표하였다. 당시 문교부 편수사로 있던 국어학자 박창해와 소설가 전영택은 군정청의 이런 방침에 따라, 3.1운동 때 프랑스의 잔 다르크처럼 활동한 여성을 발굴하여 초등학교 교과서에 싣기로 한다. 때마침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유제한이 “집안에 3.1운동으로 옥살이한 이화학당 학생이 있다”고 제보를 해왔다. 유제한은 유관순의 조카였다. 이에 유관순 스토리가 교과서에 실렸다. 더불어 전영택은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써서 발표했다. 관련 영화도 제작되었다. 덕분에 유관순은 ‘밤에 몰래 나와 조국을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구국의 영웅 잔 다르크’ 이미지로 각색되었다. 잔 다르크는 1907년에 장지연이 저술한 ‘애국부인전’이나 1920년대에 나온 통속소설 ‘잔다르크의 사랑’ 등을 통해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린 박두진의 시 ‘3월 1일의 하늘’도 “저 오를레앙 잔 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이라는 표현을 써서 유관순에 대한 찬사를 이어간다. 이처럼 해방 후 교과서와 전기, 영화 등을 통해 유관순은 3.1운동의 표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그 이름이 대중의 기억을 지배하게 된다. 미군정기 관료들이 전파하고자 한 것은 유관순이라는 소녀의 굴하지 않은 용기와 불타는 애국심이었다. 박두진의 표현대로 유관순은 “민족애의 순수절정, 조국애의 꽃넋”으로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하지만 부모를 살해당한 분노를 목청껏 내뿜다가 옥에 갇혀 토막 난 시체로 돌아온 17세 소녀에게 씌워진 불타는 애국심이라니. 그것은 숭고함이 아니라 섬뜩함이다. 그 섬뜩함을 물량적으로 유포하며 호전적 애국주의 감성을 주입하는 교과서는 더 섬뜩하다. 수십 년간 그런 기억을 아이들에게 요구해온 체제는 끔찍하다. 부끄러운 일이다.

3.1운동은 다시 기억되어야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거나 준비되고 있다. 대통령부터 정부 여당, 각 지방자치단체는 물론이고 수많은 민간단체에 이르기까지 경쟁적으로 3.1운동 기념사업에 매진하는 봄이다. 유사 이래 엄청난 역사열풍이다. 그 와중에서 현직 총리, 여당 대표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의 입에서 ‘3.1운동’ 대신 ‘3.1혁명’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명칭을 바꾸기 전에 역대 수구세력과 자유주의 지배세력이 편집해놓은 3.1운동에 대한 기억부터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3.1운동은 다시 기억되어야 한다. ‘3.1운동에 대해 서술하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도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7년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민중이 직접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는 제국주의의 수탈과 착취에 신음하던 식민지 민중에게 복음이었다. 게다가 레닌이 이끈 소비에트공화국은 제국주의 질서에 반대하며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으로 천명했다. 이에 식민지 조선 민중에게는 일제 해방과 독립에 대한 희망이 싹텄다. 때마침 파리 강화회의의 전후처리 협상에 기대를 걸고 있던 민족주의 세력과 학생들이 고종 황제 장례 직전인 3월 1일에 독립선언식을 열기로 했다. 민족대표들은 간단한 독립선언만 하고 스스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서울 탑골공원과 평양 등 몇몇 지역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항일독립만세시위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타올랐다. 파업한 노동자, 철시한 상인, 장터에 모인 농민들의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체 인구의 1할에 해당하는 200만여 명이 참여한 3.1운동은 조선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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