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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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한 여성을 형사처벌하는 형법 269조 1항과 의사를 처벌하는 270조 1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였다(2017헌바127). 이 결정은 2017년 2월에 부녀의 촉탁을 받아 낙태 시술을 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던 산부인과 의사가 형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데 대한 것이었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아침부터 기자회견을 이어가며 긴장감 속에서 선고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했다. 저녁에 안국역 앞에서 열린 환영 집회에는 500여명이 넘는 이들이 모여 승리를 축하했다.

단순위헌 결정이 아닌 헌법불합치 결정이고 2020년 12월 31일까지 국회가 결정 취지에 맞게 개정할 때까지 잠정 적용된다고 한 데 대해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거나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다소 비겁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단순위헌 결정과 헌법불합치 결정은 둘 다 심판대상인 법률조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하는 결정이라는 점에서는 똑같고, 그 법적 효과만 조금 다르다. 형벌법규에 대해 단순위헌 결정을 하면 그 결정이 내려진 순간 그 법규는 처음부터(혹은 과거에 합헌결정을 한 바 있다면, 그 다음날부터) 없었던 것이 되는 데 반해, 잠정 적용을 전제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 그렇지는 않다. 현행 낙태죄 조항은 형식적으로는 효력을 유지하고 다만 국회가 2020년 12월 31일까지 이를 결정 취지에 맞게 개정하지 않으면 2021년 1월 1일 자동으로 없어진다. 즉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위헌적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시키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법적 안정성 등을 핑계로 대며 다소 비겁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검찰이 굳이 헌법재판소가 위헌적이라고 판단한 형벌법규를 적용하여 기소하려 할 가능성은 낮고, 무엇보다 현재 대법원은 형벌법규에 대해서 잠정 적용을 명한 헌법불합치 결정도 일반적인 위헌결정과 똑같이 처리하는 입장이기에 이제부터는 설사 낙태죄로 기소된다 해도 무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낙태죄는 어제의 결정을 통해 폐지되었고, 2019년이 낙태죄 폐지의 원년이 되었다. 낙태죄 폐지를 염원한 여성들이 승리했다.

이미 대세였던 낙태죄 폐지 목소리

사실 낙태죄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은 이미 예상되고 있었다. 선고 하루 전날인 4월 10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19세 이상 남녀 5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이 58.3%,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은 30.4%로, 2017년 11월 같은 주제로 설문조사했을 당시에 비교해서도 폐지 응답이 6.4%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었다.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연령대에서, 모든 지역에서, 심지어 지지 정당에 상관없이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보다 높았다. 남성도 37.5%만 유지, 52.2%가 폐지 입장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60대 이상 연령대에서 폐지가 41.9%, 유지가 41.0%로 팽팽하게 맞섰다. 대구∙경북, 자유한국당 지지층 등에서도 폐지여론이 우세할 정도였다. 여론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헌법재판관들도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보수적일지라도 이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목소리가 이렇게 급속하게 대세로 된 것은 일차적으로 2016년 하반기보건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 시술 의사 처벌 강화 입법예고안 고시였다. 이를 계기로 낙태죄 폐지 요구를 전면에 내건 광범위한 대중운동이 일어났다. 2017년 청와대 국민청원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에 무려 23만 5372명이 서명을 함에 따라 청와대는 11월 26일 미온적인 답변이나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2018년 5월 24일에는 낙태죄 헌법소원심판청구의 공개변론이 열렸는데, 이때부터 낙태죄 유지측은 수세적이고 방어적이었다. 예컨대 법무부가 ‘임신을 중단하려는 여성은 성관계를 해 놓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담은 합헌 의견서를 제출하였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고 결국 철회한 것, 법무부가 참고인으로 부른 전문가조차도 출산이냐 낙태냐는 국가가 강요할 수 없다는 ‘소신’을 피력한 것은 낙태죄 폐지로 향하는 시대적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같은 해 7월 7일에는 1,500명이 광화문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에 참여했고, 올해 3월 30일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에도 그만큼의 참여 인원수가 유지되었다.

그러면서 낙태죄가 왜 문제인지, 왜 폐지되어야 하는지도 점차 널리 알려졌다. 과거에는 낙태죄에 대한 토론이 임부의 자기결정권 대 태아의 생명권을 저울질하는 식의 구도에 머물렀지만, 여성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이 구도 자체가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충돌하는 것으로 보는 논리는 임신한 여성이 자신뿐 아니라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여 임신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실제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 △낙태죄가 임신의 원인을 제공한 남성은 내버려 두고 여성과 의사만을 처벌하기에 남성 파트너가 임신한 여성을 협박하고 괴롭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 △인공임신중절을 하는 여성들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낙태죄는 인공임신중절을 줄이지 못하며 여성을 더 위험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은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도 헌법불합치 결정의 근거로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를 부정하며 낙태죄가 합헌임을 주장한 재판관은 아홉 명 중 두 명밖에 없었다. 심지어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세력조차 ‘진화’하여, 인공임신중절이 여성에게도 좋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전술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과거처럼 ‘태아의 생명권’만 되풀이하며 여성이 겪는 현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논리는 이제 전혀 먹히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최근 몇 년간 여성들의 끈기 있는 투쟁을 통해 낙태죄로 인해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이 낱낱이 폭로되어 왔고, 그에 따라 낙태죄 폐지가 이미 대세로 굳어져 왔기에, 4월 11일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 사회주의자]

여성해방의 전진, 이제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

이번 낙태죄 폐지 결정을 이끌어낸 것은 일차적으로는 2016년부터 이루어졌던 낙태죄 폐지를 전면에 내건 투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2015년부터 확대·강화되어 온 우리나라의 여성해방운동 전반의 성과라고 보아야 한다. 지난해 이루어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0대 여성 중 70%가 넘는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며, 40%가 넘는 비율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여긴다. 더 이상 여성억압을 참지 않는 청년 여성들의 이런 기세는 지난해 혜화역 시위 등 여러 의제에서 가시적인 힘으로 나타났고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해방운동의 확대·강화 흐름 속에서 낙태죄 폐지 투쟁도 힘 있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4월 11일 헌법불합치 결정은 최근 몇 년간 여성해방운동의 확대·강화가 거둔 승리이다.

이 승리를 더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여성들은 임신출산자결권 행사에 대한 처벌뿐만 아니라 ‘허락’ 역시 거부하고 있기에, 국회에서 개정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인공임신중절에 있어서 임신 기간이나 사유에 제한을 두는 불완전한 비범죄화가 아니라 완전한 비범죄화를 요구하며 투쟁해야 한다. 또한 여성 노동자, 빈민 여성도 임신 중지를 선택할 경우 안전한 인공임신중절에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의료서비스 비용을 무상화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임신출산자결권을 위한 운동뿐 아니라 여성해방운동이 앞으로도 계속 고양되고 확대될 것이다. 이 점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 더 과감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급진적인 전망을 제출할 공간이 열릴 것임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세력은 이러한 인식 속에서 여성의 권리 확대를 위한 운동에 적극 함께하며, 온전한 여성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전망을 능동적으로 제출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여성들은 “역사는 진보한다, 새로운 세계 지금 당장!”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제 정말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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