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은 진보정당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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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시스]

한국 진보정치 역사에서 분열과 퇴행의 산물인 정의당은 출범 때부터 진보정당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 8년 동안 정의당은 상황에 따라 때로는 진보를 부정하고 때로는 진보를 참칭하면서 진보정치에 먹칠을 해왔다.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본지는 2016년 12월 24일자 온라인 판에 「정의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다. 당시 이 기사는 상당한 독자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 후 3년이 넘도록 정의당은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2중대 노릇으로 일관하면서도 여전히 진보정당으로 행세하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이어왔다.

그런데 올해 4.15총선 참패 이후 정의당 안팎에서는 ‘진보정체성’을 운운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간 자신들이 진보정당 노릇을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목소리가 진보정치 일반에 대한 고민의 결과인지는 미지수다. 그보다는 원내 압도적 제1당이 된 민주당과의 관계 재정립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온 당리당략의 한 방편일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진보정당이 아니었다는 취지의 발언이 정의당에서 나오는 것은, 앞서 언급한 ‘정의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라는 본지 기사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정의당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사정이 이러함에도 정의당이 그간 뒤집어쓰고 있던 ‘진보정당’ 외피를 완전히 벗어버릴 것 같지는 않다. 정의당 안에서 때 아닌 ‘혁신’ 바람이 불고 있는 까닭이다.

진보 정체성과 거리가 먼 정의당 혁신안

정의당 혁신의 지향점은 ‘진보 정체성 확립’이라 한다. 총선 직후 위기에 빠진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당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리더십으로의 교체를 위한 독립적 집행권한을 갖는 혁신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대표직 조기 퇴진 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5월 24일에 당 혁신위원회가 발족되어 혁신안을 마련하였고, 8월 30일자로 최종 혁신안이 의결되었다. 더불어 9월 27일에는 제6기 전국동시당직선거를 통해 당 혁신을 주도할 새 집행부를 뽑을 예정이다. 지금 선거전이 한창인 가운데 정의당에서는 혁신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사뭇 비장하다. 분위기만 보면 정의당이 ‘사이비 진보’의 탈을 벗고 마침내 진보의 정체성을 확립한 진보정당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기대마저 들게 한다.

정의당은 과연 ‘살갗을 벗겨내는’ 혁신을 통해 명실상부한 진보정당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우선 혁신위원회에서 마련한 당 혁신안 내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의당 혁신위원회는 18명 중 과반수가 당내 좌파 의견그룹에 속하거나 그 입장에 동의하는 청년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정의당이 진보정당 이미지를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그 점에서 혁신위원회는 정의당의 정체성을 좌측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그러나 혁신위원회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혁신안의 핵심으로 내세운 집단지도체제 도입 등 몇 가지 안건에 대하여 극명하게 의견이 맞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정의당 당직자 사이에서 ‘내용도 과정도 혁신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강령개정, 당원 직접 민주주의 확대, 당대표 권한 분산, 청년 정의당 창당 추진, 부채 탕감방안 등을 골자로 하는 혁신안이 나왔다. 특히 당 강령과 관련하여 혁신안은 ‘인간의 보편적 존엄을 위해 노동과 생태, 젠더를 비롯한 다양성을 동등하게 존중하자’는 내용을 담자고 제안했다. 심지어 장혜영 혁신위원장은 당내 간담회에서 “노동, 생태, 젠더 이슈 등에서 다양한 감수성을 갖는 것이 2020년 진보”라는 난해한 말을 했다고 한다. 진보정치에 대한 약간의 이해만 있는 사람이라면 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의 인식 수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혁신안의 강령 개정 요구는 현행 정의당의 핵심강령인 ‘정의로운 복지국가’가 민주당의 ‘포용적 복지국가’와 흡사하여 차별화가 안 된다는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쨌든 당내 좌파 위주로 구성되었다는 혁신위원회가 제시한 정의당의 정체성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대중정당’이다.

그런데 정치에서 다양성 존중이라는 슬로건은 주로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표현이다. 요컨대 지금 자본가들의 친구가 된 문재인의 대선 공약집이야말로 기업가도 대변하고 노동자도 대변하고 농민도 대변하고 자영업자도 대변하는, 다양성 존중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다양성 존중을 강령으로 삼으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의제를 나열하여 당의 외연을 넓히려는 욕망의 표현이지, 스스로 진보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아니다. 자본주의 공황과 변종 바이러스 창궐, 기후 위기 등으로 불평등이 극에 달한 이 모순의 시대에 그것을 진보의 정체성으로 여길 대중이 몇이나 될지도 궁금하다. 이처럼 진보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혁신안은 결국 낡은 정의당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서인 셈이다.

진보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당대표 후보들

시작은 창대했지만, 혁신안의 끝은 소박하고 소극적이었다. 덕분에 당내에서도 ‘혁신 없는 혁신위’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혁신안은 종이에 그린 지도일 뿐이다. 따라서 정의당 안팎의 관심은 지금 당직선거를 통해 새롭게 구성될 제6기 지도부에 쏠려 있다. 그 점에서 당직선거에 출마한 당 대표 후보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이후 정의당의 실질적인 변화 방향을 예측하는 가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는 출마한 후보는 김종민(정의당 부대표), 김종철(정의당 선임대변인), 배진교(현직 의원), 박창진(갑질근절특별위원장) 등 4명이다. 이들은 몇 차례의 후보토론을 통해 당 비전에 대한 입장과 공약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정의당 혁신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차기를 노리는 당대표 후보들에게서도 가히 진보 정체성을 확립할 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대체로 당 위기 상황에는 공감하지만 그에 대한 해법은 4인4색이다.

그 중 대한항공 ‘땅콩 회항’ 피해자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박창진 후보는 당대표 후보 자격으로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뒤, 의사들의 집단 진료 거부 사건에 대해 “저는 한 번도 파업이나 회사점거 같은 걸 통해 제 의지를 관철했던 것이 아니다”며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또 박원순 성추행 사태와 관련하여 “박시장을 애도하면서 해당 사건을 성찰할 수 있었다”면서 집권여당과의 유대감을 드러냈다. 한편 당 혁신과 관련하여 박창진 후보는 이념적 독선과 비밀주의 정파가 문제라면서 당원, 국민과 소통하는 지도부가 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여러 모로 현실 인식에서 상식적 한계를 드러내는 후보가 노동계의 유명 인사인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의 공개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도 눈길이 간다.

박창진을 제외한 세 명의 후보들은 다들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진보정당의 색채를 뚜렷하게 하는 것을 혁신의 과제로 내놓고 있다. 이 가운데 김종민 후보는 ‘당신의 진보정당, 정의당 독립선언!’을 선거 구호로 내걸고서 “민주당 2중대의 길에서 벗어나 국민에게 진보정당을 돌려주는 독립선언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방편으로는 “재벌 세습을 막는 순환출자제한법 같은 차별화된 진보정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계열사 자산 총액이 10조 원 이상인 기업집단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되어 상호출자 금지, 순환출자 금지, 채무보증 금지,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의 규제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이름만 살짝 바꾼 순환출자제한법을 ‘차별화된 진보정책’으로 포장하는 데에 이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김종철 후보는 노동중심 대중정당, 사회운동 대중정당을 당 비전으로 제시하며 당의 운동성을 강화하자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운동성’보다는 ‘대중정당’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김종철 후보는 증세를 통한 재분배, 공공주택 확충, 기후 위기 대비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이미 보수여당 안팎에서 논의된 의제들이어서 새로울 게 없다. 특히 김종철 후보가 야심차게 주장하는 ‘기본자산제도’는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대출 등 ‘기본 시리즈’ 정책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재명 식 포퓰리즘의 모방으로 보인다. 김종철 후보는 당직선거 유세에서 “보수화된 민주당과의 싸움이 아닌,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이재명을 따라 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기본소득이든 기본자산이든, 현금 살포를 통한 구제방식은 만악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책이다. 그것을 따라 하는 게 결코 진보 정체성 확립의 길은 아닐 것이다.

한편 당대표 후보 가운데 유일한 현역 의원으로, 인천남동구청장을 지낸 바 있는 배진교 후보는 ‘행동하는 정당, 이기는 정의당’을 구호 아래 “가치 중심 재창당을 통한 더 큰 정의당으로 2022년 대선을 치르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배진교 후보가 제시하는 비전은 ‘통합의 리더십’과 ‘가치 중심의 대중정당’으로 요약된다. 여기에서 가치는 불평등 해소, 기후위기 극복, 젠더 평등 등이라고 한다. 청년 중심의 혁신위원회가 강령 개정 방향으로 내놓은 내용과 흡사하다. 당대표 후보로서 청년 세력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속내가 보인다. 실제로 배진교 후보는 9월 19일 MBN 토론회에서 “장혜영, 류호정 의원과 같은 진보정치 3세대를 성장시켜 새로운 리더십과 지속가능한 정당을 만들겠다”고 강조하며 당내 청년 세력을 대상으로 구애를 펼친 바 있다. 이는 배진교 후보의 입장이 당의 진보 정체성 확립보다는 당직선거 전술에 맞추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정의당에는 진보정치에 대한 정의(定義)가 없다

혁신을 공언한 정의당 안팎에서 진보 정체성을 외치는 목소리는 요란하지만, 혁신안에서도 차기 지도부 후보들의 비전에서도 진보 정체성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당내 당 창당을 앞둔 청년정의당에 진보정치의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청년 정의당 창당은 당내 권력 분산에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젊다는 것만으로 진보의 정체성을 갖는 건 아니다. 정의당이 청년을 앞세운다고 해서 저절로 진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급의식이 수반되지 않는 청년 정치 실험은 낡은 세대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청년 세대에 전가하는 일이다.

물론 정의당 청년 세력 일부에서는 좀 더 진전된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는 하다. 예컨대 김창인 청년정의당 창당준비위원장 후보의 경우 “청년정의당은 반자본주의·페미니즘·생태주의 정당이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며 반자본주의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에 대한 폭로라기보다는 근래 청년들 사이에서 꾸준히 번지고 있는 반자본주의 정서를 의식한 결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와 함께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을 깊이 있게 모색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를 어떻게 진보적 의제로 정제할 것인지도 막연하다. 그나마 이 정도의 비전도 정의당의 혁신 로드맵에 적극적으로 반영될 것 같지도 않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당이 이른바 진보 정체성 확립을 혁신의 과제로 내세운 건 자가당착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정의당에 급한 일은 진보의 기준부터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흔히 “정의당에는 정의(正義)가 없다”는 우스갯소리로 정의당을 꼬집곤 하지만 정작 정의당에 결여된 건 진보의 기준이며, 진보정치에 대한 올바른 정의(定義)이다. 정의당에는 진보에 대한 정의가 없다. 그럼에도 정의당이 진보정당 이미지를 유지하는 건 지금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우측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까닭이다. 극우세력이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치의 본질은 계급적 역학관계에 있다. 그 역학관계에서 억압당하는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모순된 체제를 변혁해 가는 게 진보정치, 진보정당의 역할이다. 또한 억압당하는 계급의 입장에서 노동, 생태, 젠더 등의 이슈에 접근하고 대응하는 게 진보정치의 방법론이다. 무릇 진보정당은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가령 민주당이 코로나19 국면을 부각할 때, 진보정당은 세계대공황 위기를 직시해야 하고, 자유주의 세력이 분배의 정의를 말할 때 진보정당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모순을 폭로해야 한다. 자유주의 세력이 기본소득을 말할 때 진보정당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모순을 말해야 한다. 자유주의 거대 집권당의 빈틈을 메워주는 게 진보정당은 아니다. 그 점에서 정의당은 이전에도 진보정당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진보정당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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