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적 요구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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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작년 12월말 사회주의 대오 추진위원회에서는 과도적 요구를 마련하여 공개하고 2월 6일에는 공공운수노조 5층 교육장에서 ‘현시기의 과도적 요구’ 토론회를 개최했다. 또한 『사회주의자』에서는 그 동안 과도적 요구를 제기하고 투쟁하자는 취지의 기사들을 게재해왔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심해져 가고 있고, 작년 대공황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 민중의 삶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볼 때 노동자 민중의 절박한 요구에서 출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체제 극복으로 나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된 과도적 요구는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과도적 요구’를 이야기하자 이 용어를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과도적 요구는 갑자기 최근 새롭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오랜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중요한 성과물 중 하나다. 이 글에서는 ‘과도적 요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등장하여 발전해왔는지 살펴봄으로써 독자들이 과도적 요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1. 과도적 요구는 무엇인가?

과도적 요구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절실한 객관적 상황과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낮은 주체적 조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자신의 절박한 요구에서 출발하여 점차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는 길로 나아가도록 해주는 요구로 설명된다. 과도적 요구는, 단순히 제기된 요구만을 쟁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요구를 제기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투쟁의 요구가 상승하고 노동자가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자각하고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과도적 요구는 노동자의 의식과 투쟁 의지를 고양시키는 요구로, ‘가교’, 혹은 ‘디딤돌’이라는 비유로 설명된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 대오 추진위원회의 ‘과도적 요구’ 중 성두현 추진위원장이 작성한 “과도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투쟁하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이 내거는 요구에는 일상적인 개량적 요구와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궁극적 요구가 있다. 요구가 자본주의의 틀 자체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냐 넘어서는 것이냐 라는 기준에 의해 전자는 보통 최소강령적 요구로 불리고 후자는 최대강령적 요구로 불린다. 가령 노동력의 판매가격인 임금의 인상요구가 자본주의체제의 골간을 형성하는 임노동제의 철폐 요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최소강령적 요구라면 임노동제의 철폐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 요구는 최대강령적 요구에 해당한다. 과도적 요구는 이러한 기준틀에 의하면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과도적 요구는 그 자체로는 최대강령적 요구는 아니지만 용어 자체가 함축하듯이 최대강령적 요구로 발전해가는 전망을 갖는 요구이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요구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이러한 요구로 발전해가려는 전망 속에서 제출되는 요구이다. 예를 들면 은행과 기간산업의 국유화 요구는 그 자체로는 최대강령적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투쟁의 발전 속에서 주체의 노력에 의해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요구로 발전해갈 수 있는 요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은행과 기간산업의 국유화 요구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같은 최대강령적 요구로 접근발전해갈 수 있는 ‘과도적인’ 요구이다.

이러한 ‘과도적 요구’는 코민테른(1919년 창립) 초창기에 정립된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원류를 따라가면 맑스와 엥겔스, 레닌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 과도적 요구

비록 맑스와 엥겔스는 ‘과도적 요구’를 명시적으로 정식화하지 않았지만, 『공산당 선언』 2장에 나오는 10가지 방책은 사실상 과도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 10가지 방책은 다음과 같다.

  1. 토지 소유를 몰수하고, 모든 지대를 국가 경비에 충당하는 것.
  2. 고율의 누진세.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4. 모든 망명자들과 반역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
  5. 국가 자본과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 은행을 통해 국가의 손안에 신용을 집중시키는 것.
  6. 운송 수단을 국가의 손안에 집중시키는 것.
  7. 국영 공장의 수와 생산 도구를 늘리고, 공동 계획에 따라 토지를 개간하고 개량하는 것.
  8. 모두에게 똑같은 노동 의무를 부과하고 산업 군대, 특히 농업을 위한 군대를 키워 내는 것.
  9. 농업과 공업의 운영을 결합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차이를 차츰 뿌리 뽑도록 하는 것.
  10. 모든 아동에 대한 사회적 무상 교육, 오늘날과 같은 아동들의 공장 노동을 폐지하고 교육과 물질적 생산을 결합하는 것 등등.

맑스와 엥겔스는 이 같은 10가지 방책이 기술된 바로 위쪽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방책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에 대한 전제적 침해를 통해서만, 따라서 경제적으로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운동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며 생산양식 전체의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방책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인용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과도적 요구의 문제의식과 매우 닮아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경제적으로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운동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며 생산양식 전체의 변혁을 위한 수단”이라는 대목이 우리가 과도적 요구와 관련하여 주목할 지점인 것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 나온 10가지 방책을 “과도적’ 조치들”이라고 직접 말했다는 점이다. 맑스는 1881년 6월 20일자 프리드리히 아돌프 조르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보와 빈곤』을 저술한 헨리 조지를 비판하면서 『공산당 선언』의 10가지 방책을 “과도적 조치들”로 설명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헨리 조지는 “지대를 국가에 납부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보며 지대를 세금으로 국가에 내는 것을 만병통치약으로 제시했다. 그는 지대를 국가에 납부하는 요구를 “『공산당 선언』에 포함된 과도적 조치들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요구와 헨리 조지의 요구 사이의 차이로 자신들은 국가에 의한 지대의 전유를 “다른 다수의 과도적 조치들 가운데 하나로 채택”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맑스는 뒤이어 이 조치들이 “우리가 『공산당 선언』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그 자체로 모순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맑스가 “모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공산당 선언』에서 10가지 방책이 한편에서는 “경제적으로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운동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며 생산양식 전체의 변혁”으로 이어진다는 두 모순적 측면의 통일로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도적 요구는 맑스와 엥겔스로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레닌,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과 과도적 요구

레닌의 경우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비록 ‘과도적 요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과도적 요구에 해당하는 요구들을 제기하였다.

대표적으로 ‘토지 국유화’ 요구를 들 수 있다. 토지 국유화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중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와도 양립할 수 있는 요구라 할 수 있다. 실제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농민은 토지 국유화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때 이 요구는 러시아의 봉건적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고 자본주의적 농업 발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요구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1917년 혁명 이전에 제기된 토지 국유화 요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요구였다. 그러나 토지 국유화 요구는 비록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중 일부를 공격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적 소유 전반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과도적 요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던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으로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가 일정 정도 완수되자 혁명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토지 국유화 요구에서 생산수단 전반에 공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전국협의회에서 레닌은 「농업문제 결의」와 관련된 보고를 하며 “러시아에서 국유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관련되는 한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이유에서 필수적이다—그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강력한 일격을 날린다.”고 주장했다.

또한 레닌이 1917년 9월 중순에 작성하여 10월 말에 출간한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요구들 역시 사실상 과도적 요구의 성격을 지녔다. 이 소책자가 작성될 당시 노동자, 병사는 8월말 코르닐로프에 의한 반혁명 시도를 분쇄하고 무장봉기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아직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레닌이 소책자를 쓰고 있던 바로 그때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주도한 ‘민주주의 협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협의회는 혁명의 상승을 막고 혁명이 부르주아 의회제 수준에 머물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개최된 것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서 기근이 다가오고 있고 민중의 삶이 파탄나고 있으며, 이 같은 파국을 막을 조치들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고 쉽게 실행될 수 있는데도, 2월 혁명 후 들어선 임시정부와 그들을 지지하여 나중에는 입각까지 한 사회혁명당, 멘세비키 등이 이 파국을 막기 위한 조치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혁명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파국을 막기 위한 조치로 ① 모든 은행의 단일한 은행으로의 합병과 그 업무에 대한 국가의 통제, 혹은 은행의 국유화, ② 신디케이트들, 즉 자본가의 가장 거대한 독점적 결합체들(설탕, 석유, 철강 등의 신디케이트들)의 국유화, ③ 영업 비밀의 폐지, ④ 기업가, 상인, 고용주 일반에 대한 강제적 신디케이트화(즉 조합으로의 강제적 통합), ⑤ 주민의 소비자조합으로의 강제적 조직화, 혹은 그러한 조직화의 장려, 그리고 그에 대한 통제의 실시를 제시했다. 레닌은 노동의무제를 예로 들며 소책자에서 제시한 조치들이 “사회주의는 아직 아니겠지만 더 이상 자본주의도 아닐 것”이고 “사회주의를 향한 거대한 한 걸음일 것”이라고 말한다.

토지 국유화 요구와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서 제시된 요구는 레닌의 『1905∼1907년 제1차 러시아 혁명기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 후기에서 재차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으로 비유된다. 작성일이 1917년 9월 28일자로 된 후기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활은 이미 이 틀[즉 자본주의: 인용자]을 뛰어넘어 전 국가적 규모의 생산과 분배의 조정, 전반적 노동의무, 강제적 신디케이트화(기업연합으로 합병) 등을 일정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농업강령의 토지 국유화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토지 국유화는 단지 부르주아 혁명의 ‘최종발언’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이기도 하다”(강조는 저자의 것임).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이라는 레닌의 주장은 과도적 요구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4. 코민테른, 과도적 요구를 공식화하다

맑스, 엥겔스, 레닌 등을 통해 발전해온 과도적 요구는 코민테른에 와서 공식화된다. 특히 레닌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① 레닌의 『공산주의에서 좌익 소아병』: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의 과도 형태 또는 접근 형태” 모색을 주장하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줄인 말인 코민테른은 1919년에 창립되었다. 코민테른의 제1차 세계대회는 창립 대회이기 때문에 조직 창립을 위한 기본적 논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제2차 세계대회에는 조직적 토대를 놓기 위한 논의가 주로 이루어진다. 제2인터내셔널이 사회국수주의로 변질되어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각국 정부를 지지한 결과 붕괴하였기 때문에, 코민테른은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를 “공산주의”로 칭하면서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철저한 분리를 이루고 각 나라에서 독자적인 공산당 창립을 위해 노력했다. 제3차 세계대회와 제4차 세계대회에서는 이렇게 건설된 국제조직을 기반으로 국제 사회주의노동운동이 취해야할 전술과 정책을 구체화했다. 이 과정에서 통일전선 전술이 채택되었고, 이와 연동하여 과도적 요구가 코민테른의 강령적 요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코민테른에서 통일전선 전술과 과도적 요구가 공식화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의 내부 논쟁과 투쟁이 있었다.

우선 1920년 제2차 세계대회 무렵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와 그 후 전개된 유럽에서의 혁명적 분위기 고조에 힘입어 사회주의 혁명을 조급하게 추진하려는 좌경적 경향이 나타났다. 레닌은 사민주의 세력이라는 우익 기회주의에 비해 이들 좌경적 경향의 폐해는 그다지 크지 않고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러한 좌경적 경향이 극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회를 앞두고 『공산주의에서 좌익 소아병』이라는 소책자를 저술했다. 그는 마지막 장 “몇 가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자계급 전위를 쟁취하고, 그들이 의회주의에 반대해 소비에트 권력 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반대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편에 서는 주된 일—물론 전혀 모든 일이 아니라 주된 일—은 달성되었다. 이제 모든 노력, 모든 주의가 다음 단계—덜 근본적으로 보이고 어떤 입장에서는 실제로 그렇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사실상 실천적 과제 수행에 훨씬 더 밀접해있는 단계—에,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의 과도 형태 또는 접근 형태를 모색하는 것에 집중되어야 한다.(강조는 저자의 것).

바로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과도 형태 또는 접근 형태”가 과도적 요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② 국제 정세의 변화: 통일전선 전술과 과도적 요구가 제기되다.

1920년 7-8월에 제2차 세계대회가 열린 후 국제적인 혁명의 분위기는 잠시 줄어들게 된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혁명성을 보이고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3년이 되어가면서 초기의 분위기에서는 다소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를 제외한 나라들에서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였고 전후 잠시 반짝했던 호황이 종료되면서 경제사정도 악화되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반격에 나서기 시작해 노동시간 연장, 임금 삭감 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하나로 단결해 자본가에 맞서 싸우고 자신의 경제적 처지를 방어하길 바랐다.

특히 독일이 그 중심지였다. 1920년 말부터 독일 노동자들은 조직적, 정치적 입장 차이를 떠나 노동자들의 절박한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함께 싸우길 요구했고, 1920년 12월에는 슈투트가르트의 금속노동자들이 모든 노동자 조직에 대해 공동행동을 제안했다. 그 무렵 공산당과 독립사민당 다수파가 통합하여 만들어진 독일 통일공산당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1921년 1월 8일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노동자들의 절박한 당면 요구들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조직들이 공동행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이후 코민테른이 채택한 통일전선 정책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통일공산당의 공개서한은 당시 당대표였던 파울 레비와 코민테른의 칼 라데크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개서한 발표 직후 파울 레비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에 대한 의견 차이로 코민테른과 갈등을 빚다가 당 지도부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변화한 정세를 인식 못하고 혁명적 공세를 주창하던 세력이 당의 지도부를 장악한 한편 새로운 지도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 소비에트 혁명의 지도자 벨라 쿤을 필두로 한 코민테른 대표단이 오게 되면서 독일통일공산당은 “3월행동”이라는 모험적 투쟁을 하다가 심각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심각한 패배가 있은 후 레닌은 「공개서한, 리보르노, 독일 통일공산당 지도부에 관해 제트킨과 레비에게 보내는 편지」(1921년 4월 16일)에서 독일 통일공산당의 공개서한이 완전히 올바른 정책이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대표단은 너무 좌파적인 어리석은 정책을 옹호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코민테른 제3차 세계대회가 있기 직전 「대회 임무에 관해 지노비에프에게 보내는 글」(1921년 6월 10일)에서 “공개서한의 전술은 명확히 모든 곳에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1921년 6월 22일에 열린 제3차 세계대회에서는 3월행동의 잘못을 인정하고 통일전선과 과도적 요구로 나아가는 결정을 한다. 우선 트로츠키와 바르가가 초안을 잡은 「세계 상황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임무와 관한 테제」는 정세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세웠다. 이 테제의 정세 분석은 다음과 같았다.

전후 혁명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 초보적 권력, 그 방법과 목표에 대한 정의 부재, 그것이 지배계급에게 불러일으킨 예외적 공포로 나타났다. 이 시기는 본질적으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의심의 여지없이 부르주아지는 계급으로서의 자기 확신을 회복했고, 그들의 국가구조는 확고한 외양을 다시 확립했다. 공산주의에 대해 전전긍긍하며 자행하던 테러는 사라지진 않았지만 확실히 줄어들었다.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은 심지어 국가기구들의 힘을 자랑하고 있고 모든 곳에서 노동대중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공세에 착수하였다.

권력을 위한 공공연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많은 나라들에서 둔화되어 왔음은 명백하다.

현재 위기에서 공산당의 기본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 방어적 투쟁들을 지도, 확대, 심화, 통일함으로써 상황 발전에 맞추어 그 투쟁들을 권력을 위한 결정적 정치투쟁으로 전환되게 하는 것이다.

칼 라데크가 초안을 작성한 「전략과 전술에 관한 테제」는 위와 같은 정세에서 공산당의 임무는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노동자계급의 다수에 대한 결정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그 중 결정적 부위들을 투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객관적으로 혁명적이고 어떠한 계기로든—대중파업, 식민지 봉기, 새로운 전쟁, 심지어 중요한 의회 위기가 되었든—첨예한 혁명적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 다수는 아직 공산주의의 영향력 하에 있지 않다.

아직까지 통일전선이나 과도적 요구라는 말이 체계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이 무렵에는 ‘당면 요구’, ‘부분적 요구’ 등이 과도적 요구와 비슷한 의미의 말로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이 테제의 5절 “부분적 투쟁과 부분적 요구”에서는 사실상 과도적 요구를 표현하는 다음 내용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침식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에서 상이한 단계들을 점하는 요구들의 체계

그런데 이 테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는 “과도적 요구”라는 말이 간간이 쓰이고 있었다. 이 테제에 대해 보고한 칼 라데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경험의: 인용자] 교환이 일어날 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 및 과도적 요구들의 체계를 만들어내게 할 것이다. 그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들이 자본주의를 개조하는 것이 아닌 반자본주의 투쟁을 고조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국수주의자들의 최소강령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독재가 승리의 그 날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특정한 강령이 아니다. 그것은 이 독재를 위한 투쟁으로 광범위한 대중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요구로 구성된다.

③ 통일전선 정책과 과도적 요구가 코민테른의 공식 입장이 되다.

이렇게 제3차 세계대회에서 통일전선 전술과 과도적 요구에 대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코민테른 내에서는 이것이 공식 입장으로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통일전선 전술은 그동안 기회주의로 비판해온 사민주의 정당들과의 제휴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민주의자와 결별하여 갓 창립된 공산당들은 이런 정책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는 변화한 정세에 맞게 통일전선 전술을 추진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대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1년 12월 18일 「노동자 통일전선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여 통일전선 전술을 확고히 했다. 또한 이 테제는 과도적 요구와 관련해서도 “오늘날 노동자 운동에 영향을 주는 일반적 조건들을 볼 때, 모든 진지한 대중행동은, 그것이 단지 당면 요구들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혁명의 보다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의제에 올린다.”고 밝혔다. 코민테른은 이 테제에 뒤이어 1922년 1월 1일 모든 노동자들에게 단결과 통일전선 수립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발표한다.

레닌은 이 테제가 채택되는 과정을 강력히 추동했다. 레닌이 작성한 「통일전선 전술에 관한 러시아 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 초안」(1921년 12월 1일)에는 제2인터내셔널 노동자들과의 공동행동을 승인하고 지노비에프, 라데크, 부하린에게 이 노선에 입각한 결의문 초안 작성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통일전선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레닌은 테제가 작성되는 과정에서 문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후 코민테른은 1922년 2월과 6월에 두 차례의 집행위원회 확대전체회의를 개최하여 통일전선 전술을 안착시켜갔고, 1922년 11월 12일에 열린 제4차 세계대회에서 통일전선 전술 논의는 마무리된다. 이때 채택된 「전술에 관한 테제」는 “코민테른은 모든 공산당과 공산주의 그룹들에게 통일전선 전술을 엄격하게 고수하라고 지시한다. 왜냐하면 현 상황에서 그것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노동인민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유일하게 확실한 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1922년 6월에 개최된 확대전체회의 직후 코민테른 강령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코민테른 자체가 아직 강령을 채택하지 못하였고 각국 공산당들도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강령을 채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15개국 33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강령위원회에서는 각국 공산당의 강령과는 별도로 코민테른 자체의 강령 작성이 필요하고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또한 과도적 요구가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들의 강령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역시 논쟁이 되었다. 코민테른의 기관지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는 1922년 9월과 11월에 강령 초안 수립과 관련된 논쟁 기고문들이 실렸고, 특히 11월에 나온 기관지에는 독일 공산당의 강령초안이 게재되었는데, 이 강령초안에는 과도적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강령위원회는 제4차 세계대회에 강령초안을 제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4차 세계대회에서는 강령에 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토론에서 주된 발언을 한 부하린은 과도적 요구를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이 기회주의라며 반대했고, 독일 공산당의 탈하이머는 그것에 찬성했다. 이러한 토론이 계속되자 레닌이 주도하여 부하린의 입장에 반하는 코민테른 결정이 내려졌다. 1922년 11월 20일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라데크, 부하린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대표단은 “과도적 요구를 어떻게 정식화할 지와 그것을 강령의 어느 곳에 위치시킬 지에 대한 논쟁이 원칙의 불일치라는 전적으로 잘못된 인상을 준다는 점을 고려하여, 러시아 대표단은 과도적 요구를 각국 지부의 강령에 포함시키고 그것을 일반적 용어로 정식하고 강령의 전반적인 부분에 이론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기회주의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을 만장일치로 확인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날 코민테른 의장단은 강령 관련 결의를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그 결의의 초안은 레닌이 작성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3) 각국 지부의 강령은 과도적 요구를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밝히고, 이러한 요구가 특정한 조건의 시간과 공간에서 나온 것임을 적절하게 단서로 달아야 한다.

4) 전체 강령은 모든 과도적 당면 요구들을 위한 이론적 틀을 명확히 제공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제4차 대회는 우리의 근본적인 혁명적 임무를 은폐하거나 대신하려고 부분적 요구들을 채택하려는 시도뿐 아니라 과도적 요구를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을 기회주의로 묘사하는 노력들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5) 전체 강령은, 영국이 인도와 다른 것처럼 각국의 경제·정치 구조에서의 근본적 차이들에 맞게 각국 지부들이 제기하는 과도적 요구의 기본적 역사적 변형들을 분명히 묘사해야 한다.

이처럼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를 거치면서 통일전선 정책과 과도적 요구는 코민테른의 공식 입장이 된다. 그러나 그 후 스탈린주의가 소련과 코민테른 전체를 장악하면서 통일전선과 과도적 요구는 점차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반면 트로츠키는 독일 및 프랑스 등에서 일어난 파시즘의 득세와 맞물려 통일전선과 과도적 요구를 강조했다. 가령 트로츠키는 1934년에 쓴 「프랑스는 어디로?」에서 “통일전선의 정치 캠페인은 그 자체로 잘 짜인 과도적 강령, 즉 노동자 농민 정부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는 조치들의 체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했고, 자신이 주도해 만든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을 ‘과도적 강령’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트로츠키의 과도적 강령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사실상 그 연원이 코민테른에 있음을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과도적 요구는 영어로 ‘transitional demands’인데, 한국에서는 일부가 ‘transitinal’을 ‘이행적’, ‘이행기’ 등으로 번역하여 사용했고 트로츠키가 작성한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이 이런 번역어를 선택하여 “이행기 강령”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그러자 ‘과도적 요구’의 역사적 등장 과정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과도적 요구가 트로츠키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잘못 인식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transitional’의 역어로 ‘이행적’, ‘이행기’가 아닌 ‘과도적’이 적절한 이유는, 첫 번째 ‘이행기’라는 역어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를 연상시키는데 이 이행기의 요구는 다름 아닌 최대강령적 요구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최대강령적 요구와 별도로 과도적 요구를 제출하는 것은 최대강령적 요구로 접근·발전해가는 요구를 적극 고민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2005년에 『해방』에 게재된 성두현의 글 「삶의 파탄을 막고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요구 (3)」을 참조하기 바란다.).

마치며

이상으로 과도적 요구의 역사적 배경을 검토한 바, 이 글은 과도적 요구의 효시로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제시된 10가지 방책을 들었다. 실제 맑스는 1881년 조르게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이 10가지 방책을 “과도적 조치들”로 설명했다. 1917년 혁명기 레닌은 비록 ‘과도적 요구’라는 표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과도적 요구의 문제의식이 담긴 요구들을 제시했다. 토지국유화와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서 제시된 5가지 요구가 그것이었다. 레닌은 이 요구들을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이라고 표현했다.

과도적 요구가 정립된 것은 코민테른에서였다. 1919년 창립된 코민테른은 변화하는 정세에 맞춰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획득하고 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 요구에서 출발하여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투쟁을 만들기 위해 제3차 세계대회 때부터 통일전선 정책을 제출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과도적 요구도 제기되었다. 제4차 세계대회에 이르러 과도적 요구는 코민테른 및 각국 지부의 강령에 포함시킬 것이 결정되는 데 이르렀다. 통일전선 정책과 과도적 요구가 코민테른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레닌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미 제2차 세계대회를 앞두고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의 과도 형태 또는 접근 형태” 모색을 주창했고, 통일전선 정책과 과도적 요구가 코민테른에서 공식화되는 고비마다 중요한 개입을 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과도적 요구는 지금 시기에도 매우 큰 의의를 지니는 사회주의 운동의 유산이다. 특히 새로운 대공황이 발발하고 자본주의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위기에 처하면서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역사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환을 현실화해낼 노동자들의 주체적 역량이 의식과 조직 모두에서 부족한 우리의 현실을 돌파할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과도적 요구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과도적 요구를 확산시키고 이를 토대로 투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과도적 요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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