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를 몰아낸 수단 민중―완전한 정권 타도를 향한 결전이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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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스피겔]

알제리에서는 1999년 이후 20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한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4월 2일 퇴진했다. 높은 실업률,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부패, 무능으로 일관한 부테플리카는 82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5선 연임에 도전하려고 시도하다가 성난 알제리 민중의 분노에 부딪힌 것이다.

수단에서는 부테플리카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인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한 오마르 알 바시르가 4월 11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체포되었다. 알제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단에서도 경제난은 정권의 실정과 맞물려 민중의 대규모 항의시위를 일으켰고 민중은 4개월에 걸친 끈질긴 투쟁 속에서 바시르 퇴진이란 성과를 얻어냈다.

이슬람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시킨 바시르 독재정권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수단은 1956년 독립을 했다. 식민 당시 이 지역은 ‘앵글로-이집트 수단’으로 불렸다. 영국은 1882년 이집트를 무력 침공하여 보호령으로 만들었고, 1899년에 와서는 수단 지역까지 이집트와의 공동통치지역으로 만들었다. 수단은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이 ‘앵글로-이집트 수단’은 영국의 지배를 위한 것이었을 뿐 그 안의 지리·언어·인종·문화 등을 전혀 고려한 영역이 아니었다. 아랍화된 북부지역과 비아랍 남수단, 다르푸르 지역 등이 한 데 묶여 있었는데, 이는 훗날 참혹한 수단 내전의 원인이 된다.

수단은 이번 투쟁에 앞서 이미 두 차례나 독재 정권을 타도한 투쟁 이력을 갖고 있는 나라다.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브라힘 압보드 정권이 1964년 민중의 투쟁으로 타도되었고, 그 후 1969년 군사 쿠데타로 가파르 니메이리 정권이 권력을 잡았다. 니메이리는 애초 아랍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나세르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점차 친미로 방향을 바꾸었고, 대규모 국가프로젝트를 대거 추진하다가 실패하여 경제를 망쳤다. 그러자 그는 IMF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수용했다. 이에 따라 민영화, 긴축 등을 추진하던 그는 1985년 대규모 시위 등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퇴진 당했다.

니메이리 퇴진 후 잠시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나 했지만 곧장 그것에 불만을 품은 바시르 장군과 그와 연계된 이슬람주의 정당 ‘민족이슬람전선’(1976년 결성되었고 1992년에는 민족회의당으로 당명을 바꾼다)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게 된다. 이슬람주의의 성장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니메이리 정권 때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니메이리는 하산 알 투라비가 이끄는 이슬람주의 운동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이슬람주의는 중간계급에게 식민시대부터 형성된 기존 수단 지배계급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이들은 점차 국가기구에 들어가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1989년 쿠데타로 이어졌다. 바시르 정권은 1992년 ‘샤리아’라 불리는 이슬람 율법에 입각한 공공질서법을 제정하여 민중을 억압했다. 특히 여성에게는 옷차림 하나, 행동거지 하나가 모두 가혹한 제재의 대상이 됐다.

바시르 정권의 또 다른 특징은 비록 이슬람주의란 얼굴을 지녔지만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정권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인 알 파이잘의 지원으로 세워진 수단 ‘파이잘 이슬람 은행’과 같은 이슬람 은행을 통해 부족한 외자를 확보하여 자국 경제에 투자했다. 이 이슬람 은행은 정치적 충성심을 신용공여의 조건으로 삼아 수단에 이슬람주의가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바시르 정권은 90년대부터 경제자유화, 민영화, 긴축 등 니메이리 정권과 다를 바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경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끌어들이고자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걸프만 아랍 국가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것은 수단으로 하여금 이 나라들에 대해 정치·경제·금융적으로 예속적 위치에 놓이게 했다.

한편 바시르 정권이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바사르는 반대세력을 잘 포섭하는 전략을 써왔다. 구 지배계급 내 양대 세력인 움마당과 민주연합주의당은 표면적으로 바사르와 민족회의당에 반대해왔지만, 움마당 당수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바시르 정권에서 일하고 있었고 민주연합주의당은 2012년 바시르 정권에 참여했다. 민족회의당에서 내부 갈등으로 갈라져 나온 인민의회당도 2014년 정권에 다시 합류했다. 두 번째로 과거 나세르주의 시절의 산물인 주민에 대한 식량 및 연료 보조금 지급은 민중의 불만이 커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해왔다.

[사진: CNN / 수단의 독재자 알 바시르]

투쟁의 발단: 식량 보조금 지급 중단과 바시르의 장기 집권 야욕

민중을 투쟁에 나서게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 경제문제였다. 애초 취약한 경제구조를 지닌 수단은, 1983년 시작된 내전의 종식 결과 남수단이 2011년 분리 독립하자 크게 타격을 입었다. 주요 유전이 남수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수단의 독립은 유전의 2/3 , 원유 수입의 75%, 외화 소득의 60%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가가 높았던 2000년대 중반 GDP 성장률은 10%, 물가인상률은 8%, 재정적자는 1.9%를 유지했으나 남수단과의 분리 이후 경제가 전반적으로 악화되었다.

경제악화로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수단은 생필품의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인데 통화가치 하락은 수입품 가격 인상을 낳았기 때문이다. 통화 가치가 계속 하락하자 정권은 변동환율제를 고정환율제로 바꿨다. 그러나 공식 환율과 시중 환율 사이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심지어 서너 가지 다른 환율이 병존하는 일까지 일어났고 외환보유고는 2005년 18억7천만 달러에서 2017년 1억8천만 달러로까지 급감했다. 물가상승률은 2017년 32.35%, 2018년 63.29%를 기록했다.

이때 IMF가 끼어들었다. 2017년 11월과 12월에 발행된 IMF의 수단에 관한 보고서는 예산문제를 거론하면서 소비자 보조금 중단을 주장했다. 주민들을 위한 식량 및 연료 보조금이 ‘보편적’으로 운영되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2011년, 2012년, 2013년 긴축과 증세를 추진한 바 있고 통화가치 하락으로 힘겨운 수단 정부는 이번에도 IMF의 권고를 따라 △환율을 60% 하락하고, △난립하는 환율을 통일하며, △곡물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내용의 예산을 2018년 1월 통과시켰다. 그리고 △밀 수입 업무를 민영화하여 민간기업에 넘겼다. 그 결과 식량 값이 3배나 폭등했다. 이제 수단 민중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됐다. 이미 2018년 1월부터 수도 하르툼에서는 보조금 지급 중단에 반대하여 시위가 일어났다. 이런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러한 경제정책을 계속 유지했고 10월에는 재차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그런데 이미 불이 붙은 민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일이 발생했다. 수단 헌법은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8월 바시르는 집권 연장 야욕을 드러내며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이 말은 자신의 출마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서방 국가들에 맞서기 위해 수단에서 이슬람 율법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이것은 집권 세력 내에서까지 반발을 야기했다.

노동자의 도시 아트바라에서 시작한 시위, 수도 하르툼으로 번지다

투쟁이 시작된 곳은 수단의 북부 나일강 연안에 있는 도시 아트바라였다. 아트바라는 수단에서 노동자의 도시, ‘노동조합의 어머니’로 불리는 도시다.

수단을 식민화한 영국은 식민지배를 위한 교통수단으로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건설된 철도 중심지가 바로 아트바라였다. 철도는 식민지배의 수단이었지만 근대적 임금노동자를 낳는 혁명적 기여를 했던 것이다. 아트바라의 철도노동조합은 1964년과 1985년 독재타도 투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런 철도노동자의 투쟁과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1980년대부터 정권 차원의 탄압과 철도 해체를 추진했다. 정권은 점차 운송수단을 철도에서 트럭으로 대체하여 아트바라의 노동자 수와 조직은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트바라는 계속 수단 노동자 투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2018년 12월 19일 그 아트바라에서 빵 값이 3배 이상 인상된 것에 항의하며 공업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여기에 곧장 일용 노동자 등 하층 노동자, 민중이 결합했고, 해당 지역 집권당 민족회의당 당사와 행정기관 등을 공격하고 불태우는 등 시위가 격렬해졌다. 가다레프 등 주변 지역들로까지 시위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사진: 트위터 / 2018년 12월 19일 아트바라에서 열린 시위. 집권 민족회의당 건물이 불타고 있다.]

시위는 금세 수도 하르툼에까지 확산됐다. 하르툼에서의 시위를 주도한 것은 ‘수단전문직협회’였다. 수단전문직협회는, 2016년 의사파업 때 만들어진 파업조정위원회로부터 출발한 수단의사중앙위원회, 친정부 수단언론인조합에 반대하여 2012년에 설립된 수단언론인네트워크, 친정부 수단법조연합 지도부 선거에 나왔던 반대파 변호사들이 중심이 되서 새로 만든 민주변호사연합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전문 직종 중심의 조직이었다.

지방 도시와는 달리 중소부르주아 중심의 수단전문직협회가 투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독재정권의 탄압과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 조직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이슬람주의 정권 하에서도 자본주의가 지속 성장하면서 민간부문의 자유 직종이 늘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성장한 것은 바시르 독재의 친자본 정책 때문이었으나 이제는 바시르 독재가 자신들에게 족쇄가 되어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

수단전문직협회는 2018년 8월 기자회견을 갖고 최저임금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최저임금 인상 관련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12월 19일 아트바라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수단전문직협회는 계획을 조정하여 12월 25일 대규모 시위를 갖고 정권에 경제정책에 항의하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자유, 평화, 정의”, “혁명은 민중의 선택권이다”, “물러나라! 그거면 된다!”와 같은 정치적 구호를 외쳤다. 애초 빵값 인상 반대와 같은 경제적 항의와 바시르 퇴진이라는 정치적 요구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바시르 정권이 타도되지 않는 한 경제적 처지가 나아질 가능성은 희박했고, 다른 한편으로 경제 악화는 바시르 독재정권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1월 1일에는 수단전문직협회가 중심이 되고 여러 정당들이 가세하여 “자유·변화 선언”을 발표했다. 무조건적 정권 퇴진과 국민과도정부 구성이 그 주요 요구였다. 이때부터 바시르 정권 반대세력의 주축은 바로 ‘자유·변화 선언 세력’이라고 불리게 되고 바시르 퇴진 이후 임시군사평의회와 향후 과도정부 구성을 협상하는 중요 주체가 된다.

선언 세력은 ‘무조건적 정권 퇴진’을 내걸었지만 이 요구에 대해 완전히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참가한 정당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에서 짧게 언급한 것처럼 바시르 정권과 협력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단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변혁까지 밀고 갈 유력한 급진 정치세력·정당은 부재한 실정이다. 12월 25일 시위 직전 야당들은 모여서 바시르 퇴진, 과도적 총재회의 구성, 기술관료 중심의 정부, 정당 다원주의 등에 합의를 했다. 즉 바시르 퇴진에 대해서는 합의했지만 기술관료 중심의 과도 정부 구성에 합의함으로서 그들의 정치적 목표가 현정권의 지배세력을 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지배질서 재편임을 드러냈다.

이 무렵 집권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은 시위대응을 두고 군의 권력장악이냐, 현 정부 사임 및 과도적 기술관료 정부 구성이냐 등을 두고 분열해 있었다. 민중 투쟁이 승리하기 위해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지배세력의 와해, 분열이라는 점에서 이 지점은 중요하게 볼 필요가 있다.

시위가 두 달이 되어도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되자 바시르 정권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2월 22일 바시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부를 해산한 후 국방장관 아흐메드 아와드 이븐 아우프를 부통령에 임명하는 등 새로운 내각을 꾸렸다. 열 곳의 주지사를 해임하고 군·보안요원으로 대체하는 한편 집권당 부의장직을 아흐메드 하룬이라는 장군에게 맡겨 의장 권한을 행사하게 했다. 내각을 일신하는 한편 군부세력을 전진배치 한 것이다. 다른 한편 주요 장관직은 임명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 둠으로써 반대세력과의 타협 여지를 남겨뒀다.

거리의 시위하는 민중들에 대해서는 국가정보안전원 요원들과 신속지원군 부대를 통해 야만적 탄압을 전개하여 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무수한 체포, 연행이 일어났다. 신속지원군은 2003년에 일어난 수단 서부 다르푸르 분쟁 때 바시르 편에 서서 다르푸르 지역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아랍계 흑인 잔자위드 민병대를 모체로 둔 정권 친위 군사조직이다. 이때의 학살로 인해 바시르와 그 측근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제소되어 국제적인 수배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탄압 강화와 반대세력 상층부 포섭은 먹혀들지 않았다. 바시르 정권 퇴진에 대한 민중의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특히 청년과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청년들은 태어난 후 내내 바시르 정권의 폭압적 통치만 목격했고 그 대안을 보여주지 못한 기성정당에 만족하지 못했다. 수단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며 사회경제적, 정치적 욕구는 커졌지만, 그것은 실현될 수 없었고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한편 정권의 한 보고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 중 70%가 여성이라고 할 정도도 여성도 투쟁에 적극 나섰다. 그 이유는 뭘까? 수단에서 여성은 민중의 오랜 투쟁 역사 속에서 항상 전면에 섰던 집단이었다. 게다가 여성은 바시르 정권에서 갖은 억압을 당했다. 이슬람 율법은 여성에 대해 특히 가혹했고 여성성기절제가 널리 성행하고 있다. 2013년 수단의 여성불평등지수는 147개국 중 129위를 차지했다. 수단 여성은 이런 극악한 여성억압적 정권이 끝장나길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트위터 / 4월 10일 한 여성이 승용차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사진이 투쟁의 상징이 됐다. 그녀는 ‘누비라의 여왕’이라 불리게 됐다.]

바시르 퇴진과 궁정 쿠데타 시도

비상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간 민중들은, 니메이리 정권 타도 34주년 기념일인 4월 6일, 수도 하르툼에 위치한 군사복합단지 앞 거리를 점거하고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이곳은 수단 군 합동참모본부가 있는 곳으로, 권력의 심장부에서 정권 퇴진을 강하게 압박하고자 한 것이었다.

바시르 정권은 국가정보안전원과 신속지원군을 동원하여 실탄 사용 등 폭력적 방식으로 시위해산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탄압에도 민중은 굴하지 않았다. 민중은 서로 먹을 것, 마실 것을 챙겨주고 밤낮으로 서로 교대하며 농성장을 지켰다. 이제 바시르 정권에게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 일부 병사들이 군사기지 앞을 점거하고 있는 민중 편으로 돌아서서 친정부 군사조직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병사들이 민중 편에 선 것은, 그들 역시 보조금 삭감과 같은 바시르 정권의 경제조치로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4월 6일 거리 점거 농성이 시작된 이후, 바시르 정권은 더 버틸 재간이 없게 됐다. 4월 11일 국방장관 아우프는 텔레비전에 나와 대통령 바시르를 체포하고 군대가 2년간 과도평의회를 수립하여 통칭하다가 민정 이양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과도평의회의 의장은 아우프 본인이 맡는 한편 야간 통행금지는 1개월간 지속하고 비상사태는 3개월간 유지한다고 말했다.

[사진: 4월 11일, 아우프 국방장관이 텔레비젼에 나와 알 바시르의 퇴진과 체포를 발표했다.]

수단 민중은 바시르 퇴진에 환호했다. 그러나 이내 이 발표의 실체를 파악하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시르 독재 ‘정권’의 퇴진이 아닌 바시르 개인만 제거한 채 기존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바시르 없는 바시르 정권’, 이른바 ‘궁정 쿠데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수단전문직협회 대변인 아흐메드 알 몬타세르는 “우리는 앞으로 2년간의 군사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 정권은 그대로다. 정권 안에서 5-6명이 다른 5-6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 인민에 대한 도전이다.”라고 말했다. 자유·변화 선언 세력은 성명을 통해 이것은 “내부 군사 쿠데타”이며 “국가권력이 혁명세력을 대변하는 민간 과도정부로 복귀될 때까지 민중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군사복합단지 앞 농성장의 민중들 역시 “너희는 한 도둑을 다른 도둑으로 바꿨다.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다”, “우리는 오늘 오후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우리가 우리 승리를 도둑맞은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쟁취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지배세력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은 수단 민중의 투쟁에서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군부는 사태의 본질을 간파한 민중의 분노는 드셌다. 정권에 유리하게 상황을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게 된 아우프 국방장관은 다음 날 사임하고 과도평의회에서 퇴장했다. 그 자리는 압델 파타 압델라만 부란 중장에게 돌아갔다. 민중들의 무기한 철야 농성을 저지하기 위한 조치였던 야간 통행금지도 해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란은 과도군사평의회 부의장으로 요하메드 함단 다가로 중장을 과도군사평의회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런 과도군사평의회 내 변화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었다. 아우프와 마찬가지로 부란과 다가로 모두 바시르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가로는 악명 높은 신속지원군 수장으로 2003년 다르푸르 분쟁 관련 전범이다. 또한 수단 내 친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인사로 예멘 내전에 신속지원군 병력을 파병했다.

수단 민중의 운명이 걸린 대결이 임박했다

4월 11일 바시르 퇴진 이후 수단의 투쟁은 궁정쿠데타를 성공시켜 안정적으로 바시르 없는 바시르 정권을 창출하려는 군부와 기존 지배세력 대 이 시도를 좌절시키고 군부와 바시르 정권 일체를 몰아내려는 민중 세력 사이의 치열한 싸움으로 그 성격이 변화했다.

수단전문직협회는 “우리는 권력을 민간정부에 이전하라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쟁취될 때까지 우리의 혁명이 계속될 것이고 그 길에서 후퇴 또는 이탈하지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4월 18일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였다. 4월 23일에는 이 모든 투쟁의 시발점이었던 아트바라의 철도노동자들이 기차를 끌고 수도 하르툼까지 투쟁에 동참하려는 민중을 운송하는 행동이 전개됐다. 5월 2일에는 수십만 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가 조직되어 군사평의회의 즉각 민정이양을 촉구했다.

[사진: 아트바라에서 수많은 민중을 싣고 하루툼까지 온 기차. 아트바라 철도노동자들이 이 기차 행진을 주도했다.]

5월 초까지 이른바 자유·변화 선언 세력은 군부와의 정치 협상의 상태로 나와 군부와 과도정부 문제를 두고 공방을 벌였다. 이 협상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정권 타도로 가기보다 작년 12월 25일 경 야당세력들이 협의했던 수준의 과도정부 수립을 두고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유·변화 선언에 참여한 야당들은 군-민 공동기구의 결성과 이 기구를 통한 과도 단계 감독, 이 과정에서 민간 주도를 주장하고, 폐기된 기존 헌법을 대체할 헌법 초안을 과도군사평의회에 제출했다. 또한 이 군-민 공동기구 구성에서 민간 8인, 군부 7인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군부는 과도 기구로 군부 7인, 민간 3인의 평의회를 주장하고 있고, 5월 7일에는 자유·변화 선언 세력의 헌법 초안 제안을 거부하고 이슬람 율법을 헌법의 기초로 삼으며 아랍어를 국어로 정하겠다는 주장을 밝혔다. 이슬람주의와 아랍계 수단인의 특권 및 인종주의가 수단 민중에게 큰 분노를 야기한 사항들이라는 점에서 군부의 실체가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현재 이 협상은 5월 19일 3년간의 과도정부 기간을 갖고 향후 전체 300석의 의회를 구성하는 것까지 합의했다. 그러나 과도정부의 구성과 주도권을 두고 군부와 야당세력이 다투다가 협상이 결렬되어 다시 투쟁의 무대는 거리로 옮아갔다.

수단전문직협회는 군부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5월 24일 노동자 총파업을 호소했다. 이 호소에 따라 노동자들이 다시 전면에 나섰다. 5월 28일과 29일 양일 과도군사평위회의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강력한 총파업이 전개되어 나라 전체가 완전히 활동을 멈췄다. 수도 하르툼에서 파업 준수율은 100%에 가까웠다고 한다. 버스, 트럭, 병원, 공항, 전력, 정부기관, 은행, 석유회사 등 모든 곳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이틀간 중단했다. 변호사, 언론인, 과학자, 상점주, 노점상 등 중소부르주아지 역시 이 대열에 동참했다. 전국의 파업위원회들은 곳곳에서 파업을 지지하고 운동 지도부의 지시를 고수하겠다는 결의를 했다. 항만 노동자들의 한 결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완전한 민간 정부와 주권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수단진문직협회의 모든 결정을 따를 준비와 태세가 갖춰져 있음을 재확인하며, 정부가 민간의 손에 넘어올 때까지 시민 불복종 및 공공연한 정치파업을 전개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언한다.”

강력한 파업이 벌어지자 신속지원군 수장 다가로는 파업에 대해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이런 기존 군부 지배세력과의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얻고 더욱 급진화되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신속지원군과 연계된 군대가 하르툼 동부 엘 리야드 구역에 있는 전기회사를 급습해 10명의 노동자를 억류했으나 다른 전기회사 노동자들의 위력에 굴복해 억류를 풀고 퇴각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파업에 들어간 수단 노동자들이 SNS에 올린 인증샷 중 하나]
[사진: 파업에 들어간 수단 노동자들이 SNS에 올린 인증샷 중 하나. 항구가 파업으로 완전히 마비됐다.]
 

그러나 군부 지배세력은 민중의 투쟁을 꺾어버리기 위한 더 노골적인 시도에 착수했다. 파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바로 다음 주인 6월 1일, 군부 지배세력은 민중의 투쟁을 꺾기 위한 공격을 감행했다. 6월 1일 새벽 신속지원군 소속 군인들이 최루가스와 실탄을 발포하며 수단 민중들의 군사복합단지 앞 농성장으로 쳐들어왔다. 이로 인해 최소 100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크게 다쳤다. 일부 시신이 발견되지 않거나 신속지원군에 의해 강에 유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100명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된다.

모하메드 유세프 알 무스타파 수단전문직협회 대변인은 이 공격에 대해 “이것은 우리 혁명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군사평의회는 사태의 단계적 확대와 대결을 선택했다. … 현재 상황은 우리냐 그들이냐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로써 바시르가 퇴진한 이후 과도정부 구성을 두고 한달 반 정도 계속된 협상은 파탄났고, 이제 군부 지배세력과 민중의 전면적인 힘 대결만이 수단의 미래를 결정짓는 긴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 이른 것이다. 바시르 없는 바시르 정권을 획책하는 기존 군부 지배세력과 바시르 정권의 완전한 타도를 원하는 민중 사이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대결의 결과가 향후 수단의 미래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6월 1일 수도 하르툼에서 친정부 군사조직 신속지원군이 군부의 민정이양을 요구하며 점거농성 중인 민중을 공격해 30여명을 학살했다. 그후 계속된 공격으로 그 수가 100명을 넘었다.]
[사진: 민중들은 하르툼의 농성장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타이어를 태워 군부세력의 폭력 도발에 대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단 민중 투쟁의 향방을 가늠할 요인 중 하나인 대외적 요인을 지적하고자 한다. 현재 아랍 지역의 지배질서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반동세력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걸프만 국가들은 수단의 기존 지배체제에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따라서 그것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되고 있다. 걸프만 국가들은 수단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자국 노동력으로 활용하고 있고, 수단을 자국 농축산물 공급을 위한 농장을 사용하고 있으며, 상업적으로 금융적으로 예속시키고 있다. 군사적으로 예멘 내전 파병의 예처럼 수단을 걸프만 국가의 용병으로 부리고 있다. 바시르 정권의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지배를 재확립하려면 걸프만 국가의 지원이 중요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5월 둘째 주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중요 인사들이 수단을 방문한 후 “질서있는” 이행을 위해 군사평의회에 30억 달러 규모의 신용을 제공했다고 한다. 아울러 수단 전역에서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던 시각, 과도평의회 의장 부란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남수단, 에디오피아 등을 돌며 군부 지배세력에 대한 국제적 지지 확보를 획책했다. 이집트 방문 시 부란은 이집트 알 시시 대통령에게 마치 자신의 상관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거수경례를 해 논란이 됐다. 이런 아랍 지역 반동세력의 개입을 어떻게 꺾느냐가 수단 민중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단의 민중 투쟁에서 주목할 점

우선 수단의 투쟁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아랍 민중 세력이 보였던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당시 이집트의 경우, 민중은 30년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를 치열한 가두투쟁을 통해 물러나게 했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은 저항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무바라크의 퇴진은 기존 지배질서를 완전히 변혁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은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자 무바라크라는 개인 한 사람을 퇴진시키고 잠시 뒤로 물러나 때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시적으로 이슬람형제단 소속 모함마드 무르시가 선거를 통해 집권했으나 무르시 집권 1년 만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압둘 팟타흐 시시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말았다. 사람만 바뀐 체 무바라크 체제가 다시 들어선 것이다. 당시 이집트 민중은 독재자 개인이 물러난다고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배질서 자체의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반면 아직 많은 고비가 남았지만 수단은 이집트의 전철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 아랍 민중 투쟁은 이슬람이란 종교가 끼어 그 투쟁을 왜곡하곤 했다. 특히 하나의 정치적 조류로서 이슬람주의는 중동,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반동적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제국주의의 억압, 수탈을 당해온 이 지역에서는 과거 퇴행적 이슬람주의가 저항적 역할을 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종교가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들어 있다 보니 민중의 정치적 목소리가 종교적 언어로 왜곡되어 표현되곤 한다. 아랍의 봄 시기 이집트의 경우, 이슬람형제단 계열 자유정의당이 마치 투쟁의 대변자처럼 전면에 나가게 됐다. 시리아의 경우에도 아사드 정권의 대한 주요 저항 세력이 종파적으로는 수니파였던 것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어 아사드 정권의 실정과 경제 조건 악화로 인해 발생한 민중의 항의시위가 정권 대 이슬람극단주의 간의 투쟁인 것처럼 치환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번 수단 민중의 투쟁은, 수단 사회가 이슬람에 대한 환상을 깨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세 번째, 수단 민중 투쟁은 바시르 정권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민중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주의 투쟁이다. 노동자들이 적극 결합하고 있지만 투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수단전문직협회나 야당세력 등 중소부르주아 계급들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로 볼 때 현재 투쟁이 자본주의 자체를 근본 변혁하는 투쟁으로까지 발전하는 양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단 민중 투쟁의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투쟁 자체도 매우 중요한 투쟁일 뿐 아니라 특히 극악한 억압과 탄압을 자행해온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은 그것이 아직 민주주의 투쟁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민중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보다 자유로운 조건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따라서 철저한 바시르 정권 타도 투쟁은 더 급진적 투쟁과 이를 위한 주체 형성의 기반이 될 것이다.

현재 수단에서는 민중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 임박했다. 수단 민중 투쟁의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수단 민중의 편에서 이 투쟁이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갈지 주시해야 할 것이다.

농민의 자식이라는 성장배경이 생태학에 대한 관심을 싹 트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운동을 접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떴다. 노동해방실천연대 회원. 번역서로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2012), 『마르크스의 생태학』(201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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