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재생산 이론: 이원론의 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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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ronline.org]

『사회주의자』는 최근 페미니즘 운동에서 각광받고 있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연재를 진행했다. 지금까지 다룬 개념은 가부장제, 가족임금, 상호교차성이었다. 지금까지의 글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은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고, 이것은 글쓴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개념인 사회재생산을 다룬다. 우리가 이런 연재 기사를 기획했던 것은 사회주의자로서 여성해방에 적극 임하기 위해서였다. 연재기사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앞으로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여성해방 쟁점을 다룬 기사를 꾸준히 게재할 것임을 약속드린다.

‘사회재생산’ 개념은 지금껏 다룬 개념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연재기사에서 앞서 다룬 세 개념이 페미니즘 내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인 반면, ‘사회재생산’은 분명 맑스주의 내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1960년대 페미니즘의 제2물결이 등장한 이후 맑스주의, 혹은 사회주의 운동진영 내에서도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수용하여 여성억압 문제를 설명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이 흐름이 이른바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다(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페미니즘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이론 조류에 속한 사람들 상당수는 이 둘의 구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바로 사회주의 페미니즘 흐름 내에서 맑스주의적 개념을 사용하여 여성억압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나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재생산 이론은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동시에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하나로 통합하는 단일이론을 제공한다.

1980년대 이후 사회재생산 이론은 미국과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점차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런 흐름에 더 힘을 싣는 계기가 된 것이 최근 사회재생산 관련 이론서들의 출간이다. 예를 들어 1983년 출간되었던 리즈 보겔의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단일이론을 향하여』가 2013년 재출간되었고, 2017년에는 티티 바타차야가 편집한 『사회재생산 이론』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심지어 맑스의 생태학을 발굴,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존 벨라미 포스터조차 『먼슬리 리뷰』 2018년 1월호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을 지지하는 논문을 게재했다. 사회재생산 이론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상호교차성’ 개념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사회재생산’을 대안개념으로 제시하는 등 활발한 이론적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재생산 이론은 여성억압의 원인과 해법을 제대로 설명했는가?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이원론을 극복하는 단일이론을 정말 제공했는가? 이번 글은 바로 이 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사회재생산 이론의 등장 배경: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이원론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이원론’과 ‘일원론’/‘단일이론’이라는 말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 용어는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통합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시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실 1960년대 페미니즘 제2물결에서 등장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이 문제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를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며 계급문제는 부차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일원론적 이론을 주장했다. ‘이원론’이라는 이론틀이 쟁점이 되고 비판 대상이 된 것은, 급진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수용하여 여성억압의 문제도 중시하면서 계급 착취의 문제도 아울러 중시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이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틀로 이원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왜 이원론을 택했던 것인가?

우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기본 전제는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가 역사발전 법칙들, 특히 자본의 법칙들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제공하지만 맑스주의 범주들은 성맹목(sex-blind)적이다”고 말한 하이디 하트만의 주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억압의 고유한 장소는 이른바 맑스주의가 중시하는 ‘계급’, ‘생산’ 외부에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위 두 주장들은 맑스주의를 자본주의에서의 생산, 계급 등만을 다루는 것으로 매우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급문제를 설명하는 맑스주의와 별도로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이론과 개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 계급은 맑스주의로, 여성억압은 페미니즘으로 설명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로써 자본주의/가부장제, 생산양식/재생산양식, 자본주의생산양식/가내생산양식, 계급체제/젠더체제 등 다양한 형태의 이원론이 등장했다.

이원론의 문제는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이론적으로 이원론은 여성억압과 계급문제를 기계적으로 결합한 것이었다. 또한 여성억압의 고유한 원인, 기원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미 가부장제를 다룬 전편에서 설명했듯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수용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은 여성억압의 원인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사실상 인간 본성론에 다름 아닌 주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택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서는 불가피한 결과였다. 맑스주의의 이론을 자본주의나 계급문제만을 다루는 것으로 매우 협소화시켜놓았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여성억압에 대해 설명하는 이론틀로 활용할 수도 없었다.

실천적으로 이원론을 견지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계급문제와 여성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 운동으로 나아갔다기보다 이 두 문제 사이에서 서로 분리되어 어느 한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낳았다. 그런데 그 방향은 대개 사회주의보다는 페미니즘 쪽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수 퍼거슨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의 강점에 의지하여」(1999)라는 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원체제 이론(사회 권력이 젠더 억압의 가부장제 체제와, 비록 상호교차하지만 그것과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경제적 계급착취의 자본주의 체제, 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론)에 대한 비판자들에 대해 응집력 있는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1980년대 중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일부 전직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경제환원론으로 후퇴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점차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 절정에 이른 여성억압에 대한 순수한 문화적 설명으로 옮아갔다.

이 두 가지 불충분한 공식들을 넘어서지 못한 무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한 때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였던 상당수 사람들로 하여금 맑스주의뿐 아니라 유물론적 분석 일반을 거부하도록 조장했다.

‘사회재생산’은 이 시기 사회주의 페미니즘 내에서 이미 등장한 개념이었다. 비록 ‘가부장제’와는 달리 맑스주의 내에서 존재하는 개념을 가져다 쓴 것이지만, 이원론에 전제되어 있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사고가 사회재생산에도 깔려 있었다. 사회재생산 이론가들 역시 전통적으로 맑스주의가 설명한 ‘생산’과는 다른 여성억압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영역으로써 ‘재생산’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재생산은 대개 임신, 출산, 육아, 수유, 가사노동 등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과 이와 관련된 사회, 문화적 역할을 의미했다. 어떤 식으로 재생산을 규정하든지 결국 ‘재생산’은 ‘생산’과 대비되는 식으로 설명됐다. 따라서 리즈 보겔의 증언처럼, 사회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로 나누는 이원론만큼이나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하는 이원론 역시 여러 비판을 받았다.

가부장제와 재생산 개념을 사용하는 이론가들은 여성억압을 두 개의 분리된 구조들이라는 식으로 분석한다. 가령,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생산양식과 재생산양식, 계급체제와 젠더체제처럼 말이다. 아이리스 영(Iris Young)이 명명한 것처럼, 이 “이원체제 이론들”은 “여성억압이 두 개의 구별되고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체제들로부터 생겨났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들은 일관되고 비기계적 방식으로 이 체제들을 관계 맺게 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원체제 이론들은 사회 발전에 관한 분리된 설명들이 신비한 공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원론을 답습한 최신 ‘사회재생산’ 이론

① 최신 사회재생산 이론의 주장

최근 새롭게 ‘사회재생산’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재생산’ 이론이 이제 과거의 이원론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이전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의 ‘생산’, ‘경제’ 개념을 협소하게 이해하여 이원론에 빠지게 되었는데, 사회재생산 이론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개념을 확장하여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단일한 유물론적 사회이론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수 퍼거슨은 ”오직 맑스주의 방법론―그것의 역사유물론적 전제―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해당 전통의 초기 작업이 지닌 이원론적이고 경제환원론적 경향을 극복하는, 여성억압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이들이 취하는 방식은 초기 사회재생산론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맑스주의가 ‘상품생산’, ‘자본주의생산’, 혹은 그냥 ‘생산’이나 ‘시장’에 대해서만 다루고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는 공백으로 놓아두었다고 주장한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해서 규명하지만 여성억압이 발생하는 장소인 노동력의 재생산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애초 맑스가 이른바 ‘정치경제학 비판 플랜’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르면 ‘자본’에 그치지 않고 토지소유, 임금노동, 국가, 대외무역, 세계시장 등을 순차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맑스의 원래 계획이었다는 사실이다. 맑스가 『자본론』만을 남기고 사망했기 때문에 임금노동에 대한 내용은 제대로 다루지 못한 공백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맑스의 공백을 채우고 맑스주의를 노동력의 재생산까지 포괄하도록 확장시켜, 계급착취뿐 아니라 여성억압, 더 나아가 다른 억압들까지 아우르는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론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② 맑스주의 개념의 자의적 해석과 왜곡

안타깝게도 이들의 주장은 초기 사회재생산 이론과 그다지 다를 게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들은 맑스의 공백을 채운다고 하면서 생산과 재생산 개념을 자의적으로 왜곡했다는 점이다.

우선 맑스가 ‘재생산’ 개념을 쓴 것은 맞지만, 재생산을 생산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자본론』 1권 “단순재생산” 장은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생산과정의 사회적 형태가 어떻든, 생산과정은 연속적이어야 하며 주기적으로 동일한 국면들을 끊임없이 통과해야 한다. ……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 생산과정도, 그것을 연속된 전체로서,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으로서 고찰할 때에는, 동시에 재생산과정이다.
생산의 조건은 동시에 재생산의 조건이다. 어떤 사회도 그 생산물의 일정한 부분을 끊임없이 생산수단, 즉 새로운 생산물의 요소로 재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산을 계속할 수 없다. 즉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위의 인용 어느 부분에서도 노동력 재생산을 따로 떼어내어 생산과 대비되는 사회재생산을 주장할 여지는 없다.

둘째, 경우에 따라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생산/재생산 대비처럼 생산과 소비를 대비시키기도 한다. 노동력 재생산이 주로 재화(사용가치)의 소비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맑스는 생산과 소비를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에 따르면 “생산은 또한 직접적으로 소비”이다. 이를테면 노동자가 공장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과정은 자신의 노동력을 소비하는 과정이고, 공장 밖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소비하는 과정은 노동자가 스스로를 생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뿐 아니라 생산수단 역시 생산과정에서 스스로 소비되어 새로운 생산물을 생산한다.

셋째, 맑스의 생산 개념 역시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상품생산이나 자본주의적 생산만을 일컫는 협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맑스의 생산 개념이 매우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는 모든 역사의 제1전제를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로 규정하였다. 이 제1전제의 내용은 첫 번째 “물질적 생활 자체의 생산”이다. 두 번째는 “충족된 최초의 욕구 자체 및 그 충족행위와 이미 획득한 충족수단이 새로운 욕구를 낳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처음부터 역사적 발전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내어 번식시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전제조건을 이야기 한 후, 이 “사회활동의 세 가지 측면은 세 개의 다른 단계가 아니라, 역사의 여명과 최초의 인류 이래로 동시적으로 존재해 왔고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에서 관철되고 있는 세 가지 측면”이라고 정리하였다. 즉 이 세 가지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지 않는 동일한 활동의 다양한 측면들이라는 것이다.

넷째,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노동력 재생산에 대해 매우 비현실적인 주장을 제시했다. 맑스는 『자본론』 1권 6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에서 노동력을 특수한 상품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노동력이 다른 상품과 달리 특수성을 갖는 것은 그것이 가치를 증식시키는 유일한 상품이라는 데 있다. 그런데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이러한 맑스의 설명을 왜곡하여 노동력 상품이 특수한 이유는, 그것이 비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맥낼리와 퍼거슨은 “노동력은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혈연기반장소’인 ‘노동자계급 가족’ 내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고 주장했다. 티티 바타차야 역시 「사회재생산 이론이란 무엇인가?」(2013)라는 글에서 “이들 학자들은, 맑스의 『자본론』을 꼼꼼히 보면 체제의 핵심인 우리의 노동력 자체가 사실상 자본주의 외부에 있는 가족이라 불리는 ”혈연기반“의 장소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포스터도 마찬가지로 “가구에서 생산되는 사용가치와 그 생산에 사용되는 시간은 …… 자본주의적 착취 체제에 덧붙여지게 된다”, “상품생산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숨겨진 장소”에 놓여 있는 자연과 사회재생산 노동의 수탈은 …… 한 체제로서의 자본에 대한 맑스의 이해 전체에서 중요한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개념의 왜곡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노동력 재생산을 자본주의와 분리된 블랙박스로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측면에서도 노동력이 실제로 재생산되는 과정을 잘못 보는 것이다. 노동력이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노동자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가내 노동이 일정정도 필요하지만, 노동자 재생산 과정의 대부분은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있고 자본주의에서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가족 내에서 자본주의와 무관한 가사노동의 양은 대폭 줄어들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사는 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상품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최근의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계급착취와 여성억압을 결합시키는 단일이론을 제공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에 대한 이런 왜곡과 자의적 해석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들도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의 고유한 영역을 무리하게 설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③ 여성문제를 자본주의 운영 법칙으로 협소하게 포괄하려고 한 사회재생산 이론

최근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이론이 단일이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그것이 사회재생산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확장하여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뿐만 아니라 공장 밖에서 일어난 노동력 재생산까지 포괄하는 자본주의의 운영 법칙을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억압을 매우 협소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여성억압을 대개 노동력 재생산과 관련지어 설명하는데, 이는 노동자계급 이외의 다른 계급에서 일어나는 여성억압은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여성억압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것인데, 사회재생산 이론은 여성억압을 자본주의와의 관계, 그것도 노동력 재생산과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함으로써 여성억압의 오랜 역사적 성격을 간과하게 된다. 여성억압을 자본주의의 유지, 재생산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여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식의 접근은 여성억압을 기능주의적으로 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원조 사회재생산 이론가라고 일컬어지는 리즈 보겔은 1983년 책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풀어야 할 문제를 세 가지 들었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노동자계급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을 받는다. 무엇보다, 모든 계급 사회들에서 여성은 종속적 지위를 점한다. 그리고 일부는 여성이 사회주의 사회를 포함한 모든 사회에서 종속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여성억압의 기원은 무엇인가? 어떻게 계급을 가로지르는 그것의 초역사적 성격이 이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보겔의 이 생각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최신 사회재생산 이론은 이 점을 망각하고 있다.

맑스주의에 입각한 여성해방이론의 모색

지금까지 사회재생산 이론의 개념 사용을 맑스주의 관점에서 상세히 다룬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다뤘던 개념들과는 달리 맑스주의 개념을 가지고 여성억압을 설명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최근의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과거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재생산 이론이 가진 한계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과거와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맑스주의 관점에서 여성억압과 해방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여성억압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에 충실하지 않았다. 맑스는 자신의 물질적 삶의 생산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고, 따라서 “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에,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에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인류 역사에서 계급의 등장뿐 아니라 여성억압의 등장도 생산의 변천 속에서 설명될 수 있고, 또한 이 점이 설명된 후에야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의 특수한 성격이 제대로 규명될 수 있다. 이는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엥겔스는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바로 이러한 설명을 시도했다. 엥겔스가 근거한 자료들은 현재에 와서 새로운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들이 등장하면서 상당부분 낡은 것이 되었지만, 설명의 뼈대와 접근방식은 여전히 경청해야 할 과학적 인식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사회재생산 이론의 가장 큰 한계는 바로 엥겔스를 간과했다는 점이었다. 맑스주의 내의 개념을 통해 여성억압을 설명하려고 한 사회재생산 이론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한 지금, 이제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에 입각한 여성문제 접근이 진정 모색되어야 할 때다.

한개의 댓글

  1. 글 잘 읽었습니다. 독해력이 그닥 좋지 않아 제가 글을 이해한건지 여쭤보고자 댓글을 답니다. 제가
    이해한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재생산노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맑스주의적 관점을 천명했지만, 맑스는 애초에 생산-재생산이라는 개념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것이 아닌 통합된 것으로 설명했으며(소비또한 노동력에 대한 생산이라고 설명했을때), 그러기에 재생산노동이라는 분과로 따로 독립시켜야 할 것이 아닌 가사노동또한 생산노동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임금노동과 동일한, 혹은 연장선상에 있는 개념이며 가사노동자들은 남성착취가 아닌 지배계급의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인데요. 혹시 제 이해에서 틀린 점이
    있다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여쭤보고 싶은것은 그렇다면 1)자본주의 사회와 전자본주의 사회의 가사노동이 착취의 양식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2)가사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을 어떤 형식으로 보장받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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