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있는 민주주의와 온건 다당제: 심상정의 노골적 자유주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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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레디앙]

19대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6.17%, 200만 표를 득표했다. 이것은 이른바 “진보”정치 출신 정치인으로는 사상 최대 득표였다. 그 전까지는 16대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획득한 3.9%, 95만 표가 가장 많은 득표였다. 선거기간 동안 심상정은 TV토론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한때 여론조사에서 11.4%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선거 마지막 순간에는 수구세력의 선전에 대한 우려와 사표방지 심리가 작용하여 지지율보다 낮은 득표를 기록했지만, 그래도 작지 않은 결과를 받아들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진보운동 일각은 진보정치의 공간이 확장되었다고 안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문재인과 대비되는 동성애 문제에 대한 진보적 태도 등으로 말미암아 심상정이 괜찮은 진보 정치인이라는 인식 역시 늘어났다. 다른 한편, 민주노총에서는 지지하는 진보후보로 정의당의 심상정과 민중연합당의 김선동을 결정하였고, 심상정을 지지하는 사회운동조직도 적잖았다. 그렇다면 이제 대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심상정과 정의당은 진보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인가?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다. 이미 『사회주의자』는 정의당이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그 이유를 정의당의 역사적 뿌리에서부터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정의당이 대선에서 선전했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 있는 민주주의”와 “온건 다당제” 등 대선 전부터 심상정이 주장해왔던 내용들을 살펴보면, 심상정이 자본가계급이 추진하는 자유주의적 지배질서 재편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주장이 진보세력 내에서 힘을 얻고 있어서, 매우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 글은 이런 심상정의 정치적 주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으로 파헤쳐보고자 한다.

최장집 연출, 심상정 주연

심상정의 핵심 정치적 주장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와 “온건 다당제”이다. 이는 여러 매체를 통해 쉽사리 확인된다. 가령 경향신문은 2017년 1월 19일 기사에서, 심상정이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기치로 19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정치구조와 관련된 심상적의 대표적 주장은 “온건 다당제”, “결선투표제”, “의회중심제”(심상정은 심지어 의원내각제까지 주장하고 있다)인데, 이 중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 “온건 다당제”이다. 심상정과 정의당의 입장에서 볼 때, “결선투표제”와 “의회중심제” 모두 “온건 다당제”를 밑바탕으로 할 때 힘을 쓸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심상정은 4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헌법 개정에 대한 대통령 후보 의견 청취” 자리에서 “온건 다당제에 기반을 둔 의회중심제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심상정이 주장하는 정치적 의제가 심상정의 독창적 입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와 “온건 다당제”는 바로 최장집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용이다.

최장집은 이미 2000년대 후반부터 87년 이후 수립된 민주주의 체제가 노동이 빠져 있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이고, 노동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2012년 이러한 주장을 담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다른 한편, “온건 다당제” 역시 그의 오랜 주장이었다. 자신의 “온건 다당제” 주장을 명료하게 표현한 글로는 2015년 1월 『한겨레21』 기사, 「증오의 한국사회, 진단 2015 “문화·정신적 수준이 저질스러워졌다”」가 있다. 이 글에서 그는 극단적 양당제가 아닌 온건 다당제를 한국의 바람직한 정당구조로 제시했다.

최장집과 심상정이 얼마나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필자로서는 쉽게 알기 어렵다. 당장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사람 사이의 몇몇 연결고리밖에 없다. 최장집이 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나온 심상정을 “진보적인 정치인으로서 하나의 뛰어난 모델”이라며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이나, “이대근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최 교수의 제자이자 ‘최장집 사단’으로 통한다. 또한 최장집, 이대근 두 사람 모두 오랜 ‘심상정 지지자’로 진보진영과 관련해 ‘노동 중심’을 타이틀로 하는 ‘진보의 재구성’을 주장해왔다”는 『민중의 소리』의 기사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짐작케 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이 사용하는 용어와 그 용례가 동일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최장집이 주장하면, 그것을 정치인으로 실행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심상정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상 타당하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노사정 협조주의

최장집의 주장이 정말 한국 사회에 절실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심상정이 최장집을 따라가는 게 문제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최장집의 정치적 의도는 노동자를 포섭하여 체재 내화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한국사회에서 확립하는 것이다. 촛불민중에 의해 박근혜가 탄핵되어 기존의 지배질서가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안정적 지배질서를 시급히 재확립해야 하는 자본가계급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최장집이다.

최장집의 이러한 의도는 처음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는 87년 민주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국가-재벌 동맹이 여전하고 이로써 노동배제적 체제가 계속 유지되어 시장 경쟁과 사회로부터 배제된 “열패자”들이 급증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데 방점을 뒀다. 그리고 이런 체제가 아닌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 가야하고 노동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그의 중요한 논점이 드러난다. 우선 그는 이런 노동배제로 인한 “열패자”들의 이해가 “정당”이라는 매개를 통해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매개가 부재한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이는 정당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 민중의 불만과 저항이 대의 체제를 통해 걸러져 체제 내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보수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노동에 사회적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시장 경쟁의 열패자를 사회로 다시 통합하여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자본과 정권에게 탄압받고 판판히 깨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배제”를 비판하고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그의 주장은 일견 신선하게 들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시기 무렵부터 민주노총에서 “노동인권”, “노동존중”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일상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최장집의 주장은 노동운동 내에서도 알게 모르게 확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장집이 주장하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실체는 점차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주장을 처음 제기할 때는 주장의 속내를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제 말하고 싶은 바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촛불투쟁의 여파도 한 몫 했다. 촛불투쟁으로 지배질서가 흔들리자 이를 우려한 최장집 자신이 스스로의 계급적 입장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령 작년 11월 국회의 탄핵 추진이 주류 정치인의 장난질로 귀결될 것을 대다수 민중이 우려할 때, 최장집은 “거리·광장의 힘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어도 해결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정당과 국회에서 해야 한다”라는 논리로 국회에서의 탄핵 추진을 강하게 주장했다. 박근혜 탄핵 직후 중앙일보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적폐청산이 “전쟁이나 혁명의 언어지, 민주주의의 언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보수(실제는 수구세력)와의 협치를 주문했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 처지를 개선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노동자를 자본가와의 타협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은 3월 17일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 주최 시민대학 정치강좌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최장집은 “국가권력과 재벌대기업 간 동맹관계”가 한국 사회를 움직여왔다고 규정하지만, “재벌을 해체하라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정부정책을 통해 재벌이 “자율적이고 순기능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변화를 제시한다. 즉 “투쟁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획득하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 협력적인 노동운동으로 질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장집은 이것을 “코포라티즘(corporatism: 노·사·정 타협/협력주의)”이라고 정의하고, “한국사회에서 민주적 노사관계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억압하고 노동자를 탄압한 비스마르크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말해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노동자의 힘과 정치적 독자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전혀 아닌,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협력과 양보를 기본 전제로 하는 정치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가장 앞장 서서 주장하고 있는 정치인이 바로 심상정이다.

“온건 다당제”는 현상유지의 자유주의 지배질서 구축론

한편 최장집의 “온건 다당제” 주장은 위에서 말한 『한겨레21』 기사에 나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극단적 양당제”를 “온건 다당제 내지 다원적 정당체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전후 독일을 “온건 다당제”의 모범적 사례로 거론하면서, “온건 다당제”가 “완전히 개방된 정당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중심 정당이 안정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좀 더 보충하면, 최장집의 수제자로 알려진 후마니타스 출판사 대표 박상훈 역시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쓴 글에서 “한국의 정당정치를 “서로에 대한 잘못 때문에 존재하는 양극화된 체계”로 규정해왔는데, 이번 과정을 지켜보면서 “온건다당제로의 길”을 실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반드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은, 정말 한국사회에서 양극화된 양당제의 폐해가 심해 다양한 정치적 의견이 반영되는 다당제가 필요하다면 그냥 “다당제”라는 용어를 쓰면 될 것을, 왜 한사코 “온건”이라는 형용사가 포함되는 “온건 다당제”라는 용어를 쓰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건 다당제”라는 말을 쓸 때, 그 논자들은 단순히 3개 이상의 다양한 유력 정당들이 분립하는 정치체제 이상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려면 “온건 다당제”란 정치 용어가 어떻게 나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현대 정당론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탈리아 정치학자 지오반니 사르토리가 제시한 것이다. 최장집 등 한국의 논자들은 “온건 다당제”를 “양당제”와 대비하지만, 그의 책 『현대정당론』(동녘)을 살펴보면 사실 “양당제”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르토리에 따르면, “양당제”와 “온건적 다당제”는 서로 경쟁하는 양 정치세력이 교대로 집권하는 이원적 정치구도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르토리가 “온건 다당제”를 제시한 이유는 이와 다른 형태의 다당제인 “양극적, 극단적 다당제”와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이 양극적, 극단적 다당제를 먼저, 그리고 가장 상세하게 다룬다. “양극적, 극단적 다당제”의 특징은 바로 체제의 정당성을 잠식하는 적실성 있는 “반체제 정당”의 존재로, 이 경우 정당 구도는 집권 여당 외에 양대 ‘야당’(친체제 야당 및 반체제 야당)이 존재하는 3원적 구조를 갖는다.

사르토리는 정당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거리가 먼 이런 양극적 다당제가 “병인”이라고, 정치체제에서 건전한 상태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런 그의 평가는 그가 매우 보수적 정치이념을 지닌 정치학자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당시 자신의 모국인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유력정당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다. 반면 “온건 다당제”는 3개 이상의 적실성 있는 정당이 존재하지만 절대 다수를 확보하는 정당은 부재하며, 따라서 연립정부의 형성이 당연시된다. 그러나 다양한 정당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온건 다당제”는 양극적 구조를 지니며, 반체제 정당이 유력 야당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양극에 있는 정당(연합) 사이의 이데올로기 거리가 가깝고 각 정당들은 체제 구심적 경쟁을 하는 동일한 세계의 정당들이라는 게 사르토리의 설명이다.

[사진: 심상정 트위터 캡쳐]

이런 사르토리의 “온건 다당제” 설명을 통해 우리는 최장집이 어떤 의도에서 “온건 다당제”를 주장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체제를 뒤흔드는 제3의 정치세력이 나오지 못하게 하면서 지배질서를 인정하는 여러 주류 정당들이 서로 연립하면서 집권하는 정치체제를 확립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최장집이 자유주의 세력만이 아니라 탄핵에 찬성한 비박세력도 지배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온건 다당제”는 당장 집권 가능성이 없는 소수정당이 연정의 하위 파트너로 자신의 발언력을 극대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건 다당제”를 받아들이고 이를 적극 실현하려고 나선 순간, 그것은 자유주의적 지배질서 재편에 적극 동참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로써 “온건 다당제”를 주장하는 심상정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고, 그 질서 내에서 온순한 좌익 역할을 맡고자 할 뿐임을 알 수 있다.

마치며

지금까지, 심상정이 주장하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와 “온건 다당제”의 기원이 바로 최장집에 있다는 점, 그 내용은 노동자에게 일정정도 양보제스처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를 체제 내로 포섭하는 한편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세력의 등장은 막으면서 자유주의 중심의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로 노동자에게 유해한 것일 뿐 아니라 실현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다.

우선 심상정과 최장집의 주장은 노동자들이 겪는 여러 어려운 처지를 거론하지만, 노동자들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노동자들이 기성 정당들을 매개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은 그 정당들의 계급적 한계로 인해 어렵기 때문이다.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을 비정규직 해결로 보는 현 정권의 접근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무엇보다 노동자의 양보와 타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현실화되는 경우 자본가로부터 뭔가를 받아내려면 노동자도 내놔야 한다는 논리 하에 노동자의 처지를 악화시키는 정책과 협약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의 태반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된 결과 발생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주장들은 자본주의를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유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는 최근 프랑스 대선에서도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거리가 적은 중도 좌우 세력이 서로 교대로 정권을 잡아왔던 프랑스는 이런 지배질서가 뒤흔들리고 정치적 안정성이 약화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가 고조된 결과였고, 자본가들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최장집이 염려하는 극우 국민전선과 진보적 라 프랑스 앵수미즈의 부상으로 “극단적” 정당구조가 등장하고 있다. 극우세력의 부상은 경계하고 이에 맞서 치열히 싸워야 하겠지만, 진보적 세력의 부상은 쌍수 들고 환영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한국의 경우, 기성의 “온건”한 정당들은 그 계급적 속성상 자본주의 위기에서 비롯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그 결과 대중의 분노와 저항이 표출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심상정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급진화를 막는 역할까지 할 것이다.

이제 노동자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 “온건 다당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진정 바꿀 수 있고, 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악화시킨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급진적 정치이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바로 그러한 정치이다.

3 COMMENTS

  1. 소제목 – “온건 다당제”는 현상유주의 자유주의 지배질서 구축론 – 현상유주의가 아니라 현상유’지’주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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