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을 외면하는 삼성 ‘책임경영’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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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7일 삼성전자 임시주주총회에서 이재용이 등기이사로 선임되었다. 언론은 이제 이재용이 이사회에 참여할 공식적인 권한을 갖고 거기서 내린 결정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며 떠들썩했다.

그런데 원래부터 삼성을 국가경제의 버팀목으로 칭송해 왔던 우익 언론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진보언론들도 이제부터는 삼성에서 ‘책임경영’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감을 조성했다. 프레시안은 “책임경영 차원에서 이 부회장이 등기이사를 맡는 방안을 이사회에서 오랫동안 권유해왔다”는 삼성전자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고, 한겨레신문 안재승 논설위원은 「‘등기이사 이재용’ 앞에 놓인 과제들」이라는 칼럼에서 “이번 등기이사 선임 결정은 막강한 권한 행사에 상응해 법적 책임을 지게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라고 적었다. JTBC 뉴스도 「이재용 삼성전자 등기이사 선임 … “책임경영” 나선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반올림의 반대 목소리 외면한 이른바 ‘진보언론’

그리고 이런 이른바 ‘진보언론’ 중 어디도, 1년 넘게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반도체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요구하며 농성을 이어오고 있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과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노동자 생명과 인권을 짓밟는 탐욕의 제국 3대 세습을 멈춰라”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삼성전자 이재용 등기이사 선임을 반대하는 시민사회 기자회견 및 이어말하기’를 임시주주총회 장소 앞에서 진행했음을 보도하지 않았다.

삼성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으로 사망했다고 반올림에 제보된 숫자만 76명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영업비밀로 아무것도 공개를 하지 않고, 자료 하나 내놓지도 않고 있”다며 이종란 노무사가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한 것도, 삼성전자 기흥공장 LCD 사업부에서 6년간 일하다가 뇌종양에 걸린 피해자 한혜경 씨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삼성을 향해 절규한 것도 프레시안, 한겨레신문, JTBC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사회적으로 여론화됨에 따라 삼성은 2013년에 마지못해 반올림과의 교섭을 시작했다. 그런데 삼성은 2014년 10월 ‘조정위원회의 출범’을 자기들 마음대로 선포해 놓고 정작 2015년 7월에 그 조정위원회(반올림은 반대하다가 결국 2014년 12월부터 참여)가 조정권고안을 내자 또다시 그것을 거부한 채 사내 보상위원회를 꾸려 자기들 마음대로 보상을 하고 끝내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작년 10월 7일 반올림은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 대화 재개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으나 삼성은, 그리고 2014년부터 실질적으로 삼성의 경영권을 행사해 온 이재용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렇게 직업병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해 27일 반올림 등이 기자회견문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할 수 없어서 못한 일이 아니다.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다. 할 의지가 없어서, 책임지지 않으려 안한 일이다. 이재용이 등기이사로 선임되어도 삼성 내부에서, 그리고 정권에서 과연 이재용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자연스럽다.

그들이 이재용의 ‘책임경영’을 칭찬한 진짜 이유

그렇다면, 평소에는 삼성과 같은 재벌을 비판하고 노동운동, 시민운동에 우호적이던 ‘진보언론’들이 왜 이재용의 등기이사 선임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매우 상식적인 문제제기조차 외면하며 ‘책임경영’이라는 삼성의 선전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아무리 ‘진보언론’이라 해도 삼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어서, 무엇이 원칙인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만 보는 것은 사태의 절반만을 보는 것이다. 이 ‘진보언론’들은 원칙을 알면서도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그들의 원칙이란 바로 재벌개혁론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출자총액제한 등으로 삼성과 같은 재벌의 내부 지배구조를 개선하여 정상적인 자본주의 기업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은 재벌개혁 진영의 오랜 요구였다.” 재벌 총수라고 불리는 자들이 법적 책임 없이 기업 운영에서 권한만 행사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권한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서 그들의 경영권 행사를 관리하고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벌개혁 진영에서는 주장한다.

실제로 재벌개혁 진영의 주요 이론가인 김상조 교수가 현재 소장으로 있는 경제개혁연대에서는 이번 등기이사 선임 결정에 대해 “이재용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 여부는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선택으로 결정될 문제이지만, 이재용 부회장이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등기이사 지위에 공식 등재됨으로써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에 상응하는 법적 의무와 책임을 부담하게 되는 것은 책임경영의 차원에서 올바른 방향이라고 평가한다”라는 논평을 냈다. 경제개혁연대는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구)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가 참여연대로부터 분화하여 설립한 경제전문단체로서, 소액주주 권익보호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정부의 재벌·금융정책 감시 등 지난 1997년 이래 10년간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가 벌여온 활동을 보다 전문화하고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참여연대의 경우 이재용 등기이사 선임을 옹호한다고 밝힌 바는 없지만 27일 등기이사 선임 반대 기자회견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논의한 끝에 결국 불참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진보진영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재벌 총수가 등기이사를 맡는 것에 대해 ‘책임경영’이라는 의미를 인정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경제민주화’ 담론이 아직 인기를 끌던 2013년 2월 20일 경향신문은 「재벌 오너 등기이사 퇴진, 책임경영 회피 아닌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이사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재벌 오너들이 그동안 등기이사를 맡은 것은 책임경영을 위해서였다. 쥐꼬리만 한 지분을 갖고도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면서 등기이사조차 맡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 이들의 등기이사 퇴진은 책임경영원칙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논평했다.

재벌개혁론의 한계: 문제는 자본주의다

물론 재벌 총수들이 무소불위의 경영권을 휘두르면서도 잘못을 했을 때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빠져나가는 현실은 분노할 만하다. 반올림과 시민사회단체들도 이재용이 법적 책임을 지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삼성을 포함한 재벌이 주장하는 ‘책임경영’이 현실에서 과연 누구에 대한 어떤 책임을 의미하는지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삼성을 포함한 기업들이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기업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내기 위해 존재한다. 이윤을 내지 않고 본전만 찾을 것이라면 자본가가 굳이 공장과 기계 설비를 사서 생산을 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이렇듯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생산의 목적은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이다. 그런데 이윤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팔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가 임금으로 받는 양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도록 함으로써 나온다. 그런 생산과정이 더욱 확대되어 반복됨으로써 이윤이 축적되고, 그런 식으로 계속 자기증식하는 것이 자본이다. 그리고 여러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역설적으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초래했기 때문에 삼성과 같은 독점자본이 탄생하였다.

재벌개혁론자들이 보지 못하는, 혹은 보기를 거부하는 독점자본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자본을 자본으로 살아 있게 하는 엔진 자체가 착취이기 때문에 그 엔진을 돌려서 만든 이윤이 이재용과 소액주주들 사이에 분배되는 비율이 아무리 변화해도, 혹은 이재용이 경영을 잘못하여 이윤을 충분히 내지 못한 데 대한 법적 책임을 아무리 무겁게 져도, 혹은 심지어 이재용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삼성 이윤의 상당 부분을 NGO에 기부해도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당하는 착취는 그대로다.

그렇다면 이재용이 하겠다는 ‘책임경영’이 삼성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이나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영일 수는 없다. 자본가인 이재용에게 부여되는 책임은 오히려 노동자들을 더 철저하게 착취하고 소비자들을 더 열심히 수탈해서 이윤을 긁어모을 책임, 그렇게 해서 주주들에게도 이윤을 안정적으로 분배해 줄 책임이다.

결국 경제개혁연대 등이 ‘책임경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국 착취와 수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에 김상조 소장이 ‘소액주주운동’을 통해 소액주주들이 이윤을 많이 분배받도록 하는 것이 독점자본에 맞선 운동의 중요한 과제라는 식으로 주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있다. 재벌개혁론자들은 주관적으로는 재벌의 탐욕을 견제하려는 선의를 가졌을지 모르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추지 못했던 탓에 운동의 우선순위를 잘못 설정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했다.

결정적인 순간 올바른 편에 서기 위하여

지금 박근혜 정부와 자본가계급은 수세에 몰려 있다. 자본가들이 결코 피해자가 아니며 국가를 그야말로 자기들의 집행위원회로 활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권에 뇌물을 공여했다는 정황증거가 연일 드러나고 있다. 검찰조차도 삼성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이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을 때는 유족 황상기 씨에게 고작 500만원을 주면서 끝내자고 하던 삼성이 알고 보니 최순실을 통해 박근혜 정권에 200억 뇌물을 주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운동이 확대되는 상황일수록,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자본주의 체제의 동학에 대한 예리한 사상을 갖고 있어야 주어지는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재용 등기이사 선임에 대한 ‘진보언론’들의 반응은, 부정확한 이론에 휩쓸린 결과가 단순히 조금 부족하고 아쉬운 실천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재벌개혁론은 그들로 하여금 삼성의 편에 서서 반올림의 투쟁을 외면하도록 만든 것이다. 잘못된 이론과 단호하게 단절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임을 인식해야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올바른 편에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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