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n번방 사건: 디지털 성범죄가 사라지는 그 날까지, 지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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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그 방에 입장한 너흰 모두 살인자다.”

이 문구는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포스터에 쓰였던 슬로건이다. 슬로건의 강력한 어조에서 알 수 있듯,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되어 있었던 여성들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텔레그램 n번방 대응의 주역인 여성들의 힘 있는 움직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74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해킹하고 협박하여 폭력적인 성적 영상을 찍도록 강요하거나 실제로 만나 엽기적인 수준의 성폭행을 저지르고, 이를 해외 모바일 메신저인 텔레그램 내 비밀단체방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유, 판매한 사건을 말한다. 텔레그램 n번방의 존재는 2019년 11월말 보도된 『한겨레』 기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었는데, 가해자들의 끔찍한 범죄행태에 분노한 여성들은 발 빠르게 힘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보도가 나오고 며칠 뒤인 12월 초, 하루에도 수십 개씩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텔레그램 단체방을 찾아내 신고하는 프로젝트팀 ‘ReSET(리셋)’이 꾸려졌다. 디지털 성범죄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집회 기획을 위해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촉구시위)’ sns계정도 만들어졌다.

리셋팀은 지난 1월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등록하고,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달성을 위한 동시검색 총공격 운동, ‘#n번방_사건’, ‘#n번방_이슈화’ 등의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공론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30일 만에 10만 명의 실명 동의를 얻으며 최초로 제출된 국회 청원 1호가 되었고, 이는 n번방 사건에 대한 공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0만 명의 동의를 눈으로 확인한 여성들은 더욱 힘을 얻었다. ‘텔레그램 성착취 대응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출범하면서 sns 밖에서도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3월 7일에 예정되어 있던 촉구시위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로 잠정 연기하게 되었지만, 기자회견, 성명서 등의 형태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n번방_가입자전원처벌’, ‘#n번방_디지털성범죄_수익_국고환수’와 같은 해시태그 운동에도 박차가 가해지며 실시간 트위터 검색어에 n번방 검색어가 수시로 오르내렸다. 이렇듯 여성들이 보인 강한 의지의 영향으로 3월 17일, 텔레그램 단체방 중 하나인 ‘박사방’의 운영자 ‘박사’(아이디명)가 빠르게 검거됐다.

이후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청원이 짧은 시간에 200만 명이 넘는 폭발적인 수의 동의를 얻었고, ‘박사’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아이디명이 ‘갓갓’인 운영자만 제외하고 ‘태평양’, ‘와치맨’ 등 텔레그램방 핵심 운영자들도 속속 검거되었다.

11일에 예정되어 있던 집회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를 위해 또 한 차례 연기되었으나, 기자회견 등의 크고 작은 오프라인 활동과 함께 온라인상에서도 n번방 사건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홈페이지가 열리고, 매일 새로운 해시태그를 만들어내고 꾸준히 실시간 검색어 총공격을 하고 있다. 사건이 시작된 지 4개월가량이 지났으나 여성들은 여전히 n번방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 채 싸우고 있다.

이전의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 ‘웹하드 카르텔’과 ‘버닝썬 게이트’로 드러난 성범죄 수익구조와 여성차별적 문화

여성들이 n번방 사건에 빠르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n번방 사건이 크게 이슈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근 몇 년간 발생한 굵직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의 영향이 있다. 이전까지 디지털 성범죄는 불순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올린 ‘리벤지 포르노’ 수준으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2018년 12월에 발생한 ‘웹하드카르텔 사건’으로 불법촬영물이 수익 창출을 위해 구조적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디지털 성범죄의 추잡한 수익구조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2018년 12월, ‘웹하드카르텔 사건’이 시작됐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가 ‘위디스크’와 ‘파일노리’를 비롯한 웹하드 업체를 음란물 유포죄로 고발하면서 이 사건은 시작됐다. 위디스크의 실소유주 양진호가 직원들에게 저지른 폭력행위가 드러났고, 뒤이어 불법촬영물 유통의 수익구조가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얽혀있다는 사실이 줄줄이 밝혀졌다. 몇몇 ‘헤비업로더’와 웹하드 업체, 필터링 업체, 디지털 장의업체가 유착해 만들어진 카르텔 속에서, 여성의 동의 없이 촬영된 불법촬영물이 막대한 수익을 뽑아내는 ‘황금알 낳는 거위’로 기능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여성들은 촬영물이 피해자는 새까맣게 모른 채 불법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다. 한사성,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의 여성단체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단지 양진호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켜서는 안 되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로 똑바로 봐야 한다고 강력히 지적했다. 디지털 성범죄가 단지 몇 명의 개인 ‘악마’들에 의한 게 아니라 수익을 뽑아내는 구조 자체에서 비롯한 것임을 똑똑히 인지하고 이를 정면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버닝썬 게이트’가 열렸다. 아이돌 가수 승리를 비롯해 정준영, 최종훈 등 일명 ‘승리 카톡방’에 들어있던 남성 연예인들의 성폭행 범죄행위와 불법촬영물 촬영 및 유포행위가 폭로되고, 이어서 아이돌 가수 승리가 이사로 있었던 클럽 버닝썬이 성폭력, 마약, 성매매 알선, 불법촬영물의 온상이었으며, 공권력과의 유착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웹하드 카르텔 사건으로 이미 대규모 성범죄의 이면에 크고 작은 수익구조가 견고히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여성들은 승리, 정준영에 대한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버닝썬을 비롯해 클럽의 성폭력 문화 전반에 대한 광역 수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150여명의 대규모 인력이 투여된 수사결과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클럽 내 성폭력 문제는 다뤄지지도 않고, 클럽들은 멀쩡히 운영을 이어갔다.

성산업의 추악한 구조를 무너뜨리고, 성차별적 문화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한다고 요구한 여성들의 절박한 외침을 들은 척도 않은 듯 한 수사태도에 여성들은 단단히 화가 났다. 2019년 5월 강남역 버닝썬 앞에서 열린 ‘버닝썬 게이트 규탄시위’와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열린 ‘버닝썬 수사결과 규탄 기자회견’ 등에서 여성들은 소리 높여 철저한 조사, 관련자 강력처벌을 외치고, ‘여성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여성차별적인 문화 자체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고 강력히 말했다. 버닝썬 게이트과 같은 사건의 배경에는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심각한 성차별적 문화가 사회에 자리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수사 역시 행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일련의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배후에 언론의 주목을 받은 몇몇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선 불법촬영물 수익 구조가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여성들은 그런 사건들을 거치며 불법촬영물 수익 구조뿐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여성차별적 문화 자체를 폭로하며 투쟁해 왔다. 바로 이렇게 쌓인 여성들의 투쟁 의지가 지금 n번방 사건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절박한 요구대로, 여성을 상품처럼 취급하여 돈을 벌어들인 추악한 n번방 관련자, 그리고 그 방에 가입한 26만 명의 가입자들은 모두 강력히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끝까지 밀어붙이자. 디지털 성범죄가 사라지는 그 날까지

여성들은 절박하다. 특히 미투 운동 등을 거치고, 그간의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을 지켜본 20, 30대 여성들은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절박함과 더불어 여성들은 스스로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문제에 맞서 당당히 싸웠다. 여성들이 앞장서서 보였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차별 문화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하고 있음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텔레그램 단체방 가입자를 단순합산하면 무려 26만명이나 된다는 사실도, 운영자 중 다수가 10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도 모두 이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근거가 된다.

‘끝까지 지켜본다’라는 말이 최근 n번방 해쉬태그와 함께 종종 눈에 띈다. 몇 년간의 경험으로 싸움이 길게 이어질 것을 직감한 사람들이 이 사건을 잊지 말고, 지치지 않으면서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의도에서 덧붙이는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강력 처벌을 위해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여성차별적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 사회주의자들 역시 힘껏 싸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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