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월 8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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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istory.com/this-day-in-history/february-revolution-begins-in-russia

매년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구글은 거의 매년 그랬듯이 올해도 아마 그날 메인 로고를 바꿀 것이다. 작년 세계 여성의 날에 페이스북은 각국의 여성 기업가들을 선발하여 마케팅, 고객관리 기법 교육 등의 지원을 제공하는 ‘#SheMeansBusiness’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2016년 10월에 한국이 14번째 론칭 국가가 되었다. 랑콤(Lancôme) 같은 뷰티 상품 브랜드에서는 2016년 3월 8일 강남에서 “여성의 행복을 응원하는 취지에서 국내 유명 아티스트들이 모여 여성들에게 감미로운 하루를 선물하는 자리”인 ‘우먼스 데이(Women’s Day)’ 콘서트를 열었으며, 당일 매장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여성 고객들에게 생화를 선물하고 VIP 고객에게 ‘핑크 행복 키트’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여성 자본가나 여성 소비자가 기업들에게 축하를 받는 풍경이 여성의 날의 전부는 아니다. 지난 1월 21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맞추어 여성, 원주인, 이민자, 성소수자, 유색인종 인권을 외치는 대규모(워싱턴 기준 50만 명) 행진을 조직했던 여성행진(Women’s March)이 여성 총파업(A Day Without Women)을 예고했는데,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추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3월 4일 “드로잉퍼포먼스, 1인 1피켓 페미의 요구로 광장 채우기, 페미인권법률상담소, 자유발언, 플래시몹” 등의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페미니스트 광장”을, 8일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모토로 제33대 한국여성대회 기념식과 대선후보 초청 성평등 정책토크를 열겠다고 밝혔다.

워싱턴에서 있었던 여성 행진은 ‘상호교차성’에 대한 여성운동 내의 치열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한국여성대회 슬로건은 박근혜 퇴진 촛불 속에 있었던 성차별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문제제기를 계속하면서도 촛불 역시 계속 들었던 페미니스트들의 존재를 다시 상기시킨다. 이는 분명 희망적이며, 2014년 3월 레베카 윈슨(Rebecca Winson)이 “세계 여성의 날은 페미니즘이 빈민과 연계를 맺는 데 실패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쓴 것이 다소 지나쳐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8일에 대해 우리가 여전히 잊고 있는 것이 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 1857년? 1908년?

한국여성대회 블로그는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에 대해 “1908년 3월 8일 미국의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뉴욕의 루트거스 광장에서 모여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 1908년 3월 8일 전 의류노동자들의 시위를 계기로 매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선정하였고 그 이후부터 세계 곳곳에서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펼쳐오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여는 전국여성노동자대회 역시 올해를 “109주년 세계 여성의 날 기념” 대회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08년이 시작임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루트거스 광장’을 넘어서 – 3.8 세계여성의 날의 복합적 기원과 한국의 수용 맥락」(신상숙, 페미니즘연구 제10권 1호(2010): 159-198)에 따르면 프랑스,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는 그보다 더 이른 1857년에서 기원을 찾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1857년 3월 8일 미국 뉴욕에서 섬유 산업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으나 경찰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 당했고, 50년 후인 1907년 뉴욕의 섬유 산업 여성 노동자들이 그때를 기념하는 집회를 다시 연 것이 바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라는 것이다.

하지만 템마 카플란(Temma Kaplan)의 1985년 연구 「세계 여성의 날의 사회주의적 기원에 대해(On the Socialist Origins of International Women’s Day)」(Feminist Studies 11, No. 1, pp. 163-171)에 따르면 “두 사건 다 일어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많은 유럽인들은 1907년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의 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신상숙(2010)의 연구 역시, 1908년 3월 8일 러트거스 광장에서 일어났다는 섬유 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집회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나 근거가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기획하고 조직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날짜는 언제부터 3월 8일로 고정된 것일까? 여기에 답하는 과정은 3월 8일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지금은 많은 부분 지워져버린,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가리킨다.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해마다 여성의 날을 개최한다.”

1907년이나 1908년 러트거스 광장의 여성 노동자 시위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무렵에 미국 사회당이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집회를 조직했던 것은 사실이다. 1908년 2월 뉴욕에선 총 1,000여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행진을 했고, 여성도 있었지만 남성이 다수였다고 한다(신상숙, 같은 글, 2010). 그해 12월 미국 사회당 전국여성위원회는 다음해 2월 마지막 일요일을 ‘전국 여성의 날’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1909년 2월 28일 미국 사회당이 개최한 전국 여성의 날 집회와 시위가 역사적으로 확인 가능한, 최초의 (일국 차원의) 여성의 날 행사였다(신상숙, 위의 글, 2010;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 여성의 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2015).

더 나아가, 일국 차원이 아닌 ‘세계’ 여성의 날을 처음 조직한 것 역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1909년 11월 미국 뉴욕에서는 ‘2만 명의 봉기’라고까지 불린, 여성 섬유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13주나 지속되었다. 이는 1910년 8월 제2인터내셔널 여성 사회주의자 협의회에서 루이즈 지에츠(Luise Zietz)가 각국 사회주의 정당이 ‘여성의 날’을 국제적으로 기념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클라라 체트킨이 이를 재청했고 독일사회당의 여성지 『평등(Die Gleichheit)』지에 결정사항이 다음과 같이 게재되었다.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적 조직들, 정치조직들, 노동조합 조직들과의 의견 일치 하에서, 해마다 여성의 날을 개최한다. 이 날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여성선거권 쟁취에 협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요구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따라 모든 여성들의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여성의 날은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될 것이며 신중히 준비되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최초로 기획된 세계 여성의 날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유럽 국가들에서 1911년 3월 19일에 집회와 시위의 형태로 개최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문서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당의 존재는 아예 지워지다시피 했고, 클라라 체트킨과 제2인터내셔널은 종종 언급되지만 충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확인조차 불가능한 미국 뉴욕의 여성 노동자 투쟁이 3월 8일의 기원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대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와 그들의 길은 이미 갈라졌다

템마 카플란의 글 앞에 짧은 주석을 쓴 클레어 모세스(Claire G. Moses)는 1857년 기원설이 1950년대에 만들어진 신화(myth)임을 처음 제시한 프랑스 페미니즘 연구자들을 인용하여 그 동기를 “볼셰비즘보다 더 오래되고, 당의 산하에 있는 여성들의 주도나 당대회 결정보다 더 자생적인 기원을 부여하기 위해 세계 여성의 날을 소비에트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반공주의가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겠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여성운동에 대한 부정적 편견의 역사,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 여성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들과 다른 결의 목소리를 내며 그런 편견을 반박해 온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3년 2월, 러시아에서 첫 여성의 날 행사가 열리기 1주일쯤 전에 콜론타이는 여성의 날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여성 노동자만 이렇게 따로 취급하는가? 왜 별개의 ‘여성의 날’, 노동 여성을 위한 별개의 유인물, 회의 그리고 노동계급 여성의 협의회인가? 이것은 결국엔 페미니스트들과 부르주아 참정권론자들(suffragettes)에 대한 굴복이 아닌가? 사회주의자 여성들의 운동과 부르주아 참정권론자들(suffragettes)의 운동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중략)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 권리를 얻으려고 분투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의 길은 갈라진다. 부르주아 여성들에게, 정치적 권리는 그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위에 세워진 세상에서 보다 편안하게 그리고 보다 안정적으로 출세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일 뿐이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권리는 그토록 바라는 노동의 왕국으로 이끄는 험난하고 힘든 길로 가는 발걸음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따라가는 길과 부르주아 참정권론자들이 따라가는 길은 이미 갈라진 지 오래되었다. 삶이 그들 앞에 놓은 목표들 사이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여성 노동자와 여성 사장, 하녀와 그 여주인의 이해관계 사이에는 너무 큰 모순이 있다. 그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접점도, 화해도, 통일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성 노동자들은 별개의 여성의 날도,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별개의 협의회도, 그들의 별개의 언론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입장은 그때도 소수파였다. 토니 클리프의 『여성해방과 혁명』에 따르면, 여성진보당의 중심적 인물 마리아 이바노브나 포크로프스카야(Dr Maria Ivanovna Pokrovskaia)는 1913년 여성의 날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고 한다.

예상했던 대로 여성 노동자의 날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아내가 차지하는 종속적 지위에 대해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자본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노예화에 대해 말했고 그저 지나가는 말로 가정 내의 굴종을 언급했을 뿐이다. … 여성 노동자에게 경제적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 쿠젤리 부인은 틀렸다.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 (토니 클리프, 『여성해방과 혁명』)

포크로프스카야는 “오늘날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노동 인민이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노동계급 내부에서 남성과 여성이 단결할 수 없으며 단결을 위한 시도는 여성의 종속을 낳을 뿐이라고 확고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다. 예컨대 파업에 대해서도 그는 “우리는 묻고 싶다. 누가 파업의 부담을 가장 많이 지는가? 바로 아내이자 어머니이다”라고 말하며 파업에 반대했다. 그리고 1908년 12월 제1차 전러시아여성대회(자유주의 계열 여성 단체들이 통합하여 하나의 전국 조직을 출범시키려는 목적으로 개최)의 구호 역시 “여성운동은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모든 여성을 위한 운동이어야 한다”였다. 선전을 위해 참여한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계급을 지워버리고 ‘모든 여성’을 이야기하는 순간 착취라는 계급적 억압을 받는 여성은 목소리를 빼앗기게 된다는 점을 폭로했다.

대회가 끝난 후 조직위원회는 호화 음식점에서 연회를 마련했다. 연회가 열리던 중 한 볼셰비키 여성이 끼어들어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식탁에는 왜 노동 여성, 농민 여성, 하녀가 없습니까?” (토니 클리프, 앞의 책)

이런 상황이었기에, 몇 년 후에 러시아에서 열린 첫 세계 여성의 날 행사도 결코 평화롭게 치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경찰의 탄압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적 여성운동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주류적 서술은 단순히 사회주의자들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미국 사회당,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역할을 축소한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여성운동은 하나가 아니었고 “여성 노동자와 여성 사장, 하녀와 그 여주인의 이해관계”가 그 안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사실을 감추기 위에 미국 사회당,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존재는 주변화되어야 했던 것이다.

3월 8일로 역사에 남다: 1917년 2월 혁명

1910년에 제2인터내셔널 여성 사회주의자 협의회에서 세계 여성의 날을 정했을 때 3월 8일이라는 날짜를 고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상숙(2010)에 따르면 “초기의 여성의 날은 노동일과 마찰을 빚지 않는 방식으로 정해졌으며, 이는 여성의 날의 국제화와 정례화가 진행되었어도 3.8의 날짜가 고정되거나 상징성이 부각되지 않았”다고 한다. 1911년 유럽에서도 3월 8일이 아니라 3월 19일에 행사가 개최되었다. 3월 8일이라는 날짜가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어난,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었다.

차르를 퇴위시킨 2월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 다름 아닌, 페트로그라드에서 “빵과 평화”를 외치며 파업을 시작하고 다른 공장으로까지 파업의 물결을 확산시킨 섬유 산업 여성 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에는 여성들이 오히려 더욱 용감하게 군인들에게 다가가 총을 내려놓고 혁명에 동참하라고 설득하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들과 아무 상관없이 순전히 ‘자생적’으로 혁명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은 마치 ‘러트거스 광장에서 자생적으로 들고 일어난 1만 5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의 날의 기원이었다’라는 주장만큼이나 일면적일 수 있다. 「2월의 잊혀진 전위 – 러시아의 자생적 혁명이라는 신화(February’s forgotten vanguard – The myth of Russia’s spontaneous revolution)」라는 글에서 제이슨 야노비츠(Jason Yanowiz)는 여성 노동자들이 나선 혁명의 첫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왜 여성 노동자들은 나서기 위해 2월 23일[인용자: 러시아 구력 기준]까지 기다려야 했을까?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보다 큰 계획의 일부분이었다. 그날은 1910년에 클라라 체트킨이 처음으로 제안했던 사회주의 기념일인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 2월 23일 아침, 한 경찰관이 여성의 날을 기리기 위한 파업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있던 ‘메츠라욘카’(Mezhrayonka) 조직원 한 명을 체포했다. 기록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짐작건대 전체적 선동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 일반적으로 유인물 배포는 아무 때나 충동적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었다. 몇 시간 후, 5개의 섬유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페트로그라드의 전통에 따라 다른 노동자들을 부르러 근처의 공장들로 향했다. 왜 이 여성들이었는가? 그들은 전쟁 동안 파업에 참여했던 극소수의 섬유 산업 노동자들 중 일부였다. 그 전날 그들은 세계 여성의 날의 의미에 대한 학습 모임으로 볼셰비키들 몇 명을 만났던 것이다. … 한 볼셰비키 노동자 … 는 다음과 같은 광경을 회상했다. “2월 23일 아침 우리 부서의 창문에서 보이는 길가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쟁을 끝장내자! 고물가를 끝장내자! 굶주림을 끝장내자! 노동자에게 빵을 달라! …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거리를 메웠고 그들의 분위기는 전투적이었다. 우리를 본 그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나와요! 작업 중단!’이라고 외쳤다. 창문으로 눈덩이가 날아들어왔다. 우리는 집회에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 입구 근처의 주요 사무실에서 간단한 회의를 했고 우리는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원래 볼셰비키의 계획은 5월 1일 메이데이에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작업장에서 활동하던 볼셰비키 당원들은 판단을 신속하게 바꿨고 회의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에 함께 하자고, 거리로 나가자고 다른 노동자들을 설득했다. 물론 폴 다마토(Paul D’Amato)가 반론 글에서 지적했듯이 1917년 2월 혁명은 10월 혁명과 비교해 볼 때 당 중앙의 계획, 지도의 비중이 훨씬 적었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매순간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여 혁명을 이끌고 나갔던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이 그날 그런 방식으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야겠다는 선택을 한 순간, 그들의 외침을 들은 사회주의자들이나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에 함께 하는 것이 맞는 판단이라고 느낀 순간, 그들의 설득을 들은 동료 노동자들이 거기에 응하여 함께 거리에 나가기를 선택한 순간 등 혁명의 매 순간마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몇 십 년 동안 해 온 노력이 집약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 여성의 날을 기획하고 조직한 체트킨의 실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공격 속에서도 계속 여성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정치의 주체로 조직화한 콜론타이 등의 실천이 거기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런 실천들이 있었기에 1917년 세계 여성의 날에 2월 혁명이 시작될 수 있었고, 이후 1921년 6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회 코민테른 여성회의는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나라들이 날짜를 3월 8일로 통일하여 함께 기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22년부터는 3월 8일이란 날짜에 맞추어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관행이 국제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신상숙, 앞의 글, 2010).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코민테른 여성 서기국의 주요한 사업 중 하나였고, 이 날을 만든 주역인 클라라 체트킨이 서기장을 맡았다. 냉전 하에서 세계 여성의 날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카플란(1985)에 따르면 미국에서 여성운동이 이를 다시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이라고 하는데, 과거에 미국 공산당원이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에 이 기념일의 존재를 들어 볼 기회를 가졌던 젊은이들로 구성된, 일리노이 대학의 여성 그룹이 부활시켰다고 한다. UN이 세계 여성의 날을 공식 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1975년이 되어서였다.

3월 8일의 역사,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평등을 갈망하는 모든 여성은 그가 지주든 농민이든, 공장주의 아내이든 노동 여성이든, 특권층이든 아니든 페미니스트로 불려야 한다. (포크로프스카야 /토니 클리프, 『여성해방과 혁명』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다른 여성들도 노력만 하면 자기처럼 유리천장을 깨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하는 여성 자본가는 아무리 자기가 평등을 갈망한다고 주장할지라도, 이미 ‘평등’이라는 가치의 반대편에서 착취당하는 다른 여성들을 밟고 서 있는 것이다. 세계 여성의 날은 그렇게 짓밟히던 여성들이 진짜 평등과 해방을 위해 일어서는 날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기에, 그런 여성들 속에 사회주의자들이 있었고 사회주의자들 속에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일견 ‘자생적’으로 보이는 1917년 2월 혁명이 가능했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은 사회주의자들과 그런 여성들을 다시 떼어놓기 위해,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에서 어떻게든 사회주의 운동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3월 8일의 역사를 다시 찾는 것은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되찾는 일인 동시에,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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