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고

6
2418
[사진: 사회주의자]

[기획연재: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발간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사회주의자』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억압에 반대하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추구하기에, 여성억압 문제나 생태 문제 등에 대한 분석 기사들을 꾸준히 실어 왔다. 본 연재 기획도 그런 실천의 일환으로, 이제까지 널리 읽혔거나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페미니즘 도서들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읽고 비평해 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보수 세력의 공격과 비난이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성억압적 사고와 실천을 온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평보다는 경청이 먼저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고민 끝에 서평 연재를 기획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지금까지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오빠는 필요없다』(전희경)의 서평을 연재했다. 이번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마리아 미즈)를 검토한다.

이 기사는 기획연재의 마지막 기사이다. 지금까지 연재 기사를 애독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 풍부한 내용으로 채워진 기사를 생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할 예정이다.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연재 기획팀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은 1986년에 처음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지침서로 읽히고 있다. 1998년에 개정판이 나오고, 2014년에 한국에서 재출간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는 올해 7월에 “4인의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책 4권을 선정하여 ‘페미니즘학교 2017 여름 특강’을 개최했는데, 그 중에 미즈의 이 책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은 여성의 빈곤이나 노동을 의제로 삼는 페미니즘 운동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예컨대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는 한 강연에서 미즈를 인용하여 여성 노동자가 겪는 삼중의 ‘착취’(남성에 의한 것, 가정주부로서 겪는 자본에 의한 것, 임금노동자로서 겪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꾸준히 읽히는 현상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의식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제는, 미즈가 생산관계 속에서의 착취를 경시하고 생산관계 외부의 약탈만으로 여성억압의 기원과 양상을 설명하고, 남성 노동자들도 여성억압에 대해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잘못된 전제 하에서 자본주의와 동등한 위상의 ‘가부장제’ 개념을 설정하는 한, 자본주의를 넘어설 길은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마리아 미즈의 주장: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약탈이다

미즈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체제는 여성을 ‘가정주부화’하고 식민지를 약탈함으로써 남성 및 자본가들이 물질적 이익을 얻고 자본이 축적되는 체제이다.

‘가정주부화’란 여성을 말 그대로 가정주부로 만든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성들이 실제로는 임노동자로서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생계부양자인데도 ‘여자는 가정주부이다’라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남성들 역시 여성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쫓아내서 안정된 일자리를 독점하고 집 안에서 자기 아내의 무급노동을 이용하고, (제3세계의 경우) 자기 아내가 벌어오는 소득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가정주부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다른 많은 여성주의자들처럼 미즈는 이런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를 생물학적 성별 분업에서 찾는 듯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성별 분업은 남성이 자연과 맺는 약탈과 폭력의 관계가 여성을 대상으로도 똑같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남성-사냥꾼’, ‘사냥꾼/전사’ 패러다임은 자연을 지배하고 약탈할 대상으로 여기며 식민지를 만들고, 여성을 억압하며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미즈는 자본주의에서든 사회주의에서든 외부 식민지나 여성에 대한 수탈 없이 생산력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미즈는 기본적으로 생산력 발전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자고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국제노동분업이 폐지된 가운데 “지역 산업은 지역 시장을 위한 생산을” 하고 “모두가 삶을 생산하기 위해, 혹은 자급을 위해 일해야” 하는 자급적, 자립적인 경제이다. 이러한 자급적 경제로 이행하는 방법은 서구 여성들의 소비자해방운동과 제3세계 여성들의 생산해방운동인데, 전자는 윤리적 소비, 노동탄압 등을 자행하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보이콧 등을 의미하고, 후자는 “자신의 토지와 자급적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남성의 폭력과 약탈이 여성억압의 기원이다?

미즈는 여성억압의 기원부터 자본주의에서의 축적, 심지어 생산력 발전 그 자체를 약탈과 폭력 등의 경제외적 강제로만 설명하려 하는데, 이 점은 성별노동분업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드러난다. 성별노동분업의 사회적 기원을 설명하는 제2장에서, 미즈는 여성이 “채집자와 초기 경작자로서의 우월한 경제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서열이 있고 착취적인 남녀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막지 못한 이유를 질문한 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먼저 여성이 농업에 사용한 도구와는 달리 남성이 사냥에 사용한 도구는 살상 무기로서의 성격도 동시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약탈적인 생산양식의 착취적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미즈에 따르면 남성들은 “생존을 위해 …… 여성의 자급적 생산에 계속 의존”해야만 했다. 그런데 목축이 시작되면서, 남성들은 더 이상 여성들의 생산 활동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여성들을 출산 기계로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미즈는 목축민이 수컷과 암컷을 교배시키는 것과 “여성을 납치 강간하고, 부계를 따라 후손과 상속이 이어지도록 가부장제를 수립”한 것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가축과 여성을 길들인 목축유목민이 농사짓는 공동체를 공격하면서” 위에서 말한 “착취적 잠재성”이 실현될 수 있었다고 한다.

미즈는 “결론적으로, 불균형한 성별노동분업은 이런 약탈적 생산양식 혹은 전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남성이 강제 수단, 즉 무기를 독점하고, 이를 통해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한 것이다. 이를 통해 양성 간의 영구적인 착취와 지배 관계가 만들어졌고 유지되어 왔다”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인류학적으로 타당한지 의문일 뿐 아니라 설사 미즈가 말하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통한 노예화나, 목축유목민에 의한 농경민의 약탈 비중이 컸다고 가정하더라도, 왜, 어떤 맥락과 동기에서 그 남성들과 그 목축유목민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수렵채집 사회 및 초기농업 사회까지도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고, 평등을 지향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미즈의 설명에서 왜 남성들은 여성들과 평등하게 살 생각을 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여성들을 출산 기계로 이용하거나, 노예로 만들려 하는 것일까? 수렵 도구와 목축이 언급되지만,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런 것들은 그저 남성들에게 잠재된 모종의 ‘본능’ 실현을 도와주는 계기에 불과하며 그 ‘본능’이 어디에서 왜 왔는지는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남성이 원래 약탈 본능을 갖고 있다는 미즈의 관점은 그가 “남성의 생산성”과 “여성의 생산성”이라는 개념을 설정하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남성은 자연과의 관계를 맺을 때 도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연을 지배하려 들고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통해 도구 없이도 자연과 관계를 맺을 수 있기에 자연과 협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는 물질적 재화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임신과 출산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해당 인간 집단이 자연과 맺는 관계 전부를 그런 식으로 결정지을 수는 없다.

물질적 재화 생산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면, 여성억압의 근원은 생산의 발전으로 인해 쟁기나 가축을 이용한 중농업이 등장하면서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예전만큼 기여하지 못하게 되어 성별분업의 성격이 억압적으로 변화했다는 데 있고, 계급의 출현은 이러한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맑스주의적 입장에 선다면 여성억압은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남성의 약탈 본능 같은 자의적인 요인에 의존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의 저울을 기울이는 것은 약탈이 아니라 착취다

미즈는 이렇게 물질적 재화 생산의 선차성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 변화를 고찰하기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입각해서 세상을 본다. 그 결과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까지도 “약탈적인 사냥꾼/전사의 사회적 패러다임”에 기초해 있다는 주장이 도출되고, 어느새 지배계급 집단과 남성 집단이 동일시되기도 한다.

오늘날 전세계가 자본축적의 엄명 아래 불평등한 하나의 노동분업 시스템으로 구조화된 단계까지 와 있다. 이 불평등한 노동분업은 약탈적인 사냥꾼/전사의 사회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다. 사냥꾼/전사는 자신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무기를 이용해 다른 생산자의 생산력과 생산품을 전유하고 종속시킬 수 있는 이들이다. 이런 착취적이고 쥐어짜내는,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는 가장 먼저 남성과 여성, 남성과 자연 사이에서 수립되었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다른 모든 가부장적 생산양식의 모델로 남았다. 자본주의는 이를 가장 정교하고 가장 보편화된 형태로 발전시켰다. (171쪽)

그러면서 미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각종 폭력의 존재를 근거로, “페미니스트가 하는 것처럼, 이른바 사적 영역을 경제와 정치 영역에 포함시킨다면, 자본주의가 모든 경제외적 강제를 경제적 강제로 변화시켰다고 하는, 맑스주의자들이 하는 주장은 견지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맑스주의에서 자본주의를 미즈와 다르게 분석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자들은 경제외적 강제가 사라졌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국가를 비롯한 여러 억압기제는 자본주의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앞서 존재했던 생산양식들과 달리 노동자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강제가 중심기제가 되었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힘, 추동력은 물질적 재화 생산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 역시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계급과 직접생산자인 노동자계급이 생산과정에서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즉 착취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중심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런데 미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남성의 “약탈적인 사냥꾼/전사의 사회적 패러다임”의 결과로 설명하는 비합리적 태도를 보인다. 이런 식으로 페미니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경우는 미즈만이 아니다. 실비아 페데리치도 잘 알려진 책 『캘리번과 마녀』에서 유사한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맑스주의 정치학자 질 도베(Gilles Dauvé)가 「페데리치 대 맑스(Federici versus Marx)」라는 글에서 논평한 바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페데리치가 자본축적 과정에서 강탈(dispossession)을 생산과정 내 착취보다 중요하게 보는 것에 대해, 도베는 17세기에는 인도산 면직물이 영국에 대량 수출되어 영국이 보호관세로 대응하였지만, 19세기 중엽부터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저렴한 면직물 상품을 인도에 대량 수출하여 인도의 산업을 고사시킬 수 있었던 사례를 들며 “문제는 무엇이 역사의 저울을 기울이느냐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역사가 단일 원인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국가들이 부상한 주된 추동력은 수백만 명을 생산적 노동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페데리치는 강탈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농민들로부터 그들의 토지를, 마을 구성원들로부터 그들의 공동체적 관계를, 그리고 여성으로부터 그들의 손재주와 기술을 강탈하는 것은 소극적 조건 즉 불충분하지만 필수적인 조건일 따름이었다. 『캘리번과 마녀』는 본질적인 “추진” 요인을 빠뜨렸다는 흠이 있다.

이러한 비판은 큰 틀에서 미즈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약탈은 물론 존재하지만,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엔진은 약탈이 아니고 생산과정에서의 착취이다.

남성은 여성을 ‘착취’하지 않는다

한편 미즈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착취’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착취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즈는 “우리가 남녀관계를 말할 때 착취를 말하지 않는다면 억압과 종속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공중에 붕 뜬 것이 될 것이다. 얻는 것이 없다면 왜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착취라는 용어를 여남 관계에 사용함으로써, 미즈는 ‘자본가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전체를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할 수 없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듯이, 남성도 여성억압에 대해 그 정도로 강한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고 보긴 어렵다. 미즈는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을 ‘가정주부화’함으로써 첫 번째로 일자리를 독점할 수 있고 두 번째로 “가족 내 모든 현금 소득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으므로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둘 중 어느 것도 자본주의와 동등한 위상의 ‘가부장제’라는 체제를 설정하고 남성이 여성을 ‘착취’한다고 규정하는 것을 정당화할 만한 물질적 이해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는 사업장에서 자본가가 이윤 회복을 위한 비용 절감 조치를 취하려 할 때, 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해고될 경우 얻는 것이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삭감될 경우 얻는 것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두 집단이 상대방 집단의 해고나 임금삭감에 대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즈가 위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이익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노동자-자본가의 계급관계에 준하는 관계로 보고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동등한 위상의 ‘가부장제’에 맞선 투쟁을 설정하는 것이 정당화되려면, 자본가를 설득하여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그만두도록 할 방법이 없듯이 남성을 설득하여 여성억압을 그만두도록 할 방법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자본가를 설득할 수 없는 이유는,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으면 자본가는 이윤을 얻지 못해서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그와 사뭇 다르다.

또한 미즈는 하이디 하트만 등의 가부장제 이론가들처럼, 남성 노동자가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차별하려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추구한 사례로 가족임금 도입 과정을 제시했는데, 이 역시 타당하지 않다. 조안나 브레너·마리아 라마스의 글 「여성억압의 재고찰」에 따르면, 가족임금과 보호입법을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도입 맥락은 가부장제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랐다. ‘가정주부화’를 통한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남성의 공장노동뿐 아니라 여성노동, 아동노동까지 보편화한 결과 노동계급 가족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생물학적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이를 막기 위해 노동계급 여남 공히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이었다. 자본가와 남성 노동자가 손을 잡고 ‘여성’을 차별하려고 협력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제대로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와 같이 미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이 겪는 물질적 억압에 집중하며 유물론적 분석을 시도하고 나름대로 변혁적 전망을 견지하려 노력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물질적 재화 생산이 사회를 변화 발전시키는 원동력임을 부정하다 보니 착취가 아니라 ‘약탈’을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규정하고, 남성이 여성과 식민지를 ‘약탈’할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잘못된 분석을 한다.

그 귀결은 변혁 전략에서 서구 여성의 역할을 소비자 운동으로 제한하고 제3세계 여성에 대해서도 여남 노동자계급의 단결이 아닌 자신의 토지 및 자급적 생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는 불분명한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비자 운동이 과연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차례 의문과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계급에 속하는 여성이나 빈곤한 여성은 구매력이 제한되어 있기에 소비자 운동의 주체가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미즈가 보이는 이런 한계는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전망에 대해 사회주의 역시 생산력 발전을 지향하는 한 대안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다 보니 사실상의 자급자족 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게 된 데에서 기인한다. “지역 산업은 지역 시장을 위한 생산을” 하고 경제가 “자신의 농업적 기반”으로 돌아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했던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유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사회주의는 낡은 생산 수단들과 낡은 교류 수단들을, …… 낡은 소유 관계들과 낡은 사회를 재건하고자 하거나, 현대의 생산 수단들과 교류 수단들을 그것들에 의해 산산조각 났고 또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었던 낡은 소유 관계들을 틀 속에 억지로 다시 밀어 넣고자 한다. 두 경우 모두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는 반동적인 동시에 유토피아적이다.

 미즈의 생각과는 달리, 생산력 발전은 그 자체로는 억압이 아니다. 만약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어서 생산이 민주적으로 계획되고 통제되는 사회를 건설한다면, 생산력 발전 역시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계획되고, 인간의 행복에 기여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사회에서는 이윤을 위해 여성들에게 외모꾸미기를 종용하고, 남성들에게 여성을 물건 취급해도 괜찮다는 인식을 주입하는 대중문화 상품이나 광고 역시 사라질 것이다. 하루아침에 여성해방이 성취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를 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져서 최소한 여성해방을 향한 첫 걸음을 뗄 수는 있게 될 것이다.

미즈가 2014년 한국어판 서문에서 말한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시작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바로 이런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어야 한다. 이러한 전망을 명확히 한다면, 자본주의에 ‘가부장제’를 덧씌우거나 자본주의와 동등한 위상의 ‘가부장제’ 개념을 설정하는 주장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이는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제대로 도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6 댓글

  1. “착취라는 용어를 여남 관계에 사용함으로써 미즈는 자본가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전체를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할 수 없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듯이 남성도 여성억압에 대해 그 정도로 강한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 비문인듯 합니다. 비문이 아니더라도 해석이 용이하지 않네요ㅠ

  2. 30분째 다시 읽어봤는데, 비문은 아니지만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운 문장이네요…ㅠㅠㅠ

    • 기자입니다. 해당 문장에 쉼표와 작은따옴표를 추가했습니다. 앞으로도 기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3. 1. 남성이 여성의 무급노동을 이용해 이익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이 어떻게 양립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성의 노동을 ‘무급’으로 이용하는 남성이 여성을 ‘부양’하기도 한다? 제게는 너무 난해한 논리적 모순이네요

    2. 남성이 여성의 무급노동으로 이익을 본다면, 왜 남성의 소득수준과 기혼자비율이 정확히 비례할까요? 오히려 저소득 남성일수록 여성한테서 조금의 이익이라고 얻기 위해 결혼할 유인이 더 클 텐데요. 또 왜 기혼 남성들은 가사노동의 분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갈수록 (그리고 이것도 저소득층일수록) 여성의 맞벌이를 선호하게 되는 걸까요? 이것은 ‘공짜 이익’의 커다란 손실일 뿐 아니라, “일자리의 독점”과 “현금 소득에 대한 통제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이어질게 뻔한데요. 그리고 가정주부가 자본에 의해 착취당한다고 하면 혼자 살면서 임노동과 가사노동을 모두 전담하는 사람은 자본에게 이중의 착취를 당한다는 설명도 가능해집니다.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한다고 해서 임금을 더 받지는 않죠. 그런데 왜 경제적 이유로 결혼을 기피하고 저 이중착취의 굴레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늘어갈까요?

    3. 남성이 약탈과 폭력, 지배의 본성을 지닌 존재라면 교육이나 설득, 연대 같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직 저 악마같은 남성들과의 적대적 투쟁을 통한 그들의 절멸, 혹은 그들의 정신, 심리 구조를 어떤 식으로든 강제적으로 개조하는 것만이 페미니즘에 주어진 유일한 길일 겁니다.

    • 이 글은 님께서 정리하신 내용을 동의하는 게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이 마리아 미즈가 주장하는 바이고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읽히네요.

      • 제 생각만 적어놓으니 마치 이 글의 저자를 향한 것으로 읽힐 수 있겠네요. 당연히 그런건 아닙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이론, 그리고 그와 유사한 주장 일반에 대한 의문을 짧게 적어본 것 뿐입니다. 댓글 수정을 할 수는 없게 돼 있네요.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