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필요없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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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기획연재]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발간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사회주의자』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억압에 반대하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추구하기에, 여성억압 문제나 생태 문제 등에 대한 분석 기사들을 꾸준히 실어 왔다. 본 연재 기획도 그런 실천의 일환으로, 이제까지 널리 읽혔거나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페미니즘 도서들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읽고 비평해 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보수 세력의 공격과 비난이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성억압적 사고와 실천을 온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평보다는 경청이 먼저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고민 끝에 서평 연재를 기획하였다. 생산적인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연재 기획팀]

맑스주의와 여성주의를 접하고 이에 공감하게 되었을 때, 맑스주의와 여성주의 중 어떤 쪽에 더 관심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물음에, 둘 다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답하자, 꼭 읽어보라며 추천받았던 책이 『오빠는 필요없다』(전희경, 이매진, 2008)였다. ‘맑스주의는 여성주의와는 대립되는 것이다’라는 의도의 추천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오빠는 필요없다』는 ‘맑스주의는 반여성적이다’, ‘여성들에게 맑스주의는 필요없다’는 의견을 대표하는 책이다. 그리고 이는 『오빠는 필요없다』 만의 독특한 의견은 아니다. 모두 그러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여성주의 진영 안에서 맑스주의에 관해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상식은 ‘맑스주의는 계급문제를 설명하는 데에는 탁월할지 몰라도 여성이 겪는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이다. 이러한 맑스주의를 향한 반감을 강력하게 표하고 있는 책이 『오빠는 필요없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는 맑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 위에 맑스주의가 여성해방과는 대립된다는 주장을 펼쳐놓고 있다는 점이다.

혁명가가 아닌 혁명가의 아내가 되기를 요구받았던 여성활동가들

『오빠는 필요없다』는 90년대, 2000년대 운동을 했던,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들 통해 당시 ‘운동권’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는 책이다.

여성 활동가들은 능력이 있어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조직 안에서 ‘보살핌’이라는 ‘여성’의 역할을 요구받았다. 컵을 씻는다거나,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내온다거나 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었다. 독재정권이라는 ‘적’에 맞서던 당시 운동권은 ‘군사문화’가 일상적이었고, ‘노동자의 군대’에 적합한 것은 남성이었다. 민중가요에서 여성은 ‘어머니’와 ‘누이’로서 등장하며 적에게 빼앗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표현되었고, 빼앗긴 ‘누이’를 지켜야 할 주체로 호명되는 것은 ‘형제들’이었다. ‘노동자의 군대’, ‘민중지향’이라는 지향점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여성은 ‘전사’에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소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조직 내 성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조직의 보위, 운동의 대의 등을 앞세우며 해결을 기피하거나, 가해자 처벌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성폭력을 중요한 문제로 다루지 않았다. 이상의 내용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당시의 모든 활동가, 모든 운동 조직이 그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한 내용을 통해 볼 때, 운동 사회가 성차별과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부조리한 세상과 싸워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기존의 여성억압을 그대로 행할 때,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에는 무심하며 이를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문제’로 취급할 때, 깊은 막막함을 넘어 분노까지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현 사회의 여성억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그들이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억압 중 여성억압은 없는 것이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는 여성억압은 사라지지 않은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성억압이 주요한 문제라고 얘기하는 것, 운동 사회 안에서부터 여성억압을 없애기 위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 남성을 지칭하는 ‘형제’가 주체로 사용되고, 여성은 ‘누이’나 ‘어머니’로만 재현되는 민중가요 가사 등이 고쳐져야 하며, 조직 내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는 가해자가 처벌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여성억압을 답습하는 조직 내의 문화와 인식을 뿌리 뽑는 방향으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맑스주의는 반여성주의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2부 2장, 3부 1장과 2장 등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진보’ 운동의 남성중심성의 주요한 원인을 맑스주의로 진단하고, 맑스주의 사상 자체도 남성중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제시된다.

(1) 맑스주의의 핵심 개념들은 남성중심적이다?

첫째는 맑스주의가 착취자나 피착취자의 성별(gender)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또 언급할 수도 없는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생산, 재생산, 노동, 착취, 계급 등과 같은 맑스 이론의 주요 개념들이 여성 삶의 중요한 측면들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으며 맑스주의의 이론적 중핵인 ‘노동’ 개념은 사실상 ‘보살핌 노동’이나 ‘재생산 노동’ 등 역사적으로 여성이 맡아온 노동을 간과하고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도 “맑스주의의 철학적 기반인 역사유물론에서의 생산은 노동을 통한 자기 삶의 생산’과 ‘생식을 통한 새 생명의 생산’이라는 의미 또한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했듯이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생산’은 여성의 성별에서 비롯된 출산, 여성에게 맡겨져 온 육아와 가사 노동은 배제된, 좁은 의미의 생산을 의미하지 않는다.

맑스가 이야기한 생산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자연과 맺는 관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뜻을 갖고 있다. 즉 여성을 포함한 물질적 삶 자체의 생산 전반을 지칭했다.(『독일 이데올로기』) 그렇기에 맑스주의가 생산과 재생산을 분리하여 생산만을 강조했다고 말하는 것이 오류임은 물론이고, 이런 식의 분리 자체가 맑스주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것이다. ‘생산’ 개념이 남성들의 생산을 의미한다는 것,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지향이 가리키는 노동자가 ‘기름밥에 찌들어 사는 남성 노동자’뿐이었다는 것은 맑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저자는 “실제로 맑스주의 이론의 역사를 볼 때 생산이나 노동이 이런[인용자: 맑스가 원래 의도한] 용법으로 사용된 예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고 얘기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맑스주의에 따르면 생산이 재생산을 배제한 개념이 아님을 짚으며, 임신과 출산만을 ‘재생산’ 영역이라고 칭하여 생산과 분리시키는 이원론을 비판하는 논의가 꾸준히 있어 왔다.

따라서 설령 맑스주의를 표방한 몇몇 활동가들이나 학자들의 개별적인 행태가 남성중심적이라거나 맑스주의를 오용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으나, 맑스주의가 그 자체로 ‘재생산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왔다고 얘기할 수 없고, 맑스주의 자체가 남성중심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와 달리 개념의 사용법이 다르고 개념이 전제하고 있는 이론틀이 다른 것이다.

(2) 맑스주의는 가족을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둘째는 “전통적 맑스주의가 여성 억압과 관련된 핵심 구조인 가족을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해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렛은 기존의 맑스주의가 가족을 경제적 결정의 ‘결과’로 생각해왔다고 하면서, 맑스 자신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와 가족을 ‘자연적 속성’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고 쓰고 있는데, 저자가 이 부분에 달아 놓은 각주에서는 “이러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 속에서 남성에게 인간 본질이 자연으로 되고 혹은 자연이 인간의 인간적인 본질로 되는 척도가 나타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이다”라는 문장이 근거로 제시되어 있다.

저자가 맑스주의 비판의 근거로 제시한 해당 문장은 맑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에 나오는 것으로서, 저자가 문제 삼은 문장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약탈물로서의, 그리고 공동체의 육욕의 시녀로서의 여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인간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실존하는 끝없는 타락이 나타난다. ……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직접적, 자연적, 필연적 관계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이다. …… 따라서 어느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적 본질이 자연으로 되어있는가 혹은 어느 정도로 자연이 인간의 인간적 본질로 되어 있는가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직관 가능한 사실로 환원되어 나타난다. …… 남성의 여성에 대한 관계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가장 자연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행동이 어느 정도로 인간적으로 되어 있는가……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칼 맑스, 『경제학·철학 수고』)

저자는 해당 문장에서 ‘자연적인 관계’라는 부분만 보고, 이 문장을 ‘원래부터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고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라는 뜻으로 독해한 듯하다. 하지만 원문의 맥락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현재의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당연하고 몰역사적인 관계임을 주장하는 의미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적소유로 인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소외되고 있다는 『경제학·철학 수고』의 맥락상,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파악함으로서 그 사회에 얼마나 소외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저자는 “맑스가 가족 안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본능’으로 치부”했다고 우에노 치즈코를 인용하여 주장하는데, 해당 부분 각주에서 저자가 그 근거로 인용해 놓은 것은 『자본론』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노동계급의 부단한 유지와 재생산은 여전히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향상적인 조건이다. 자본가는 이 조건의 충족을 노동자가 자기 보존본능과 생식본능에 안심하고 맡겨둘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맑스의 원문을 보면 이 문장이 들어간 맥락은 저자가 주장하는 바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자본가는 자기 자본의 일부를 노동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기의 총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킨다. …… 그는 노동자로부터 받는 것에 의해서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주는 것에 의해서도 이익을 본다. 노동력과의 교환으로 지출된 자본은 생활수단으로 전환되며, 그것의 소비에 의해 현존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골격, 뇌수가 재생산되고 새로운 노동자들이 탄생한다. 따라서 …… 노동자계급의 개인적 소비는 생활수단을 새로운 노동력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본가의 가장 필요불가결한 생산수단인 노동자 자신의 생산이며 재생산이다. …… 노동자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언제나 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조건의 충족을 자본가는 안심하고 노동자의 자기유지 본능과 생식본능에 맡길 수 있다.(칼 맑스, 『자본론 I권 (하)』, 비봉출판사 제2개역판 기준 777-778쪽)

결국 저자가 문제 삼은 문장이 들어간 맥락은 자본주의 임노동 체제 하에서 자본가에게 이익이 되는 노동자의 재생산은 노동자 스스로 하며,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뺏는 것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익을 얻는다는 내용으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당연한 것이다’고 정당화하는 것이라고는 해석하기 힘들다. 여기서의 ‘본능’은 자본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지, 해당 노동자의 집에서 가사노동, 출산과 양육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역사적 분석을 요하지 않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맑스의 모든 저작들을 정독해야만 맑스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가 비판의 근거로 인용하는 텍스트는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다. 위와 같은 초보적인 수준의 오독은 (만약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면) 『경제학·철학 수고』와 『자본론 1권』을 직접 읽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인용한 부분만 보고 가져와서 비판한 결과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이런 불성실한 태도는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린다.

(3) 맑스주의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계급 모순에 흡수한다?

셋째는, 맑스주의는 자본만이 가부장제에서 이득을 얻는 ‘유일한’ 수혜자라고 암시함으로써 남성 노동자, 남성 활동가, 남성 맑스주의자들을 가부장제의 책임에서 면제시키며, ‘억압의 행위자인 남성’이 구조로 환원돼버리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싸워서는 안 되고 남성과 ‘단결’해 자본가 계급과 싸워야 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나눔으로써 억압에 순위를 매기고 더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대동단결론으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활동가, 맑스주의자가 자신이 겪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현존하는 억압을 남일 취급하여, 가해를 지속하고, 문제제기에 ‘대의를 흐리니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다면, 이는 분명 싸워야 하는 일이다.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면, 억압에 대해 함께 싸워야 함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오빠는 필요없다』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 ‘여성해방은 노동해방이 이루어지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니 여성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주장, 여성운동기구를 주류 운동의 세력을 확장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도구로 여기는 행태 또한 같은 맥락에서 비판되고 지양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행태에 대한 비판을 ‘근본적인 변혁’, ‘총체적 분석’,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구조를 얘기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시키며, 총체적 인식,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남성의 입장’에서 ‘약자’들을 묵살하고자 하는 사고체계로 간주하며 거부하고 있다. 예컨대 저자는 “그동안 맑스주의 이념이 표방해온 ‘과학적 세계인식’은 사실 인식자의 사회적 위치를 성찰하지 않는 오만한 지식이 아니었을까? ‘총체적 변혁’은 사실 다양한 정치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데 있어서 패권주의와 무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질문한다. 그렇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총체적 분석을 통해 찾아서 과학적 세계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맑스주의는 필요하다

맑스주의는 남성중심적이지 않고, 반여성적이지 않다. 맑스주의의 여성 문제 분석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은 앞으로 더 많은 분석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필요가 될 수는 있으나, 맑스주의가 반여성적이라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이렇게 맑스주의를 옹호해야 하는 이유는,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맑스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팔지 않아도 타인이 창출한 이윤으로 생활이 가능한 여성이 아니라면, 매일 겪는 성적 대상화, 가사노동과 육아의 책임 전가, 고용시장에서의 불평등, 임금과 승진에서의 불평등 등 여성은 일상적으로 많은 차별을 겪는다. 이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그러하듯 생산관계에 따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렇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억압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뿌리 뽑는 생산관계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는, 여성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통제를 통해 성차가 노동에서의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그런 생산관계로의 변혁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생산관계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피억압자들 간의 단결이 필요하다. 앞서 논했듯이 여성문제에 무관심한 활동가와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총체적 변혁을 거부하고 노동자계급을 적대시하는 것과도 싸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자 계급을 적대시하며 여성억압을 생산관계와는 무관한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여성 안에서도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는 무시한다면, 해방을 위해 싸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노동해방이 되면 여성해방 저절로 되니 여성문제는 뒤로 미뤄두라’거나, ‘여성 억압의 원인은 모두 자본주의에 있으니 자본주의가 없어지면 여성억압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생산관계의 변혁 없이는, 차별적 ‘언행’의 ‘제재’는 가능할지언정, 모든 여성 억압의 ‘근절’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여성해방의 지향은 남성과 동등한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닌, (같은 노예 사이에서도 행해지는 차별이 사라져야 함은 물론이고)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이어야 한다는 것, 즉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학이, 그 과학을 근거로 하는 피억압자들 간의 단결이, 맑스주의가 필요하다.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온라인 게재에 앞서 발행된 잡지 9호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기사 내용 중  다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거나 부정확하게 서술된 부분이 있어 글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하였습니다.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개의 댓글

  1. 여성주의건 마르크스주의건 아니면 자유주의건 생태주의건 뭐건 간에 제발 제대로 ‘읽고’ 나서 뭐든 주장했으면 좋겠네요. 이런저런 이념을 떠나서 이건 너무 당연해서 말하기도 새삼스러운 가장 기초적인 덕목 아닌지. 그것도 나름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이거 정말 고질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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