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새로운 이름을 위하여: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고

0
2474
[사진: 사회주의자]

[기획연재]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발간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사회주의자』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억압에 반대하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추구하기에, 여성억압 문제나 생태 문제 등에 대한 분석 기사들을 꾸준히 실어 왔다. 본 연재 기획도 그런 실천의 일환으로, 이제까지 널리 읽혔거나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페미니즘 도서들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읽고 비평해 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보수 세력의 공격과 비난이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성억압적 사고와 실천을 온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평보다는 경청이 먼저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고민 끝에 서평 연재를 기획하였다. 생산적인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연재 기획팀]

 

약 1년 전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공중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생면부지의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그 남성은 한 시간 넘게 화장실에 숨어서, 들어오는 남성들은 그냥 보내며 여성이 오길 기다렸다. 그날 그 시간에 강남역의 그 장소에 있었던 여성이라면 누구든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

‘여성혐오 살인’이라는 규정은 그 사건 이전에도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 아내구타, 성차별을 당하고도 ‘처신을 잘 못해서’ ‘조심하지 않아서’ 같은 말들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음을, 그럼으로써 여성에 대한 각종 폭력과 차별이 암묵적으로 정당화되어 왔음을, 그리고 바로 이런 여성억압적 사회 속에서 그 가해자가 여성을 특정하여 살해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임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침묵하던 여성들은 이제 거리로 나왔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1000개가 넘는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우파들이 거리에 나온 여성들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유포하며 모욕할 때, “가만히 있으라”고 종용할 때, 여성들은 “이것은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혐오 살인이며 우리는 여성혐오에 저항할 것이다.”라고 응수할 수 있었다.

지금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이렇게 여성혐오 담론이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이 됨에 따라, 2016년에 쓰인 한 서평에 따르면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 국내에 번역 소개된 지 4년 만에 ‘뜨거운’ 책이 되었다.”(김주현, 「우에노 치즈코를 읽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로컬리티 인문학, 2016) 그리고 이 열기는 지금도 식지 않고 있다. 예컨대 지난 5월 10일 개최된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를 말하다”라는 강연회에서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가 언급한 “호모소셜(남성 동성 사회),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 여성혐오라는 삼각 구조”도 우에노 치즈코가 이 책에서 했던 설명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2; 이하 별도의 인용 표시가 없을 경우 이 책의 본문이다)에 주목해야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 한국 페미니즘 운동 내 여성혐오 담론이 우에노 치즈코가 이 책에서 이야기한 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혐오’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여자는 3일에 한 번은 맞아야 한다’ 같은 여성 전체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 또는 여성을 표적으로 한 폭력을 떠올린다. 1996년에 심리학자 피터 글릭(Peter Glick)과 수잔 피스크(Susan Fiske)가 개념화한 바에 따르면 그런 것은 ‘적대적 성차별주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여성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나타나는 성차별도 있다. 예를 들어, 작년에 방송인 김제동이 어느 행사에서 사회를 보면서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투표권 1.5표, 신생아부터 3세까지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겐 2표를 주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은, 언뜻 보면 여성에게 보상을 더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이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을 나누어서 전자에게만 보상을 준 것으로서 ‘여성이라면 모름지기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한다’는 차별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글릭과 피스크는 이렇게 전통적 성역할에 부합하는 여성에게 보상을 주고 그런 여성을 칭송하는 것을 ‘온정적 성차별주의’라고 규정했다.

성차별을 이렇게 적대적 성차별과 온정적 성차별로 분류했을 때, 오늘날 한국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통용되는 여성혐오 개념은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구독자 2만 명이 넘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며 페미니즘과 여성혐오에 대해 글을 써 오다가 지난 4월에 『여혐민국』을 출간한 양파(주한나) 씨는 해당 저서에서 “여자라서 아껴주고, 여자라서 보호해주고, 여자라서 봐주고, ‘무서웠지, 걱정하지 마. 오빠가 해결해 줄게’ 하는 것도 사실 여성혐오에 포함된다”고 했다. 또한 다수의 이용자들이 참여하여 문서를 만들고 편집하는, 일종의 온라인 페미니즘 백과사전인 ‘페미위키’ 사이트에서는 여성혐오 항목에 여성 표적 살인, ‘김치녀’ 등의 멸시적 호칭, 디지털 성범죄뿐만 아니라 ‘여성은 섬세하고 상냥하다는 편견’, 유리천장, 성별임금격차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우에노 치즈코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misogyny’의 번역어로서의 여성혐오 역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이기 때문에, 온정적 성차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에는 여성멸시뿐 아니라 여성숭배라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렇게,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의 ‘혐오’는 적대적 성차별을 상기시키는 반면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하는 ‘여성혐오’ 개념은 그것뿐만 아니라 온정적 성차별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대중은 ‘나는 여자들을 싫어하지 않고, 여자들에게 잘해 주기도 하는데 내가 왜 여성혐오자인가?’라는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 때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당신은 misogyny의 번역어로서의 여성혐오 개념을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며 여성혐오는 여성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모든 언행을 포함하는 개념이다’라고 응수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에노 치즈코의 책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가 주로 언급된다. 그렇기에 여성혐오 담론과 이 담론이 지금 한국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구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에노 치즈코가 말하는 여성혐오: 여성억압 이데올로기 전체

우에노 치즈코는 제2장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여성혐오’ 부분에서 자신의 분석틀 및 그러한 분석틀을 선택하게 된 동기와 목적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남자의 가치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이며, 이에 답하기 위해 그는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시대극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무사들의 결투 장면을 묘사한다.

남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평가는 같은 남자가 내뱉는 “제법인걸!”이라는 칭찬이 아닐까? 시대극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호적수와 칼과 칼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다가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귓바퀴 언저리에 대고 읊조리는 “제법인걸!”이란 말보다 더 가슴 요동치는 쾌감이 있을까. …… 남자는 남성 세계의 패권 게임 속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평가받고, 칭찬받는 것을 좋아한다. …… 패권 게임의 승자가 되기만 하면 여자는 전리품처럼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 호모소셜적인 연대란 성적 주체(로서 서로가 인정한 사이) 간의 연대를 말한다. ‘제법인걸!’이란 이 주체 성원 간의 승인을 뜻하며 ‘좋아, 너를 남자로 인정한다’는 굳은 약속을 의미한다. ……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 ‘자기 여자를 (적어도 한 명 이상) 소유하는 것’이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 멸시―를 ‘여성혐오’라고 한다. 호모소셜리티는 여성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이렇게, 저자가 말하는 ‘여성혐오’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 아닌, 남성이 쟁취해야 하는 일종의 트로피로 보는 이데올로기라고 요약될 수 있다. 당연히 적대적 성차별주의와 온정적 성차별주의 모두를 포함하며, 여성억압 이데올로기 전체를 느슨하게 묶어서 지칭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점은, 이 책의 목적이 여성억압 일반에 대한 이론 제시나 페미니즘 대중운동의 총체적 방향 제시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어떤 이데올로기 때문에 저런 문화를 향유하며, 여성에 대해 저런 생각을 갖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호모소셜리티나 여성혐오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이 책은 남성성 이데올로기의 내용과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이 책의 분석 대상이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 문화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저자가 준거로 삼고 있는 이브 세즈윅(E. Sedgwick)의 책도 기본적으로 19세기 영국문학 비평서라는 점에서 더 잘 드러난다. 실제로 저자는 ‘호색한’으로 알려진 일본의 몇몇 남성 작가들이 어떻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했는지(제1장), 일본의 춘화가 근대화 이전과 이후 어떻게 달라졌고 그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열등한 존재로 그려졌는지(제7장), 1997년 도쿄전력 OL(Office Lady) 살인 사건에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다니는 엘리트였던 피해 여성이 어떤 마음으로 성판매를 하게 되었는지(제12장, 제13장) 등 일본의 구체적인 사회 현상에 대한 미학적 또는 문화적 비평에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렇게 분석 대상을 처음부터 이데올로기 영역으로 한정하고 있는 책이기에, 여성혐오를 극복할 방법도 당연히 남성이 “신체의 타자화를 그만두는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만 제시된다.

여성억압 전체를 ‘여성혐오’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점

현재 한국의 여성혐오 담론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여성혐오 개념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결과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 책은 애초에 이데올로기 영역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우에노 치즈코가 정의한 여성혐오는 ‘여성억압 이데올로기 전체’이지만, 현재 한국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혐오’를 그보다도 더 넓게 여성억압 전체, 성차별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여성혐오라고 부르든 무엇이라고 부르든,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는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가장 내밀한 심리 구조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데올로기라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생각을 고치라고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많은 여성학자들도 일베 등의 극우파가 여성을 대상으로 자행해 온 각종 언어폭력, 범죄 협박 등에 대해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사라진 안정적인 일자리와 관련되어 있으며”(김수아, 「온라인상의 여성혐오 표현」, 『페미니즘연구』 제15권 2호, 2015), “생명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자본주의의 실패와 그 생명을 구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무능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패”(손희정, 「혐오의 시대-2015년,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 『여/성이론』 통권 제32호, 2015)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여성혐오로 지칭되어 온 현상의 뿌리가 물적인 토대, 즉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면, 사람들에게 여성혐오적 사고를 바꾸라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여성억압 전체를 ‘여성혐오’로 부르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혐오’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여 성별임금격차, 유리천장 같은 현상까지 지칭하면 대중의 다수가 납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런 현상들의 배후에 있는 사회적 구조, 물적인 토대를 비가시화할 위험이 있다. 또한, 혐오라는 특정한 감정이나 정서의 주체는 추상적인 구조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여성혐오 담론 하에서는 각종 차별과 폭력을 직접 저지르는 남성 가해자들의 존재가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들이 제대로 비판받고 처벌받을 수 있도록 투쟁하는 것은 중요하며, ‘여성억압의 궁극적 원인은 계급지배 등 물적인 토대에 있으므로 남성들을 비판하지 말자’는 편향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여성혐오자’들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여성혐오라고 불리는 현상들을 없애기 어렵다. 여성억압 전체를 지칭하기 위해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쓸 경우 개별 남성들에 대한 비판과 처벌만 강조되거나, 더 나아가 남성 집단 전체가 여성을 억압할 이해관계가 있으므로 남성들과는 연대할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이 조장될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성혐오’보다 좀 더 예리한 언어를, 우리가 ‘여성혐오’라고 불러 왔던 현상들에 대한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야 한다.

여성혐오 개념은 적대적 성차별에 한정하자

한국에서 여성혐오 개념은 2012년 10월경 일베가 주목받고 그 특징으로 ‘한국 여성에 대한 혐오’가 언급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인 2013년은 박근혜가 당선되면서 사회 전반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시기였는데, 이때 5월 18일을 앞두고 또다시 일베가 생산해내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텍스트들이 연이어 보도되었고, 언론은 각종 분석기사를 쏟아내며 일베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다루었다. 2015년에 일베는 ‘폭식투쟁’을 하는 등 세월호 가족들에 대한 끔찍한 모욕과 비방의 최전선에 섰고 이때부터는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이나 투쟁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나 탄압도 ‘혐오’로 지칭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렇게 페미니스트들이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전부터 ‘여성혐오’라는, 어떻게 보면 어감이 매우 강한 단어를 대중운동의 언어로 만들어낸 것은 일베 등 극우세력이 여성에 대해 자행하는 모욕과 폭력이 그만큼 심각했던 당시 상황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성혐오 담론의 의의와 이에 기초하여 건설된 운동의 의의를 무조건 폄하하는 태도는 부적절하다.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혐오라는 언어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진의에 부합하는 한에서 대중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여성을 표적으로 한 언어적, 물리적 폭력 등의 적대적 성차별에 한정해서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그 외의 행위에 대해서는 성차별 또는 온정적 성차별이라고 칭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일베 등이 주로 자행해 온, 여성에 대한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여성혐오’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 대중도 쉽게 납득할 수 있고, 외국에서 자리 잡은 ‘증오 범죄(hate crime)’ 개념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일상 속에서 숱하게 발생하는 성폭력이나 외모를 이유로 한 모욕 등도 마찬가지이다. 적대적 성차별에 해당하는 이런 행위들은 ‘여성혐오’라고 칭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예컨대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투표권 1.5표, 신생아부터 3세까지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겐 2표를 주어야 한다.”같은 발언, 수동적인 태도의 여성을 매력적으로 그리는 영화 및 드라마, 성별임금격차 등은 ‘여성혐오’라고 칭할 경우 위에서 설명한 것 같은 문제들이 생기고, 대중의 입장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워서 효과적인 여성운동 건설에 불리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위와 같은 현상들을 설명하기에는 ‘성차별’이 보다 적절하다. ‘혐오’와는 달리 ‘차별’은 특정한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라 구조적 불평등을 상기시키며, 구체적인 사람, 추상적 사회구조 모두 주어로 나올 수 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현상들을 ‘성차별’이라고 부를 경우, 여성에게 잘해 주려는 의도에서 한 언행일지라도, 혹은 구체적인 행위자들이 일부러 여성을 적대시해서 발생한 현상이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사회 구조상의 젠더 불평등을 강화하기에 문제라는 사실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외국에서도 온정적 성차별이 ‘misogyny’보다는 ‘sexism’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예를 들어 2012년 성차별(sexism)과 여성혐오(misogyny)의 개념적 차이에 대해 가디언 지(The Guardian)에 견해를 밝힌 페미니스트들 중 줄리 빈델(Julie Bindel)도 “어떤 남성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모성적이라거나, 원래 운전을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성차별주의자(sexist)이다. 만약 그가 여자들은 섹스할 때나 필요하고 남자들과 아이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여성혐오(misogyny)다. 여성혐오자들은 모두 성차별주의자들이지만, 성차별주의자들이 항상 여성혐오자들인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같은 기사에서 나오미 울프(Naomi Wolf)와 라힐라 굽타(Rahila Gupta)도 비슷한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우리의 용기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 돌아와야 한다.

5월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주기 추모 문화제의 제목은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였다. 여성들은 여성혐오 담론으로 인해 자신들이 겪은 두려움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억압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같은 페미니즘 서적을 학습하고, 조직하고, 거리에서 투쟁할 수 있었다. 강남역 살해 사건 1주기를 맞아 각종 토론회, 집담회가 열리며 앞으로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워야 할지에 대한 토론이 활발해진 지금 ‘여성혐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 돌아올 수 있도록, 여성억압을 진짜 끝장내는 힘이 되어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