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이 하지 않는 질문, 맑스주의의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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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발간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사회주의자』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억압에 반대하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추구하기에, 여성억압 문제나 생태 문제 등에 대한 분석 기사들을 꾸준히 실어 왔다. 본 연재 기획도 그런 실천의 일환으로, 이제까지 널리 읽혔거나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페미니즘 도서들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읽고 비평해 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보수 세력의 공격과 비난이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성억압적 사고와 실천을 온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평보다는 경청이 먼저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고민 끝에 서평 연재를 기획하였다. 생산적인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회주의로 페미니즘 읽기 연재 기획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는 발언까지 했던 2015년, 여성들은 보란 듯이 ‘메갈리아’를 만들었다. 2016년 5월 강남역에서 누군가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을 때, 7월에 김자연 성우가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티셔츠를 구매한 인증 사진을 자기 SNS에 올렸다는 이유로 넥슨에서 사실상 해고당했을 때, 9월에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낙인찍으며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더욱 옥죄려고 했을 때, 그리고 11월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속에서조차 성차별적 언행이 제대로 걸러지지 못했을 때 여성들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페미니즘 운동의 이러한 상승은 출판계에서도 ‘페미니즘 서적 붐’을 일으켰다. 예스24에서는 여성/젠더 분야 서적의 2016년 판매량이 2015년 대비 132.6% 상승했고, 알라딘에서는 무려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교양인, 2013년 개정증보판 출간)은 처음 출간된 지 무려 1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페미니즘 입문서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지키고 있다. 페미니즘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14쇄를 찍었고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스테디셀러 10위 안에 들었으며(작년 9월 기준), “한국 페미니즘의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섹슈얼리티, 성폭력, 성매매부터 연령주의, 글로벌 자본주의와 남성성까지 다양한 쟁점을 ‘페미니즘 인식론’의 관점에서 다루는 이 책은 실제로, 학교와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상식’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요즘 세상에 성차별이 어디 있어?’라고 반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성억압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동시에 달성하기 힘든 이중적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 음식을 만들되 먹지 말라, 말라깽이가 되되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하라, 정숙하면서도 섹시하라.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3; 이하 별도의 출처 표시가 없는 인용문은 이 책의 본문이다)와 같은 현실을 폭로하면서 “식욕‧성욕‧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라 남성의 3대 욕구인 셈이다”라고 일갈하는 부분은 아직도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여성의 전화’에서 5년간 상근자로 활동한 저자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한국 사회에서는 때리는 남편이 가정파괴범이 아니라, 폭력에서 탈출하는 피해 여성이나 이들을 돕는 여성운동가가 가정파괴범이다”와 같은 지적은 ‘가정’이 많은 여성들에게 안식처가 아니라 억압과 폭력의 공간임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또한 ‘상식’이라는 이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저자의 단호함과 예리함은 젠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주도 사람의 입장에서 ‘남해’는 틀린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북해’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 문학인가? ……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이렇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운동장이 결코 평평하지 않고 기울어져 있음을 폭로하며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도전’이 멈추는 지점: 세계를 해석하되, 변혁하려고 하지 마라?

하지만 이렇게 출발한 ‘도전’은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멈춘다. 만약, 저자의 말대로, 사실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자,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포장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이 진짜 존재한다면,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사회를 변혁하고 진정으로 해방된 사회의 전망을 함께 그려 보자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와 물질의 분리는 남성 중심적 사유이다. …… 여성운동과 여성주의 지식을 대립시키는 사고방식은 서구 근대성의 산물이다. 운동과 언어 사이의 이원론, 위계적 사고는, “이제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앞으로 철학은 세계를 변혁할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다. 이 테제는 마르크스주의의 남성 젠더 따라서 변혁이론으로서의 한계를 어김없이 고백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저항하고자 하는 세계관은 일종의 쌍생아인데, 이들은 모두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는 하나(‘과학’)이며 그 외의 생각은 ‘이데올로기’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저자는 그래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곧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는 쪽으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해석에서 멈추지 않고 보다 실물적이고 실천적인 무언가(‘변혁’)를 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남성 중심적 사유”로서 억압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저자가 설명하는 ‘페미니즘 인식론’의 핵심으로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저자는 어떤 맥락에서,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피억압자들을 위한 과학은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사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권력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존재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학문, 교육, 언론 등을 통해 자기들의 목소리, 자기들의 관점만을 절대화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상식’은 대부분 여성, 비백인, 노동자의 관점과 해석이 아니라 남성, 백인, 자본가의 관점과 해석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는 하나(‘과학’)”라는 인식론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상식’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탄압하고 주변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식민지 확장과 노예무역에 열 올리던 시기, 제국주의 국가의 학자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흑인들이 열등하다는 연구들을 발표하며 자신들의 착취를 정당화하고, 이를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비과학’이라고 공격했던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는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서구 근대성의 산물”이자 “이항대립 논리”로서 억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지 말자는 주장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 모든 것은 권력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우리의 인식보다 선재하는 외부 세계 자체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피억압자들이 억압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정답은 없고, 모든 것은 해석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므로 너희가 말하는 것이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하지 마라.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도록 여성의 목소리, 비백인의 목소리, 노동자의 목소리도 발화되어야 한다.’ 정도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키고 “상대화”시키자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지배자들의 그런 ‘과학’을 상대로, 저자처럼 정답도 과학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니 한 가지 목소리를 절대화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신 “너희 지배자들이 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우리는 진짜 과학의 힘으로 너희들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고 진실에 도달,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피억압자들을 위한 과학은 불가능한 것일까?

『페미니즘의 도전』이 하지 않는 질문, 맑스주의의 답: 물질적 토대의 문제

피억압 민중이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깨고 이 세상을 뒤집을 가능성을 『페미니즘의 도전』은 부정한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과관계의 환원론에 빠지기 쉽다”고 하며,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우리가 당하는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은 계급, 민족 등 어느 한 가지 사회적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므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하나의 총체적인 전망에 입각한 ‘단결’보다는 여러 피억압 집단들이 느슨하게 제휴하는 ‘횡단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저자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어떤 사회가 인간답고 해방된 사회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정답을 제시하려 하는 것은 억압이고 다양한 관점,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페미니즘 인식론’의 이름으로 강하게 비판하는 “이항대립 논리” 즉 과학과 비과학의 구별은 사실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관점을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을 뿐이지 그들의 권력 자체가 아니었다. 과학과 비과학의 구별이 존재했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여성, 비백인, 노동자, 장애인 등을 억압했던 게 아니라, 애초에 지배하는 자들과 지배당하는 자들로 사회가 찢어져 있었기 때문에 과학이 그런 식으로 이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그렇게 이용되었다고 해서 진짜 과학의 가능성, 피억압자들을 위한 과학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도전’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배자들의 상식에 불과한 사회의 ‘상식’에 제대로 도전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사회 전체 목소리로 만들 수 있는 지배자들의 권력 그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의 도전』이 하지 않는 질문, ‘지배자들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가 그들에 의해 억압을 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결국 언어와 이데올로기에 앞서서 존재하는 물질적인 토대, 즉 생산관계의 문제이다.

[사진: huffington post]

소수자 문제에 대해 “하나같이 몸에 대한 위계적인 해석의 결과”라고 단언하기도 하는 저자는 언어, 해석,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인 토대와 동등한 위상을 갖고 거의 자립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예를 들어, 저자가 묘사한 각종 억압과 폭력을 겪는 집단이 남성이 아니라 하필 여성으로 고착화된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임신, 출산 가능성을 남성들이 이용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답을(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했지만 남성과 평등하게 살았던 시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원래 여성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답을(그러면 여성해방은 남성을 없애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인가?) 내놓았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위해 주어진 자연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산을 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 역시 변화했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보다 설득력 있는 답이 가능하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수렵 채집 사회 및 초기농업 사회에서 여남 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가 평등했음을 밝혀냈다. 남성(수렵)과 여성(채집) 사이의 노동 분업은 존재했지만, 여성들의 활동이 사회적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남성 이상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의 발언권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생산력이 발전하고 중농업 사회로 이행하면서 신체적 힘을 보다 더 많이 필요로 하는 농기구가 사용되는 등 농업 기법의 전환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여성들은 사회적 생산에서 남성만큼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주된 식량생산자가 남성이 됨에 따라 남성이 한 혈통 집단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중요해졌으므로 부계제가 자리 잡았다. 생산력 발전은 동시에 잉여생산물과 사유재산제도를 출현시켰고, 가구 및 혈통 집단 내에서 지배계급을 위한 잉여 생산과 자원 배분을 통제하는 역할을 여성이 아닌 남성이 맡게 된 것이 여성억압의 기원이었던 것이다.

이 답은 고든 차일드, 엘리너 버크 리콕 등 많은 맑스주의 인류학자들이 과거에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제시했던 실마리를 수정, 보완, 발전시킨 결과이다. 저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맑스주의가 모든 현상을 ‘계급’으로만 환원하는 사상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만, 막상 여성억압에 대한 맑스주의의 설명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맑스주의가 물질적 토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을 물질적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폄하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 역사의 제1전제는 당연히, 살아 있는 인간 개인들의 생존”(칼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197쪽)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약하고 조건 짓는 물질적 자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를 의식적으로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인간의 능동적 실천 모두를 균형 있게 보기 위함이다. 이것이 피억압자들을 위한 과학적 세계관의 단초이다.

진짜로 ‘경계’를 없애기 위한 방법: 우리는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

저자는 페미니즘 인식론을 “모든 경계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유”로 규정한다. 그런데 경계가 현존하는 이상, 경계를 없앨 이해관계를 갖는 것은 그 경계로 인해 피억압자가 되는 사람들뿐이다. 그렇기에 경계 즉 전선을 진짜로 없애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전선을 더욱 명확히 해야 한다. 이 전선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누구를 억압자로, 누구를 피억압자로 위치 짓는지, 누가 주체가 되어 누구와 맞서야 억압의 세상이 끝나고 전선이 사라질 수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과학적 세계관이다. 우리는 지배자들을 향해 ‘과학도 정답도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의 목소리도 발화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너희가 주장하는 것은 가짜 과학이고, 우리가 물신성,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찾아낸 것이 진짜 과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여성이 혼자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어서 집을 탈출하지 못하고, 여성에게 성형수술을 종용하는 광고들이 지하철역을 도배하는 이 끔찍한 현실 속에서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을 가르는 진짜 전선은 해석과 해석,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토대 위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세계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를 변혁하자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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