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읽기 ⑨: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0
1087
[인포그래픽: 경항신문]

[연재기사 다시보기]

『자본론』 읽기 ①: 상품의 두 요소와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자본론』 읽기 ②: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자본론』 읽기 ④: 교환과정과 화폐물신성

『자본론』 읽기 ⑤: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가치의 척도, 유통수단)

『자본론』 읽기 ⑥: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축장, 지불수단, 세계화폐)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⑩: 제10장 노동일 제2~4절―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

『자본론』 읽기 ⑪: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장기간에 걸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

『자본론』 읽기 ⑫: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필요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⑬: 매뉴팩쳐―분업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⑭: 기계와 대공업(1)―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기계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⑮: 기계와 대공업(2)―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자본론』 읽기 ⑯: 기계와 대공업(3)―교육, 가족, 여성, 생태문제의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

『자본론』 읽기 ⑰: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⑱: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 왜곡하는 임금형태

『자본론』 읽기 ⑲: 단순재생산―“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었지만,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

『자본론』 읽기 ⑳: 확대재생산―“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인 자기노동에 기초한 소유가,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인 타인의 불불노동에 기초하는 더 많은 불불노동의 취득으로 전환된다.”

『자본론』 읽기 ㉑: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1)—자본가계급측의 부의 축적은 노동자 계급측의 빈궁,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의 축적이다

앞의 글 『자본론』 읽기 ⑧에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검토하였다. 맑스가 앞에서 든 예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하게 된 것은 노동력의 가치에 6노동시간이 대상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6시간을 초과하여 12시간 노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맑스는, 전자의 6시간은 자본가가 투하한 노동력의 가치의 등가물을 생산할 뿐이기 때문에 필요노동시간으로 부르고 후자의 6시간은,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자본가를 위하여 아무런 대가 없이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에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부른다.

노동일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을 더한 것이다. 노동일은 독일어로 ‘Arbeitstag’, 영어로 ‘working day’인데 하루의 노동시간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보통 노동시간이라는 용어를 쓰고 노동일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는데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섞어서 쓰도록 하겠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자본론』Ⅰ권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이어지는 제4편의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대비되는 것으로 절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지칭한다. 따라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파악하는 데에서 제10장 노동일은 매우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맑스가 『자본론』Ⅰ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 장이 셋이 있다. 제10장 노동일, 제15장 기계와 대공업,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이 그것이다. 그만큼 제10장은 맑스가 신경을 많이 쓴 부분 중 하나이다. 제10장은 다른 두 장도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폭로가 집중되어 있는 부분이다. 다른 두 장과 똑같이 제10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이자 규탄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0장을 읽는 독자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참상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10장은 또한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이 실제로 어떤 양상으로 벌어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회피하려는 자본가들의 술책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제10장은,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생생한 폭로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또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기 때문에 독자들이 주의를 기울여 꼼꼼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제10장은 앞부분 제1절에서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사이에 계급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힌다. 이런 점에서 제1절은 노동시간(노동일)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후에 자본가들이 잉여노동을 훔쳐가는 양태를 폭로하고 착취의 법적제한이 없는 영국의 산업부분들과 주간노동과 야간노동, 교대제를 폭로하고 있다. 뒷부분의 제5,6,7절에서는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제5절과 제6절은 역사적으로 전개된 반대 방향의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14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의 노동일의 연장을 위한 강제법, 법률에 의한 노동시간의 강제적 제한(1833~64년의 영국의 공장법)}을 다루고 제7절은 영국의 공장법이 타국에 준 영향을 다루고 있다. 노동시간(노동일)은 내용이 많아 『자본론』 읽기 9, 10으로 나누어 다룬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사이에 계급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부터 다루도록 하겠다.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이미 공부한 바에 의하면 필요노동시간은 노동력의 가치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노동력의 가치가 불변이라면 필요노동시간은 하나의 주어진 양이 될 것이다. 필요노동시간이 주어진 양일 때 자본가가 잉여가치의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잉여노동시간을 증가시키는 것이다(필요노동시간을 줄여 상대적으로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방법은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다룬다.). 그리고 잉여노동시간은 불변량이 아니라 가변량이다. 이에 따라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을 더한 노동시간(노동일)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노동시간(노동일)은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한도 안에서만 변동할 수 있다. 최소한도는 규정할 수 없다. 만약 잉여노동시간을 0이라고 가정하면, 하나의 최소한도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필요노동이 항상 노동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동일은 결코 이러한 최소한도까지 단축될 수는 없다.

다른 한편, 노동일에는 최대한도가 있다. 이 최대한도는 두 가지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첫째, 노동력의 육체적 한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자는 하루 중 일정한 시간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며, 일정한 시간 식사 등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정신적 한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자는 지적,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이들 욕망의 크기나 종류는 일반적인 문화수준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데 이 두 한계는 모두 매우 탄력적이어서 그 변동의 폭이 매우 크다. 가령 6시간, 8시간, 10시간, 12시간, 14시간, 16시간, 18시간 등 그 길이가 매우 다양한 노동일이 있을 수 있다.

이 노동일에 대해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입장은 정반대이다. 노동일이 증가하면 할수록 잉여가치가 증가하는 자본가계급은 노동일을 가능한 한 연장하려고 한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노동일 연장이 가져 오는 노동력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노동일의 제한(표준노동일)을 요구한다. 맑스가 『자본론』Ⅰ권을 쓸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맑스는 당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계급투쟁을 배경으로 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정반대의 입장을 『자본론』에서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현재에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자본가의 입장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그 하루의 가치로 구매했다. 1노동일 동안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자본가에게 속한다. 즉, 자본가는 하루 동안 자기를 위해 노동자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런데 1노동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쨌든 자연의 하루보다는 짧다. 얼마나 짧은가? 자본가는 이 극한[즉, 노동일의 필연적인 한계]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혼은 자본의 혼이다. 그런데 자본에게는 단 하나의 충동이 있을 따름이다. 즉, 자신을 가치증식시키며,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자기의 불변부분인 생산수단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하게 하려는 충동이 그것이다.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더 활기를 띤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자본가는 상품교환의 법칙을 들고 나온다. 그는 다른 모든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이익을 짜내려고 한다.

(『자본론』Ⅰ, 306, 307쪽, 강조는 인용자)

즉, 자본가는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활용하여 최대한 잉여가치를 짜내려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무제한 연장하여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짜내려고 한다.

이런 자본가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노동자의 입장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그런데 인용문은 맑스가 단지 상상력만으로 쓴 것은 아니고 노동일을 9시간으로 단축할 것을 요구한 1859~60년의 런던 건축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때에, 그 파업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를 토대로 쓴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판매한 상품은 [그것을 사용하면 가치가, 그것도 그 자체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창조된다는 점에서] 다른 잡다한 상품들과 다르다. 당신이 그것을 구매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당신에게는 자본의 가치증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나에게는 노동력의 초과지출로 된다. 당신과 나는 시장에서 단 하나의 법칙, 즉 상품교환의 법칙밖에 모른다. 그리고 상품의 소비는 상품을 양도하는 판매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들이는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나의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은 당신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 그것을 팔아 얻은 돈으로 매일 그것을 재생산하고, 따라서 반복해서 그것을 팔 수 있어야 한다. 연령 등에 기인하는 자연적 건강약화는 별도로 치고, 나는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상태의 힘과 건강과 원기를 가지고 노동할 수 있어야 한다. …… 나는 노동력의 정상적인 유지와 건전한 발달에 적합한 정도로만 매일 그것을 지출하고 운동시키고 노동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당신은 노동일을 무제한 연장함으로써 내가 사흘 걸려 회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노동력을 하루동안 써버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당신이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것만큼 나는 노동실체를 잃어버린다. 나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과 그것을 강탈하는 것은 전혀 상이하다. 만약 평균적인 노동자가 합리적인 양의 노동을 하면서 살 수 있는 평균기간이 30년이라면, 당신이 매일 나에게 지불해야 하는 나의 노동력의 가치는 총가치의 1/365×30, 즉 1/10,950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나의 노동력 전체를 10년 동안에 소비해 버리려고 하면서도 매일 나에게 그 총가치의 1/3,650이 아니라 1/10,950을 지불한다면, 당신은 오직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1/3만을 지불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당신은 매일 나로부터 나의 상품의 가치의 2/3를 훔치는 것이다. 당신은 3일분의 노동력을 사용하면서도 나에게는 1일분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계약에도 위반되며 또 상품교환의 법칙에도 위반된다. 그러므로 나는 정상적인 길이의 노동일을 요구한다. 더욱이 나는 당신의 동정에 호소함이 없이 그것을 요구한다. ……나는 표준노동일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나의 상품의 가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본론』Ⅰ, 307~309쪽,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노동시간(노동일)에 대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입장은 정반대이다. 자본가가 노동시간(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판매된 노동력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구매자, 판매자로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서로 맞서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때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맑스는 결론내리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섰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론』Ⅰ, 309, 310쪽, 강조는 인용자)

맑스의 이러한 결론은 제10장의 뒷부분에 서술된 구체적, 역사적 사례에 의해 설득력 있게 입증된다. 또한 맑스의 이러한 결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역사적 시기와 장소를 불문하고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계급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유를 밝혀준다.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려는 자본가계급과 이를 저지하려는 노동자계급사이에 계급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