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0
1544
[사진: https://www.ethicaltoyprogram.org/]

[연재기사 다시보기]

『자본론』 읽기 ①: 상품의 두 요소와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자본론』 읽기 ②: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자본론』 읽기 ④: 교환과정과 화폐물신성

『자본론』 읽기 ⑤: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가치의 척도, 유통수단)

『자본론』 읽기 ⑥: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축장, 지불수단, 세계화폐)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

『자본론』 읽기 ⑨: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자본론』 읽기 ⑩: 제10장 노동일 제2~4절―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

『자본론』 읽기 ⑪: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장기간에 걸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

『자본론』 읽기 ⑫: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필요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⑬: 매뉴팩쳐―분업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⑭: 기계와 대공업(1)―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기계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⑮: 기계와 대공업(2)―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자본론』 읽기 ⑯: 기계와 대공업(3)―교육, 가족, 여성, 생태문제의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

잉여가치의 생산은 『자본론』 Ⅰ권의 본론이다. 제1편에서 상품과 화폐를 다루고 제2편에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를 다루었는데 제3~5편(233~720쪽), 세 개의 편에서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다. 제3편에서는 먼저 절대적 잉여가치를 다루고, 제4편에서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다룬다. 제5편에서는 이 둘을 종합한다.

이미 제2편에서 잉여가치, 자본이라는 개념이 나왔지만 왜 잉여가치가 발생하는지는 비로소 제3편에서 밝힌다. 지난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제6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 많은 것을 해명했기 때문에 정작 잉여가치의 발생 원인을 다루는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은 쉽다.

맑스는 제7장에서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인 가치증식과정을 다루기 전에 먼저 노동과정을 다룬다. 매우 기본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노동과정

맑스는『자본론』 Ⅰ권 제1장에서 상품의 두 요소인 사용가치와 가치를 나누어 검토하고 노동을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이와 똑같이 맑스는 생산과정을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으로 나누어 검토한다. 그리고 맑스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정을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한다. 맑스는 제1장 제2절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에서 “물적 부 중 자연이 미리 제공하지 않는 모든 요소[예: 저고리, 아마포]는 언제나 [특정의 자연소재를 특정의 인간욕망에 적응시키는] 특수한 합목적적인 생산활동을 거쳐 창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 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자본론』 Ⅰ, 53쪽,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하였는데 이의 연장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자본론』 Ⅰ, 236~237쪽,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맑스는 인간의 노동은, 거미의 거미줄 치기, 꿀벌의 꿀벌집(꿀벌집을 보면 그 정교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정교함은 본능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 짓기와 달리 머리 속에서 먼저 만들 것을 상상하고 그 결과물을 만든다는 점, 합목적적이라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동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1)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 [즉, 노동 그 자체], (2) 노동대상, (3) 노동수단이다.

노동대상에는 광맥에서 채취되는 광석처럼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대상이 있고, 이미 채굴되어 세광 과정에 들어가는 광석처럼 이미 과거의 노동이 스며든 원료 형태의 노동대상이 있다.

노동수단이란, 노동자가 자기와 노동 대상 사이에 끼어 넣어 이 대상에 대한 자기의 활동의 전도체로서 이용하는 물건[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의 복합체]이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 예를 들면 면사는 여러 시대에 걸쳐 생산되었지만 처음에는 물레로 자본주의시대에는 방적기계로 생산되었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합되었다. 즉, 노동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노동자 측에서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이제 생산물 측에서는 고정된 정지성으로서 존재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노동자는 방적노동을 한 것이고, 그 생산물은 방적된 것이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여기까지 검토한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 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이렇게 노동과정을 특정 사회 형태와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나서 맑스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노동과정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할 때, 즉, 자본가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게 할 때 이루어지는데 이 노동과정은 두 가지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 자본가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한다고 가정하면, 노동력을 하루 동안 사용할 권리는, 예컨대 그가 하루 동안 임차한 말의 사용권리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에게 속한다. 상품의 사용은 상품의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노동력의 소유자,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가 판매한 사용가치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자본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의 노동력의 사용가치, 다시 말해 그것의 사용[즉, 노동]은 자본가의 것으로 된다. 자본가는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노동 그 자체를 살아있는 효모로서 [역시 그의 것인] 죽어 있는 생산물 형성요소와 결합시킨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동과정은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수단을 첨가함으로써만 노동력을 소비할 수 있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과 물건 사이의, 즉 그에게 속하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생산물은, 마치 그의 포도주 창고 속에 있는 발효과정의 생산물이 그의 것인 것과 똑같이, 그의 것이다.

가치증식과정-잉여가치의 생산과정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론』 Ⅰ권의 본론 중의 본론에 해당하는 내용이 다루어진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 부분은 예상보다 쉽다. 때문에 이해하는 데에서 커다란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치증식과정-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을 이해하는 데보다 이것을 이해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쏟을 것을 부탁하고 싶다. 한번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가치증식과정-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을 설명해본다는 생각을 갖고 연습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잉여가치론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바란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화폐단위 표현에 대해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다. 김수행 제2개역판에서는 화폐단위로 원을 쓰고 있는데 어색하여(노동력의 하루의 가치=3원) 독일어 원문에서처럼 실링으로 표현하도록 하겠다.

가치증식과정에서 편의를 위해 맑스는 가상적인 상황을 제출하고 있다.

1) 20파운드의 면화에서 노동자 1인이 12시간에 20파운드의 면사를 뽑아낸다(시간당 123파운드의 면사를 뽑아낸다.).

2) 20파운드의 면화의 가격은 20실링인데 20실링으로 표현되는 금량을 생산하는 데에는 40시간이 필요하다(1실링 당 2노동시간).

3) 20파운드의 면화에서 20파운드의 면사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4실링 만큼의 방추가 소모된다. 4실링으로 표현되는 금량을 생산하는데 8노동시간이 필요하다.

4) 노동력의 하루의 가격은 3실링인데(김수행 제2개역판에서는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실링이라고 되어있는데 엄밀하게 말해 가치가 아니라 가격이다.) 3실링으로 표현되는 금량을 생산하는 데에는 6노동시간이 필요하다. 이 노동량은 노동자의 매일 평균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가정했다.(앞의 6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5) 하루의 노동일은 12노동시간이다. 즉, 1인의 노동자는 하루에 자본가를 위해 12노동시간 일을 한다. 노동자는 6시간이 아니라 12시간 노동한다.

이러한 가상적인 상황에서 자본가는 20파운드의 면사를 뽑아내기 위해서 20파운드의 면화에 20실링, 방추 소모분에 4실링, 노동력에 3실링을 투하한다. 전체로서는 27실링을 투하한다. 여기에는 54노동시간이 대상화되어 있다.

그런데 20실링, 4실링은 그대로 면사로 이전된다. 그러므로 48노동시간(4노동일)에 상응하는 가치가 면사로 이전된다. 노동자는 12시간 노동하므로 12노동시간에 상응하는 가치를 첨가한다. 그 결과 20파운드의 면사에는 60노동시간(5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게 된다. 이것은 30실링의 가격을 갖는다(면사 1파운드 당 1.5실링).

그래서 자본가는 다음의 결과를 갖게 된다.

자본가는 3실링의 잉여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 3실링의 잉여가치는 어떻게 발생하게 된 것인가? 그것은 자본가가 노동력에 3실링을 투하했을 뿐이지만 노동자가 12시간 노동을 하여 새롭게 6실링의 가치를 첨가했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12시간이 아니라 6시간만 노동한다면 다음과 같이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잉여가치가 발생하게 된 것은 노동력의 가치에 6노동시간이 대상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6시간을 초과하여 12시간 노동하였기 때문이다.

좀더 상세하게 이 문제를 고찰해보자.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실링이었는데, 그 이유는 노동력 그 자체에는 1/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매일 요구되는 생활수단은 1/2노동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에 포함되고 있는 과거의 노동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 살아있는 노동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매일의 유지비와 노동력의 매일의 지출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양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규정하며, 후자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형성한다. ……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과정에서 노동력이 창조하는 가치는 그 크기가 다르다. …… 그러나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자본론』 Ⅰ, 256~257쪽, 강조는 인용자

결국, 노동과정에서 노동력이 창조하는 가치(6실링)는 노동력의 가치(3실링)보다 큰데 그 차액(3실링)이 잉여가치인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맑스는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과정을 고찰한 후, 잉여가치가 자본가가 상품교환의 법칙, 등가물 사이의 교환의 법칙을 따랐음에도 발생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며 제6장의 선문답 같은 말의 실체를 밝힌다.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칙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 방추, 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실링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실링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실링이나 더 많이 유통에서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과정은 유통영역의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통영역의 외부에서 수행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유통은 [생산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가치증식 과정을 준비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선의 세계에서는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자본론』Ⅰ, 258쪽, 강조는 인용자

자본가가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구매에서, 그리고 생산된 상품의 판매에서 등가교환을 하지만 그러함에도 잉여가치는 발생한다. 맑스는 이 점을 강조한다. 구매와 판매에서 등가교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제6장에서 표현한 것처럼 유통분야에서는 자유, 평등, 소유, 벤담이 지배하고 있지만, 따라서 정의와 공정이 지켜지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잉여가치, 착취가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외관상으로는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관과 달리 자본주의적 착취가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라는 것도 강조한다.

이로써 제6장의 선문답 같은 말의 실체가 밝혀졌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역할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가치[즉, 이미 대상화된 죽은 형태의 과거노동]를 자본[즉, 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가치형성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일정한 점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창조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다. 앞의 예에 의하면 6시간을 경과하면 가치증식과정이 될 것이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

이상에서 잉여가치의 생산이 해명되었다. 그런데 제3편의 제목은 그냥 잉여가치의 생산이 아니라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그리고 제4편의 제목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제3편의 제목이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지만 글의 본문에서 절대적 잉여가치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제4편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와 대비될 때이다. 『자본론』 Ⅰ, 427쪽에 두 개념의 정의가 나온다.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나는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이에 대응해 노동일의 두 부분들의 길이 변화로부터 생기는 잉여가치를 나는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제3편에서 많은 부분이 노동일에 할애되고 있는 것은 두 개념의 정의 방식에 따르면 맑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제1장 제2절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에서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을 다루었는데 다시 노동의 이중성이 나타난다. 노동자는 동일한 시간에 이중으로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 이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이중성에서 각각의 속성이 하는 역할은 서로 다르다. 노동자의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구체적 유용노동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보존, 이전한다.

노동의 단순한 양적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 이에 대한 다양한 경우들은 생략한다.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생산수단은 생산수단으로서 잃어버리는 가치만을 생산물로 넘겨준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여러 물질적 요소들은 이 점에서 서로 다르게 행동한다.

보일러를 가열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석탄은 바퀴의 축에 바르는 기름 등과 마찬가지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염료나 기타 보조재료들도 사라져 버리기는 하지만 생산물의 속성으로 다시 나타난다. 원료는 생산물의 실체를 형성하지만 그 형태는 변한다. 따라서 원료와 보조재료는 사용가치로서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의 독자적인 모습을 잃어 버린다.

도구, 기계, 공장건물, 용기 등의 진정한 노동수단은 노동과정에는 전체적으로 참여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부분적으로만 참가한다. 예컨대 어떤 기계의 가치가 1,000파운드스털링의 가치가 있고 그 기계는 1,000일 뒤에 마멸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기계의 가치는 매일 1/1,000씩 생산물로 넘어간다. 그와 동시에 비록 기계의 활동력이 점차 감퇴되기는 하지만 그 기계 전체가 노동과정에서 기능한다. 이점은 『자본론』 Ⅱ권에서 고정자본이라는 주제로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다른 한편 어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는 부분적으로 들어가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전체적으로 들어간다. 가령 면화에서 실을 뽑을 때, 115파운드의 면화에서 매일 15파운드의 낙면이 생기며, 이 낙면은 면사로 되지 못하고 오직 솜부스러기로 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15파운드의 낙면 발생이 방적의 평균적 조건 하에서는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면, 이 15파운드의 면화의 가치도 면사의 실체로 되는 100파운드의 면화의 가치와 꼭 마찬가지로 면사의 가치에 들어간다.

자본 중 생산수단[즉, 원료, 보조재료, 노동수단]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맑스는 이러한 이유로 이것을 자본의 불변부분 또는 불변자본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또 그 이상의 초과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역시 변동하며 상황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될 수 있다. 자본의 이 부분은 불변의 크기로부터 끊임없이 가변의 크기로 전환한다. 맑스는 이러한 이유로 이것을 자본의 가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가변자본이라고 부른다. 불변자본, 가변자본은 잉여가치율,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등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때문에 그 정의를 정확히 기억해두기를 바란다.

잉여가치율

S(잉여가치)/V(가변자본)는 가치증식의 비율 또는 잉여가치의 상대적 크기를 나타내는데 맑스는 이를 잉여가치율이라고 부른다.

1노동일 중 노동자가 노동력의 가치(예컨대 3실링)를 생산하는 부분에서는, 그는 자본가가 이미 그에게 투하한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을 생산할 뿐이며, 새로 창조된 가치는 투하된 가변자본의 가치를 대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3실링의 새로운 가치의 생산은 단순한 재생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맑스는 1노동일 중 이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부분을 필요노동시간으로 부르며, 이 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을 필요노동이라고 부른다.

노동과정의 제2의 기간[즉, 노동자가 필요노동의 한계를 넘어 노동하는 시간]은 노동자가 노동력을 지출해 노동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는 잉여가치를 창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자본가에게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커다란 매력을 가지고 있다. 노동일의 이 부분을 맑스는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부르고, 이 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을 잉여노동이라고 부른다.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은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과 같다. 잉여가치율 S/V=잉여노동/필요노동이다. 이 두 비율은 동일한 관계를 상이한 형태로, 즉 전자에서는 대상화된 노동의 형태로, 후자에서는 살아있는 [유동적인] 노동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율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도 또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도의 정확한 표현이다.

잉여가치율과 혼동되는 비율로 이윤율이 있는데 이윤율은 잉여가치를 가변자본이 아니라 불변자본+가변자본인 총자본으로 나눈 비율이다. 이 이윤율은 착취도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잉여가치의 원천을 은폐한다. 이 이윤율에 대해서는 『자본론』 Ⅲ 권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맑스는 제9장 뒷 부분에서 두 개의 예를 사용하여 직접 잉여가치율을 계산하고 있다. 독자들도 직접 계산해 보기를 권한다.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