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읽기 ㉓: 이른바 본원적 축적(1)—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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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이곳 저곳 떠돌다가 교수형을 당한 부랑자들의 모습을 묘사함]

[연재기사 다시보기]

『자본론』 읽기 ①: 상품의 두 요소와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자본론』 읽기 ②: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자본론』 읽기 ④: 교환과정과 화폐물신성

『자본론』 읽기 ⑤: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가치의 척도, 유통수단)

『자본론』 읽기 ⑥: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축장, 지불수단, 세계화폐)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⑨: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자본론』 읽기 ⑩: 제10장 노동일 제2~4절―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

『자본론』 읽기 ⑪: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장기간에 걸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

『자본론』 읽기 ⑫: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필요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⑬: 매뉴팩쳐―분업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⑭: 기계와 대공업(1)―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기계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⑮: 기계와 대공업(2)―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자본론』 읽기 ⑯: 기계와 대공업(3)―교육, 가족, 여성, 생태문제의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

『자본론』 읽기 ⑰: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⑱: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 왜곡하는 임금형태

『자본론』 읽기 ⑲: 단순재생산―“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었지만,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

『자본론』 읽기 ⑳: 확대재생산―“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인 자기노동에 기초한 소유가,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인 타인의 불불노동에 기초하는 더 많은 불불노동의 취득으로 전환된다.”

『자본론』 읽기 ㉑: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1)—자본가계급측의 부의 축적은 노동자 계급측의 빈궁,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의 축적이다

『자본론』 읽기 ㉒: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2)—자본주의적 축적에 대한 생생한 폭로

『자본론』 읽기 ㉔: 이른바 본원적 축적(2)-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제8편 이른바 본원적 축적은 『자본론』 Ⅰ권의 마지막 편으로 Ⅰ권을 마무리한다. 제8편은 먼저 지금까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제로 간주되던 것, 한편에서는 화폐, 생산수단, 생활수단의 소유자들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검토한다. 이러한 전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즉 자본주적 생산양식의 전사를 검토하는데 이것이 본원적 축적과정이다. 제8편은 이러한 검토 후에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것을 제32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서 검토한다. 따라서 제8편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사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후의 미래를 동시에 검토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론』 Ⅰ권은 그 자체로 완성된 저작이 아니다. Ⅱ, Ⅲ 권을 모두 읽어야 『자본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8편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사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후의 미래라는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Ⅰ권은 자본주의의 전사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라는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완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제8편은 『자본론』 Ⅰ권 전체를 완결, 마무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본원적 축적의 비밀

김수행 번역본은 시초축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독일어판에서는 ‘ursprüngliche Akkumulation’이므로 직역하면 ‘본원적 축적’이 된다. 영어로는 ‘primitive accumulation’이므로 직역하면 ‘원시적 축적’이다. 시초라는 말은 처음을 뜻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사라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독일어판을 따라 본원적 축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상당한 양의 자본과 노동력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자본주적 생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출발점인 축적을 상정해야 한다. 이것이 본원적 축적(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이전의 축적’)이다.

이 본원적 축적이 정치경제학에서 하는 역할은 원죄가 신학에서 하는 역할과 거의 동일하다. 신학에서는 아담이 사과를 따먹자 그와 동시에 죄가 인류에게 떨어졌다고 한다. 본원적 축적의 기원도 그것을 옛날의 비사로 이야기함으로써 설명되고 있다. 먼 과거에 한편에는 근면하고 영리하며 절약하는 특출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게으르고 낭비하는 불량배가 있었다. 그래서 전자는 부를 축적했으며 후자는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죄로부터 대다수의 빈곤과 소수의 부가 유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역사에서는 옛날부터 목가조가 지배해왔다. 정의와 ‘노동’은 옛날부터 유일한 치부수단이었다. 그러나 뒤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본원적 축적의 방법들은 전혀 목가적인 것이 아니었다.

화폐와 상품은 결코 처음부터 자본이 아니다. 이것들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일정한 사정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 사정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상품 소유자들이 서로 대면하고 접촉하는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앞의 『자본론』 Ⅰ권 제6장에서 언급한 것이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 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자본론』 Ⅰ, 222쪽). 한편에서는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존재하는 것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조건들이 주어진다. 자본관계는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의 소유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자본관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의 노동조건의 소유로부터 분리하는 과정 [즉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른바 본원적 축적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인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본원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자본의 전사, 그리고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전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노동자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직접적 생산자들이 농노적 예속과 길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부르주아역사가들은 이 측면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노동자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이것 이상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노동자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농노적 예속과 길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종래의 봉건제도가 제공하던 일체의 생존보장을 박탈당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수탈의 역사는 피와 불의 문자로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본원적 축적의 역사에서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프롤레타리아트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수탈하는 것은 이 전체 과정의 토대를 이룬다.

영국에서 벌이진 농촌주민으로부터의 토지 수탈

농민으로부터의 토지 수탈의 전형적 형태는 영국에서 나타났다. 그래서 맑스는 매우 상세하게 영국에서 벌어진 농촌주민으로부터의 토지 수탈을 검토한다.

영국에서는 농노제가 14세기 말에 사실상 소멸했다. 당시에는 주민의 압도적 대다수가, 15세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자유로운 자영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는 당시 소농민 경영이 우세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은 15세기의 특징인 도시의 번영과 함께 국민의 부를 발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사정이 자본형태의 부를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에 변화가 생겼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를 만든 변혁의 서곡은 15세기 마지막 1/3과 16세기의 첫 수십 년 동안 연주되었다. 우선 봉건적 가신집단이 해체됨으로써, 대량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시장에 투입되었다. 대봉건영주 자신들도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축출하고, 공유지를 횡령함으로써 훨씬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을 자극한 것은 특히 플랑드르의 양모 매뉴팩쳐의 번영과 그에 따르는 양모 가격의 등귀였다. 화폐가 모든 권력 중의 권력이 된 시대에 새로운 귀족은 경작지를 목양지로 전환하고 이들은 토지로부터 농민을 축출하였다. 이 때문에 영국의 노동계급은 어떤 과도적 중간단계도 없이 그의 황금시대로부터 철기시대로 전락하였다.

국민 대중에 대한 폭력적 수탈과정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의해 새 자극을 받았다. 수도원 등의 해산은 그곳 주민들을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시켰다. 교회의 토지는 그 대부분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에게 증여되거나, 투기적인 차지 농업가와 도시 부르주아지에게 헐값으로 팔아 넘겨졌는데, 이들은 종전의 세습적 소작인들을 대량으로 축출하고 그들의 경영지를 통합해 버렸다. 교회의 재산은 전통적 토지소유관계의 종교적 보루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 보루가 무너짐에 따라 그 토지 소유관계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17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까지도 자영농민층은 차지 농업가 계급보다 그 수가 더 많았다. 그들은 크롬웰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또 농촌의 임금노동자들까지도 공유지의 공동 소유자였다. 그러나 1750년경에 이르면 자영농민층은 사라졌고, 18세기의 마지막 십년간에 이르면 농업노동자의 공유지의 흔적까지도 없어졌다. 스튜어트 왕가의 부흥 뒤에 토지소유자들은 법적 절차를 밟아 약탈을 수행했다. 명예혁명은 윌리엄 3세와 더불어 지주적 및 자본가적 돈벌이꾼들을 지배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조심스럽게 해오던 국유지의 횡령을 방대한 규모로 실시하였다. 국유지는 불법적으로 증여되거나 헐값으로 팔아 넘겨지거나 또는 직접적 횡령에 의해 사유지에 병합되었다. 부르주아적 자본가는 토지를 자유매매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며, 대규모 농업생산의 영역을 확대하며, 농촌으로부터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급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활동을 비호하였다.

18세기에는 이전과 달리 법률자체가 국민의 공유지를 약탈하는 도구가 되었다(이전에는 입법이 150년간 이에 항쟁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약탈의 의회적 형태는 ‘공유지 엔클로저법’이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나라의 부와 대중의 빈곤이 동일한 것(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이라는 사실은 아직 19세기에서처럼 완전히 인식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당시에는 ‘공유지 엔클로저법’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결국 19세기에는 농업노동자와 공유지 사이의 관련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졌다.

맑스는 농촌주민으로부터의 토지 수탈의 마지막 예로 ‘사유지 청소’를 들고 있는데 이것의 대표적인 예로 특히 스코틀랜드 고지의 켈트인들의 토지로부터의 축출을 들고 있다. 스코틀랜드 고지의 켈트인들은 씨족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씨족은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의 소유자였다. 씨족의 대표자인 수장 또는 ‘대인’은 이 토지의 명목상 소유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의 권위로 토지에 대한 그들의 명목상의 소유권을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시켰으며, 씨족 원들의 반항에 봉착하자 공공연한 폭력으로 씨족 구성원들을 토지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했다. 맑스는 19세기에 사용된 이러한 방법의 한 예로서 서덜란드 공작부인이 실시한 ‘청소’를 예로 들고 있다. 이 인물은 씨족의 수장이 되자 서덜란드 주 전체를 목양지로 전환시킬 것을 결심했다. 1814년부터 1820년까지 15,000명의 주민, 약 3,000세대의 가족은 체계적으로 축출되고 소탕되었다. 그들의 모든 촌락은 파괴되고 소각되었으며 모든 경지는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자기의 오두막집에서 떠나기를 거부한 노파는 불길 속에서 타 죽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귀부인은 추방된 주민에게 한 가족당 2에이커씩 약 6,000에이커의 토지를 해변에 배당했다. 이 6,000에이커의 토지는 종전에는 황무지였으며 소유자에게 아무런 수입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이 귀부인은 씨족민들에게 에이커당 2실링 6펜스의 지대로 소작을 주었다. 씨족 민들로부터 약탈한 전체 토지를 이 귀부인은 20개의 대규모 차지목양지로 분할했다. 해변에 추방된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알아챈 대인들이 해변조차 런던의 큰 생선장수들에게 임대하여 게일인들은 다시금 추방되었다. 이미 경작지에서 목양지로 전환된 토지들 중 일부는 나중에 더 수익성이 좋은 사슴 사냥처로 재전환되었다!

이상이 바로 본원적 축적의 방법들이었다. 이것들은 이처럼 매우 목가적인 방법이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으며, 토지를 자본에 결합시켰으며, 도시의 산업을 위해 그것에 필요한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공급하게 되었다.

15세기 말 이후의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임금인하를 위한 법령들

봉건적 가신집단들의 해체, 폭력적 토지수탈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신흥 매뉴팩쳐에 흡수될 수는 없었다. 또한 이들은 갑자기 새로운 환경의 규율에 순응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대규모로 거지, 도둑, 부랑자로 되었는데, 그 중 일부는 자기의 성향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전체 기간을 통해 서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부랑자에 대한 피의 입법이 실시되었다.

영국에서 이러한 입법은 헨리 7세의 통치 시에 시작되었다.

헨리 8세, 1530년: 늙고 노동능력 없는 거지는 거지면허를 받는다. 그와는 반대로 건장한 부랑자는 태형과 감금을 당한다. 그들을 달구지 뒤에 결박되어 몸에서 피가 흐르도록 매를 맞고 그 다음에 그들의 출생지 또는 그들이 최근 3년간 거주한 곳으로 돌아가 ‘노동에 종사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헨리 8세 제27년의 법령은 이 법령을 반복했는데, 거기에 새로 더 보충해 한층 더 가혹하게 만들었다. 부랑죄로 두 번 체포되면 다시 태형에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세 번 체포되면 그는 중죄인으로 또 공동체의 적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맑스는 이후의 잔혹한 입법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어 부랑자로 된 농촌주민들은 그 다음에는 무시무시한 법령들에 의해 채찍과 낙인과 고문을 받으면서 임금노동의 제도에 필요한 규율을 얻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적 발생 시기에 신흥부르주아지는 임금을 ‘규제’하기 위해[임금을 이윤획득에 적합한 범위 안으로 억압하기 위해], 노동일을 연장하기 위해, 노동자 자신을 자본에 정상적인 정도로 종속시켜 두기 위해, 국가권력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것을 이용했다. 이것이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하나의 본질적 측면이다.

14세기 후반에 발생한 임금노동자 계급은 당시에도 그리고 그 다음 백년간에도 주민의 매우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의 지위는 농촌의 자립적 소농민경영과 도시의 길드 조직에 의해 강력히 보호되고 있었다. 농촌에서나 도시에서나 고용주와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은 다만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즉, 생산방식 자체는 아직 진정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았다. 자본 중 가변자본의 요소가 불변자본의 요소에 비해 큰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임금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의 축적과 함께 급속히 증가했는데, 임금노동의 공급은 완만하게 뒤따라가는 데 불과했다. 국민생산물의 많은 부분이 뒤에는 자본의 축적재원으로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노동자의 소비재원으로 들어갔다.

(『자본론』 Ⅰ, 1,014쪽)

임금노동에 관한 입법은 처음부터 노동자의 착취를 목적으로 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노동자계급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노동법이 노동일의 강제적 연장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경우는 이미 제10장 제5절에서 고찰했기 때문에 맑스는 생략하고 있다. 임금노동에 관한 입법에 의해 도시와 농촌에 대해서도 성과급 노동과 일급 노동에 대해서도 임금률이 확정되었다. 농촌 노동자는 1년 기간으로, 도시노동자는 ‘공개시장’에서 고용되어야 했다. 법률로 정한 임금보다 많이 지불하는 것은 금고형으로 금지되었는데,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은 그것을 지불하는 것보다 더 엄한 처벌을 받았다. 1360년의 법령은 이 형벌을 한층 더 엄하게 했으며, 심지어 육체적 처벌을 사용해 법정임금률로 노동을 착취할 권한까지 고용주에게 주었다. 석공과 목공이 서로 연합해 맺는 모든 결사, 계약, 서약 등은 무효로 선포되었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14세기로부터 [단결금지법이 폐지된] 1825년까지 중죄로 취급되었다. 1349년의 노동자 법령 및 그 뒤에 제정된 모든 법령의 정신은 국가가 임금의 최고한도는 제정하지만 결코 그 최저한도는 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진정한 매뉴팩쳐 시기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충분히 강화되었기 때문에 임금에 대한 법적 규제를 실시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또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옛날 무기창고의 이 무기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처음으로 법정 최고임금이 아니라 법정 최저임금이 제안된 것은 1796년이었다. 1813년에 임금규제에 관한 법령들이 폐지되었다. 자본가가 자기의 사적 입법에 의해 자기 공장을 규제하기 시작했으며, 또 농촌 노동자의 임금을 구빈세에 의해 불가결한 최저한도까지 보충해 주게 되자, 그러한 법령들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하는 가혹한 법령들은 1825년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가 위협적인 것으로 되자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분적으로만 폐지되었을 뿐이다. 구 법령들의 일부 잔재들은 1859년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이러한 양상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영국 의회는 다만 어쩔 수 없이 대중의 압력에 못 이겨 파업과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법령들을 단념하게는 되었지만, 이것은 의회자체가 500년 동안이나 파렴치한 이기주의로 [노동자를 반대하는] 자본가들의 상설조합의 지위를 고수한 뒤에 나타난 일이다.

영국에서의 양상은 프랑스에서도 나타났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혁명의 폭풍이 불고 있는 바로 그 기간에, 노동자들이 겨우 방금 쟁취한 결사의 권리를 그들로부터 다시 탈취하려고 하였다. 1791614일의 포고에 의해 그들은 노동자의 일체의 단결을 자유와 인권선언에 대한 위반이며, 500리브르의 벌금과 1년간의 시민권 박탈로 처벌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을 국가의 공권력으로 자본에 유리한 한계 안으로 제한하는 이 법령은 여러 차례의 혁명과 왕조의 교체를 겪고도 존속했다. 공포정치조차도 이것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법령은 맑스가 『자본론』 Ⅰ권을 쓸 당시쯤에야 비로소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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