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읽기 ⑳: 확대재생산―“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인 자기노동에 기초한 소유가,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인 타인의 불불노동에 기초하는 더 많은 불불노동의 취득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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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읽기 ①: 상품의 두 요소와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자본론』 읽기 ②: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자본론』 읽기 ④: 교환과정과 화폐물신성

『자본론』 읽기 ⑤: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가치의 척도, 유통수단)

『자본론』 읽기 ⑥: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축장, 지불수단, 세계화폐)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⑨: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자본론』 읽기 ⑩: 제10장 노동일 제2~4절―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

『자본론』 읽기 ⑪: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장기간에 걸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

『자본론』 읽기 ⑫: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필요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⑬: 매뉴팩쳐―분업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⑭: 기계와 대공업(1)―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기계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⑮: 기계와 대공업(2)―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자본론』 읽기 ⑯: 기계와 대공업(3)―교육, 가족, 여성, 생태문제의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

『자본론』 읽기 ⑰: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⑱: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 왜곡하는 임금형태

『자본론』 읽기 ⑲: 단순재생산―“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었지만,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

단순재생산에 이어 지금부터는 확대재생산을 검토한다.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사용하는 것, 즉,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을 자본의 축적이라고 부른다.

확대된 규모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이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 전환

축적의 예시: 만약 어떤 방적업자가 10,000파운드의 자본을 그 중 4/5(8,000파운드)는 면화, 기계 등등으로, 그리고 1/5(2,000파운드)은 임금으로 투하해 매년 12,000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240,000파운드의 방사를 생산한다고 가정하자. 잉여가치율은 100%이므로 잉여가치는 40,000파운드의 방사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판매에 의해 실현될 2,000파운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 취득한 2,000파운드라는 이 금액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방적업자는, 기타 모든 사정이 불변이라면, 그것의 4/5(1,600파운드)를 면화 등등의 구입에, 그리고 1/5(400파운드)을 새로운 방적공의 고용에 투하해야 하는데, 이 추가적 방적공은 방적업자가 그에게 지불한 가치만큼의 생활수단을 시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2,000파운드의 이 새로운 자본은 방적공장에서 기능해 다시 40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가져올 것이다. 이 400파운드의 잉여가치가 또 자본화해 제2의 추가자본으로 전환하면 이것이 또 다시 8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가져올 것이다. 이 과정은 이와 같이 계속될 것이다(위의 예에서는 고찰을 단순화하기 위하여 잉여가치 중 자본가 자신이 소비하는 부분은 무시되었다.).

이 경우 최초의 자본은 10,000파운드의 투하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 소유자는 이것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가? 정치경제학의 대변자들은 한결 같이 그것은 “그 자신의 노동과 그의 선조들의 노동에 의해서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즉, 자기나 선조의 노동에 의해 자본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0파운드의 추가자본의 출처가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미 보았듯이 이것은 자본화된 잉여가치이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남의 불불노동에 유래하지 않는 가치라고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제1의 추가자본 2,000파운드의 축적의 전제는 10,000파운드의 가치액이다. 한편 제2의 추가자본 400파운드의 전제는 그에 선행한 제1의 추가자본 2,000파운드의 축적일 뿐이며, 그것이 낳은 잉여가치가 자본화된 것이 바로 제2의 추가자본이다. 과거의 불불노동의 소유가 이제는 [계속 증대되는 규모의] 살아 있는 불불노동의 취득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다.

제1의 추가자본을 이루는 잉여가치는 상품교환의 법칙을 따라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한 결과이다. 등가교환이 이루어졌음에도 잉여가치가 발생한 것이다. 제2의 추가자본도 제1추가자본의 단순한 결과이다. 따라서 또 각 개별 거래는 상품교환의 법칙에 순응해 행해지며,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을 구매하고 노동자는 항상 그것을 그 진정한 가치대로 판매한다. 이렇게 볼 때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에 기초한 취득의 법칙 또는 사적 소유의 법칙은 자체의 내부적인 불가피한 변증법에 의해 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환된다.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인 자기노동에 기초한 소유가,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인 타인의 불불노동에 기초하는 더 많은 불불노동의 취득으로 전환된다. 최초의 행위인 등가물과 등가물의 교환은 일변해 오직 외관상의 교환으로 된다. 왜냐하면, 첫째로 노동력과 교환된 자본 그 자체는 [등가물 없이 취득한] 타인노동의 생산물의 일부에 불과하며(위의 예에서 제1추가자본 2,000파운드, 제2추가자본 400파운드), 둘째로 이 자본은 그 생산자인 노동자에 의해 대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잉여물이 첨가되어 대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제1추가자본의 경우에 400파운드의 잉여물, 제2추가자본의 경우에 80파운드의 잉여물).

이와 같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관계는 유통과정에만 속하는 단순한 외관일 따름이며, [거래 그 자체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고 도리어 그것을 모호하게 할 뿐인] 단순한 형태에 불과하며, 그것의 내용은 자본가가 이미 대상화된 타인노동의 일부를 아무런 등가물도 지불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교환한다는 것이다. 최초에는 소유권이 한 인간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와 같이 가정해야 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는 오로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상품소유자들이 서로 대면하며, 그리고 남의 상품을 취득하는 수단은 오직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는 것뿐인데, 이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얻는 유일한 길은 노동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가 이제는, 자본가의 측에서는 타인의 불불노동 또는 그 생산물을 취득하는 권리로 되며, 노동자의 측에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취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된다. 노동과 소유의 분리는 노동과 소유의 동일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법칙의 필연적 결과로 된다.

(『자본론』 Ⅰ, 779, 780쪽, 강조는 인용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단순재생산의 경우에도 모든 자본은, 그 최초의 기원이 무엇이든, 축적된 자본[즉 자본화한 잉여가치]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생산의 홍수 속에서 최초의 총투하자본은 직접적으로 축적된 자본과 비교하면 무한소량이다.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에 관한 경제학상의 잘못된 이해

축적에 관한 더 깊은 연구로 들어가기 전에, 고전파경제학에 의해 도입된 하나의 모호한 점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 말하듯이 부르주아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소비해 버리는’ 옛날 봉건귀족들의 일상적인 생활방식에 반대해, 자본의 축적을 시민의 첫째가는 의무라고 선포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화폐퇴장과 혼동하는, 따라서 또 축적된 부를 그 현재의 현물형태의 파괴를 모면한 부(즉, 소비되지 않은 부) 또는 유통에 들어가지 않은 부라고 간주하는, 세속적인 편견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고전파경제학이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잉여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을 축적 과정의 특징적 계기로 강조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축적을 단순히 생산적 노동자에 의한 잉여생산물의 소비로서 묘사하는 것, 즉 잉여가치의 자본화는 단순히 잉여가치를 노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유행시켰다. 리카도와 그 이후의 모든 정치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뒤를 따라 되풀이하고 있는 주장, 즉 “수입 중 자본에 추가되는 부분은 생산적 노동자에 의해 소비된다”는 주장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이러한 관념에 의하면, 자본으로 전환되는 전체 잉여가치는 가변자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에 추가되는 부분은 처음에 투하된 자본과 같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분할된다. 애덤 스미스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기의 분석에 의해 다음과 같은 엉터리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즉, 각 개별 자본은 불변적 구성 부분과 가변적 구성부분으로 분할되지만, 사회의 자본은 전적으로 가변자본으로만 분해될 수 있으며(스미스의 도그마), 따라서 사회의 자본은 전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재생산과정 따라서 또 축적의 분석에서 자기의 선행자들 특히 중농주의자들에 비해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저하게 후퇴하고 있다. 그가 정치경제학에 남긴 황당한 또 하나의 교리는 상품의 가격이 임금과 이윤(이자)과 지대로, 즉 오직 임금과 잉여가치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제2권 제3편과 제3권에서 더 상세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잉여가치가 자본과 소득으로 분할

단순재생산에서는 잉여가치를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재원으로만 고찰했고, 바로 앞에서는 축적 재원으로서만 고찰했다. 그러나 실제로 잉여가치는 동시에 두 가지를 겸한 것이다. 잉여가치의 일부는 자본가에 의해 수입으로 소비되고 다른 부분은 자본으로 사용된다.

잉여가치의 양이 일정한 경우에는, 이 분할의 비율이 축적의 크기를 결정한다. 자본가가 인격화된 자본인 한, 그의 활동 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여 그리하여 무자비하게 인류에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발전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의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새벽에는 치부욕과 탐욕이 지배적인 열정이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향락의 세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투기와 신용제도의 형태로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많은 원천을 개발한다. 일정한 발전 정도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낭비는 부의 과시로서 또 신용획득의 수단으로서 ‘운이 나쁜’ 자본가의 사업상의 필요로까지 된다.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 중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고전파 경제학은 부의 출산의 진통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 순간도 잘못 생각하지는 않았다.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가의 역사적 기능을 진지하게 취급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속류 경제학은 자본에 대해 아첨을 할 뿐이었다. 『자본론』 Ⅰ권 제9장 제3절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최후의 한 시간’이 자본에게 이윤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노동일의 단축은 자본가로부터 모든 이윤을 뺏어갈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본가에게 아첨했던 시니어는, 이보다 바로 1년 전에 자본이라는 말을 절제라는 말로 바꾸었다. 그에 의하면 “곡물이 식량으로 모두 소비되지 않고 일부가 종자로 파종될 수 있는 것은 자본가의 절제 때문이다. 포도주가 발효를 위해 일정한 기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자본가의 절제 때문이다. ”(자본론』Ⅰ, 814쪽) 맑스는 이 속류 경제학자의 아첨에 대해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조롱조로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그와 반대되는 행동의 ‘절제’로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이 속류경제학자의 머리 속에는 없다. 먹는다는 것은 단식의 절제, 간다는 것은 서 있는 것의 절제, 노동은 나태의 절제, 나태는 노동의 절제 등등이다. 그들은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본론』 Ⅰ, 814쪽)

이른바 노동기금

맑스는 제24장에서 잉여가치가 자본과 소득으로 분할되는 비율과는 관계없이 축적의 규모를 결정하는 사정들을 몇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제24장의 마지막 절은 이른바 노동기금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항상 사회적 자본을 고정적인 능률을 가진 고정적인 크기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이 편견은 속물적인 제레미 벤담에 의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다. 이 교리는 벤담 자신과 맬더스, 제임스 밀 및 매컬록 등등이 변호론적인 목적을 위해, 특히 가변자본을 고정적인 크기로 묘사하기 위해 이용했다. 이 교리에 의해 가변자본이 노동자들을 위해 대표하는 생활수단의 양 또는 이른바 노동기금은 사회적 부 중 자연법칙에 의해 고정되어 변경될 수 없는 특수부분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노동자의 수도 노동력의 가격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의 도그마인데 이 도그마는 노동자의 임금억제나 임금삭감의 구실로 사용되었다. 이 도그마에 의하면 노동기금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노동자들이 임금임상을 쟁취하면 노동자의 수를 줄여야 하고 노동자의 수를 늘리면 임금은 인하되어야 하는 것으로 된다. 이 도그마에 의하면 노동조합운동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헛된 일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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