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읽기 ⑰: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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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읽기 ①: 상품의 두 요소와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자본론』 읽기 ②: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자본론』 읽기 ④: 교환과정과 화폐물신성

『자본론』 읽기 ⑤: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가치의 척도, 유통수단)

『자본론』 읽기 ⑥: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축장, 지불수단, 세계화폐)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⑨: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자본론』 읽기 ⑩: 제10장 노동일 제2~4절―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

『자본론』 읽기 ⑪: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장기간에 걸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

『자본론』 읽기 ⑫: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필요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⑬: 매뉴팩쳐―분업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⑭: 기계와 대공업(1)―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기계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⑮: 기계와 대공업(2)―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자본론』 읽기 ⑯: 기계와 대공업(3)―교육, 가족, 여성, 생태문제의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

『자본론』 읽기⑱: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 왜곡하는 임금형태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대한 검토를 끝낸 후 맑스는 제5편에서 둘을 종합하여 비교하고 또 상호관련 속에서 검토한다. 맑스는 먼저 생산적 노동의 개념부터 검토한다.

생산적 노동

(a) 노동과정의 관점에서의 생산적 노동

맑스는 『자본론』 Ⅰ권 제7장에서 생산과정을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즉, 맑스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정을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검토한 후 가치증식과정을 검토하였다. 노동과정을 검토할 때 맑스는 다음과 같이 생산적 노동을 언급하였다. “노동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나타나고,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자본론』 Ⅰ, 240쪽) 그런데 생산적 노동의 개념은, 생산물이 개인적 생산자의 직접적 생산물로부터 하나의 사회적 생산물, 또는 집단적 노동자의 공동생산물로 전환할 때 확장된다. 이때 생산적으로 노동하기 위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직접 노동대상에 손을 댈 필요는 없으며, 집단적 노동자의 한 기관이 되어 그 부속기능의 하나를 수행하면 충분하다.

(b) 가치증식과정의 관점에서의 생산적 노동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산적 노동의 개념은 더욱 협소해진다. 가치증식과정의 관점에서는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 또는 자본의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예컨대 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두뇌를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학교 소유자의 치부를 위해 헌신하는 경우에만 생산적 노동자다. 그러므로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은 노동활동과 그 유용효과 사이의 관계[즉 노동자와 그의 노동생산물 사이의 관계]를 내포할 뿐 아니라, 특수한 사회적 생산관계[즉 노동자에게 자본의 가치증식의 직접적 수단이라는 낙인을 찍는 그러한 역사적 생산관계]도 내포한다. 이런 측면에서 맑스의 말처럼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

(c) 생산적 노동자에 대한 정의의 변화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은 언제나 잉여가치의 생산을 생산적 노동자의 결정적 특성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의 본질에 대한 견해가 변함에 따라 생산적 노동자에 대한 정의도 변했다. 예컨대 중농주의자들은 농업노동만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농업노동만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공업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이었다. 이에 대해 스미스를 위시한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은 공업노동 역시 생산적 노동으로 보고 여기에서 국부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상호관련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자본주의체제의 일반적 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는, 노동일은 처음부터 두 개의 부분, 즉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잉여노동을 연장하기 위해 [임금의 등가를 더욱 짧은 시간에 생산하는] 방법에 의해 필요노동이 단축된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일의 길이에만 관심을 가지며, 그 반면에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의 기술적 과정과 사회의 인적 편성을 철저히 변혁시킨다.

따라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 생산방식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의 토대 위에서 그 자신의 방법, 수단 및 조건을 만들어 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한다. 이 발전의 과정에서 형식적 종속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종속으로 대체된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방법은 동시에 또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사실상 노동일의 무제한 연장은 대공업(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의 독특한 산물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어떤 생산부분 전체를 정복하자마자, 그것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기를 그만둔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사이의 구별은 환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넘는 노동일의 절대적 연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절대적 잉여가치이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필요노동시간을 노동일의 일부로 제한할 수 있게 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상대적 잉여가치이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변동에 주의를 돌린다면 이 외관상의 동일성은 소멸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일단 확립되어 일반적 생산방식으로 되자마자,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사이의 차이는 잉여가치율을 올리는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드러난다. 노동력이 그 가치대로 지불된다고 전제하면, 노동의 생산성 및 그 표준강도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가치율은 노동일의 절대적 연장에 의해서만 제고될 수 있다. 다른 한편,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가치율은 필요노동시간이 감소하는 것에 의해서만 제고될 수 있는데, 이것은 노동생산성 또는 노동강도의 증가를 전제한다.

자본관계의 토대 및 출발점이 되는 기존의 노동생산성은 단지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수천 세기를 포괄하는] 역사의 선물이다.

잉여노동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만약 노동자가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자기의 시간 전부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에게는 제3자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시간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이 자신들의 노동에 의해 시초의 동물상태로부터 벗어나고 그리하여 그들의 노동이 이미 어느 정도 사회화되고 나서 비로소, 어떤 사람의 잉여노동이 다른 사람의 생존 조건으로 되는 그러한 상황이 발생한다.

사회적 생산의 발전 정도가 높든 낮든, 노동생산성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이 자연적 조건은 모두 인간 그 자체의 특성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으로 환원될 수 있다. 외부적 자연조건은 경제적으로 두 개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1) 생활수단 형태의 자연의 부. 즉 비옥한 토지와 물고기가 많은 하천 등등.

(2) 노동수단 형태의 자연의 부. 즉 폭포, 항해가능한 하천, 산림, 금속, 석탄 등등.

문명의 초기에 결정적 의의를 가진 것은 첫 번째 부류이며, 더 높은 발전 단계에서 결정적 의의를 가진 것은 두 번째 부류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로 하면, 잉여노동의 크기는 노동의 자연적 조건, 특히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변동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가장 비옥한 토지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에 가장 적합하다는 반대의 명제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풍요로운 자연은 ‘지나치게 보호받는 어린 아이처럼 인간을 자연의 손안에 놓아주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연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발전시킬 하등의 필요성도 갖지 않도록 만든다. 자본의 모국은 식물이 무성한 열대지방이 아니라 온대지방이다. 토지의 절대적 비옥도가 아니라 토양의 차이, 토지의 천연산물의 다양성, 계절의 변화야말로 사회적 분업의 자연적 기초를 이루는 것이며, 그것들이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변경을 통해 인간을 자극시켜 인간 자신의 욕망이나 능력이나 노동수단이나 노동양식을 다양화시키는 것이다.

유리한 자연조건은 그 자체로서는 오직 잉여노동[따라서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의 가능성을 제공할 따름이고 결코 그 현실성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맑스는 사고야자 나무가 숲 속에서 야생하고 있는 동인도 여러 섬의 주민을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령 동인도의 빵 채취자가 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매주 12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유리한 자연조건이 그에게 주는 직접적 선물은 여가시간이다. 만약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도입된다면, 이 정직한 인간이 1노동일의 생산물을 얻기 위해서는 아마 매주 6노동일을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되는 것은 자연의 풍요로움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그는 1노동일은 자신을 위해서, 5노동일은 자본가를 위해서, 그래서 총 6노동일을 자본가를 위해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발전한 사회적 노동생산성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의해 규제되는 노동생산성도 [노동이 합체하는] 자본의 생산성이라는 외관을 띤다.

잉여가치의 발생 원인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태도

리카도는 잉여가치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잉여가치를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것은 그의 눈에는 사회적 생산의 자연적 형태이다.]에 내재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의 학파는 노동의 생산력이 잉여가치 발생의 원인이라고 외쳤다. 이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가치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지나치게 탐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맑스는 이들보다도 더 후퇴한 존 스튜어트 밀의 궤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은데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노동력의 가격과 잉여가치의 양적 변동

노동력의 가격과 잉여가치의 상대적 크기는 (1) 노동일의 길이, (2) 정상적인 노동강도, (3) 노동생산성, 이 세 가지의 변동을 반영하여 결정된다. 맑스는 여러 가지 경우들을 검토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기 바라며 특기할 만한 사항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1)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강도는 불변인데 노동생산성이 가변인 경우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노동력의 가치는 떨어지고 잉여가치는 늘어난다. 이때 노동력의 가격은, 노동생산성이 제고되면, 노동자의 생활수단의 양의 동시적이며 계속적인 증가를 동반하면서 끊임없이 저하할 수 있다. 즉, 명목임금은 실질임금의 상승을 동반하면서 하락할 수 있다.

책에서 다룬 이 경우의 세 가지 법칙을 처음으로 엄밀하게 만든 것은 리카도였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는 이 법칙들이 적용되는 특수한 조건들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이고 유일한 조건들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강도의 어떤 변동도 인식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노동생산성이 유일한 가변적인 요인이었다. 둘째 리카도는 결코 잉여가치 그 자체를 연구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이 결점 때문에 그는 잉여가치율에 대한 법칙들을 이윤율에 대한 법칙과 혼동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윤율은 [잉여가치율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사정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맑스는 제3권 제3장 이윤율과 잉여가치율 사이의 관계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2)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생산성은 불변인데 노동강도가 가변인 경우, (3) 노동생산성과 노동강도는 불변인데 노동일의 길이가 가변인 경우

생략

(4) 노동의 지속 기간, 생산성 및 강도가 동시에 변동하는 경우

이 경우의 수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맑스는 여기서 두 개의 중요한 경우들만을 검토한다.

(a) 노동생산성이 감소하는 동시에 노동일이 연장되는 경우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토지 비옥도의 감소로 토지생산물을 등귀시키는 노동생산성의 감소가 노동일의 연장과 동시에 벌어지는 경우이다. 1799년부터 1815년에 이르는 기간에서 영국에서는 생활수단의 가격이 등귀한 결과 실질 임금은 하락하였지만 명목임금은 인상되었다. 이로부터 웨스트와 리카도는 농업노동의 생산성의 감소가 잉여가치율의 저하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그들은 이 가정을 임금, 이윤, 지대의 상대적 크기에 대한 중요한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실제로는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일의 강제적 연장으로 잉여가치는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증가했다.

(b) 노동의 강도와 생산성이 증가하는 동시에 노동일이 단축되는 경우

노동생산성의 증가와 노동강도의 증대는 모두 노동자가 노동일 중에서 자기의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부분을 단축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형태가 폐지되면 노동일은 필요노동만으로 국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필요노동의 범위는 확대되어 노동일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그의 기대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잉여노동의 일부가 필요노동으로, 즉 사회적 예비재원과 축적재원의 형성에 필요한 노동으로 계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할수록 노동일은 더욱더 단축될 수 있으며, 노동일이 단축되면 될수록 노동강도는 더욱더 강화될 수 있다. 노동의 강도와 생산성이 주어져 있을 때에는, 노동이 사회의 모든 노동가능인구들 사이에 더욱 균등하게 분배되면 될수록, 또한 노동의 부담을 자기 자신의 어깨로부터 다른 사회계층의 어깨로 전가시키는 특수계층의 권력을 더욱 많이 박탈하면 할수록, 사회적 노동일 중 물질적 생산에 바쳐야 할 시간은 그만큼 더 짧아지며, 따라서 한 사회가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적, 사회적 활동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더 증가할 것이다. 노동일 단축의 절대적 최소한계는,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노동의 보편화에 있다.

[사진: nbcnews]

잉여가치율을 표시하는 여러 가지 공식

이미 본 바와 같이 잉여가치율은 다음과 같은 공식들로 표시된다.

Ⅰ. 잉여가치/가변자본(S/V)=잉여가치/노동력의 가치=잉여노동/필요노동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파생적 공식을 만나게 된다.

Ⅱ. 잉여가치/노동일=잉여가치/생산물의 가치=잉여생산물/총생산물

그런데 Ⅱ에서는 현실의 노동착취도 즉 잉여가치율이 잘못 표현되고 있다. 노동일을 불변의 크기로 간주하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방법은 공식Ⅱ의 사용에 의해 확립되었다. 왜냐하면 이 공식에서는 잉여노동은 언제나 일정한 크기의 노동일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가치생산물의 분할에만 주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가치생산물에 이미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일은 언제나 일정한 길이를 가진 노동일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식Ⅱ가 자본관계를 은폐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잉여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가치생산물의 부분들로 표현하는 방법[물론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그 의의는 뒤에 해명하겠지만]은 자본관계의 독특한 성격[즉 가변자본은 살아있는 노동력과 교환되며 따라서 노동자는 생산물로부터 배제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 표현방법은 자본관계를 폭로하는 대신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물의 형성에 각자가 공헌한 몫에 따라 생산물을 상호 분배한다는] 하나의 연합관계인 듯한 그릇된 외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본론』 Ⅰ, 718쪽, 강조는 인용자)

, 공식는 착취관계를 은폐하고 마치 임금은 노동자가,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생산물의 생산에 공헌한 것에 대한 각각의 대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맑스는 자본론』 Ⅲ권 제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세하게 폭로한다.

맑스는 이어 세 번째의 공식을 다음과 같이 표시하고 있다.

Ⅲ. 잉여가치/노동력의 가치=잉여노동/필요노동=불불노동/지불노동

불불노동/지불노동은 다만 잉여노동/필요노동의 통속적 표현에 불과하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사용하는 기간은 두 기간으로 나누어진다. 한 기간에는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의 가치에 해당하는 가치만을 생산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노동력의 가격을 투하해 동일한 가격의 생산물을 받는다. 다른 기간 즉 잉여노동의 기간에는 노동력의 사용은 자본가를 위한 가치를 창조하는데, 자본가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는다. 이 경우 그는 노동력의 이 지출을 무상으로 획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잉여노동을 불불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은 아담 스미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노동에 대한 지배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불불노동에 대한 지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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