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읽기 ⑪: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장기간에 걸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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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856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건설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행진을 했다.]

[연재기사 다시보기]

『자본론』 읽기 ①: 상품의 두 요소와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자본론』 읽기 ②: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자본론』 읽기 ④: 교환과정과 화폐물신성

『자본론』 읽기 ⑤: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가치의 척도, 유통수단)

『자본론』 읽기 ⑥: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축장, 지불수단, 세계화폐)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⑨: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자본론』 읽기 ⑩: 제10장 노동일 제2~4절―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

『자본론』 읽기 ⑫: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필요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⑬: 매뉴팩쳐―분업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⑭: 기계와 대공업(1)―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기계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⑮: 기계와 대공업(2)―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자본론』 읽기 ⑯: 기계와 대공업(3)―교육, 가족, 여성, 생태문제의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

제10장의 제5, 6, 7절에서는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제5절과 제6절은 그 방향이 정반대이다. 제5절은 14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의 노동일의 연장을 위한 강제법을 다루고 제6절은 1833~1864년의 영국의 공장법에 의한 노동 시간의 강제적 제한을 다룬다.

자본주의의 성립초기까지는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역관계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가 낮아 노동자의 수 자체가 적었고 노동력 시장에서 구매자인 자본가가 우세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기계제 대공업 이후 16시간 전후에 이를 정도로 노동시간이 연장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성립초기에는 자본가조차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12시간 노동일이 자본가의 희망이기조차 했었을 정도였다. 자본이 생성되고 있던 맹아상태[즉, 아직은 경제관계의 힘 만에 의해서는 충분한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할 수 없어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상태]에서의 자본의 요구는 매우 겸손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을 다룰 때 먼저 이러한 시기의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부터 다룬다.

(a) 14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의 노동일의 연장을 위한 강제법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의 결과 ‘자유로운’ 노동자가(자유로운 노동자 개념에 대해서는 앞의 글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사회적 조건에 강제되어 자발적으로 그의 일상적 생활수단의 가격을 받고 자기의 활동적인 생활시간 전체를 [또는 자기의 노동능력 자체를] 팔아넘기게 되기까지에는, 즉, 한 접시의 팥죽에 자기의 장자의 권리를 팔아넘기게 되기까지에는 수세기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14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 자본이 국가권력에 의해 성인노동자들에게 강요하려고 했던 노동일의 길이는, 19세기 후반에 아동의 피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가 설정한 노동일의 길이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초의 노동법규(에드워드 3세 제23년, 1349년)는 노동일의 한계와 적절한 노동임금을 정하였다. 이것은 1496년(헨리 7세 치하)의 법률에서도 반복되었다(이 시기의 법률들은 임금의 최고한도를 정한, 임금인하를 위한 법령들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본론』 Ⅰ권 제28장 ‘15세기 말 이후의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임금인하를 위한 법령들’에서 다루어진다). 이 법률에 의하면, 모든 수공업노동자와 농업노동자의 노동일은 3월부터 9월까지는 아침 5시부터 저녁 7~8시까지로 되어 있었으나 엄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식사시간은 아침식사에 1시간, 점심에 112시간, 또 오후 4시의 간식에 12시간으로, 맑스가 『자본론』을 쓰던 당시의 공장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의 꼭 2배였다. 겨울에는 식사시간은 마찬가지지만 노동은 아침 5시부터 어두울 때까지였다. 1562년의 엘리자베스의 법령은 ‘일당이나 주당 임금으로 고용되는’ 노동자의 노동일의 길이는 그대로 둔 채 중간의 휴식시간을 여름에는 2시간 반, 겨울에는 2시간으로 제한하려 했다. 이 법령은 점심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하고, ‘12시간의 낮잠’을 5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만 허가했다.

(b) 법률에 의한 노동 시간의 강제적 제한(1833~64년의 영국의 공장법)

제5절은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이 실제로 어떤 양상으로 벌어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제5절은 노동시간에 제한을 가하려는 공장법의 입법에 자본가들이 어떻게 반대하고 공장법의 입법으로 노동시간의 단축이 법으로 명문화될 경우 자본가들이 이를 어떻게 교묘하게 무효화시키려고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자본이 노동시간을 그 정상적인 최대한도로까지 연장하고, 그 다음에는 그 한계를 넘어 12시간이라는 자연의 낮시간의 한계에까지 연장하는 데에는 수세기가 걸렸지만 그 뒤 18세기의 마지막 ​13기에 대공업의 탄생과 더불어 노동일은 눈사태와 같이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연장되기 시작했다. 도덕과 자연, 연령과 성별, 낮과 밤에 의해 설정되는 모든 한계는 분쇄되었다. 자본은 성대한 향연을 벌이면서 자기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산체계의 소음에 귀머거리가 되었던 노동자계급이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리게 되자 곧 노동자계급의 반항이 우선 대공업의 발생지인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30년 동안 노동자계급이 쟁취한 양보란 순전히 명목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의회는 1802년부터 1833년까지 5개의 노동관계법을 통과시켰지만, 이 법률들의 강제적 실시와 그에 필요한 직원 등에 대한 경비의 지출은 한 푼도 의결하지 않아 그 법률들은 죽은 문서에 불과하였다.

(ⅰ) 1833년의 공장법

근대적 산업의 표준노동일은 면, 모, 아마, 비단 공장을 포괄하는 1833년의 공장법에서부터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1833년 법률의 규정 내용: 공장의 보통 노동일은 아침 5시 반에 시작해 저녁 8시 반에 끝나야 하며, 이 한도 안에서, 즉 15시간의 범위 안에서는 미성년자(13세부터 18세까지의 사람)를 1일 중 어떤 시간에 고용하건 합법적이다. 단, 이때 특별히 규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일한 미성년자는 12시간 이상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그 노동 시간이 제한되고 있는 각 개인에게는 하루 중 적어도 1시간 반의 식사시간을 허용해야 한다. 9세 미만의 아동을 고용하는 것은 뒤에서 말하는 예외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었다 9세 내지 13세의 아동의 노동은 하루에 8시간으로 제한되었다. 야간노동(저녁 8시 반부터 아침 5시 반까지의 노동)은 9세부터 18세까지 모든 사람에게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 법률은 공장감독관을 설치하였다.

1833년의 공장법은 릴레이 제도를 고안하여 가령 아침 5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 9세부터 13세까지의 아동들로 된 한 교대반이 일하고 오후 1시 반부터 저녁 8시 반까지는 다른 교대반이 일했다. 의회는 적용시기를 1834년 3월 1일 이후에는 11세 미만이, 1835년 3월 1일 이후에는 12세 미만이, 1836년 3월 1일 이후에는 13세 미만이 한 공장에서 8시간 이상 노동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공장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장주 이외의 압력이 더욱더 위협적으로 되어 이 법은 1836년 완전한 효력을 발생하게 되어 1844년까지 변경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법률이 공장 노동을 통제하고 있던 10년 동안, 공장감독관들은 이 법률을 집행 할 수 없다는 고충들을 토로하였다. 즉, 이 법률에 의하면 아침 5시 반부터 저녁 8시 반까지의 15시간 안에서는 각 ‘미성년자’와 각 ‘아동’의 12시간 노동 또는 8시간 노동을 시작시키고, 중단시키고, 다시 시작시키고 끝내도록 하는 것에 관한 시간 결정은 자본가들에게 일임되었으며, 또한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식사시간을 지정하는 것도 역시 자본가들에게 일임되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그 뒤 곧 새로운 ‘릴레이 제도’를 발명했는데, 이에 의하면, 노동자라는 말은 고정된 역에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역에서 끊임 없이 새로 교체되도록 한 것이다. 이 제도는 공장법 전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렸고 공장감독관들은 내무부장관과의 회견(1844)에서 새로 고안된 릴레이 제도 하에서는 어떤 통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했다.

(ⅱ) 1844년의 공장법

1844년 법률의 규정내용: 18세 이상의 부녀자라는 새로운 범주의 노동자를 법률의 보호 아래 두었다. 부녀자들의 노동시간은 12시간으로 제한되었고 이들의 야간노동은 금지되었다. 13세 미만의 아동의 노동은 1일 612시간으로, 그리고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7시간으로 단축되었다. 허위에 찬 릴레이 제도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이 법률은 노동 시작 시점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아동 및 미성년자의 노동일은 아동 또는 미성년자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아침에 공장에서 노동하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계산한다.” ‘시간은 공설의 시계’[예컨대 근처의 철도 시계]에 의해 측정되어야 하며, 공장의 시계는 이것에 맞추어야 한다. 공장주는 작업의 개시와 종료, 식사시간을 알리는 ‘커다랗게’ 인쇄된 공고를 공장 안에 게시하여야 한다. 오후의 교대반은 오전의 교대반과는 다른 아동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참고로 1844년 법률 입법의 배경과 이 법률의 의의와 효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44년 법률 입법 전에 공장노동자들은, 특히 1838년 이래, 인민헌장을 자기들의 정치적 선거 구호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10시간 노동법안을 자기들의 경제적 구호로 삼았다. 또한 1833년 벌률을 준수한 일부 공장주까지도 ‘불성실한 동료’들의 비도덕적인 ‘경쟁’을 비판하였다. 또한 자본가들은 곡물법 폐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10시간 노동법안도 채용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그들은 1833년의 법률을 실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 조치들을 감히 반대하고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지주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토리당은 자기들의 적인 자본가들의 ‘흉악한 술책’에 대해 통렬히 비난했다. 이런 정세들이 1844년 공장법 입법의 배경이 되었다.

자본론의 다음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노동의 시간, 한계, 중단을 그와 같이 군대식으로 일률적으로 시계의 종소리에 맞추어 규제하는 이 세밀한 규정들은 결코 의회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세밀한 규정들은 근대적 생산양식의 자연법칙으로 당시의 상황에서 점차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국가에 의한 그것들의 제정, 공식적 인정, 선포는 장기간의 계급투쟁의 결과였다. 이러한 규정들로부터 당장 나타나게 된 결과들 중의 하나는 성인 남자 노동자들의 노동일도 동일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생산과정에서는 아동, 미성년자, 부녀자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보아 1844~47년 동안 12시간 노동일은 공장법의 적용을 받는 모든 산업부문에서 전반적으로 한결같이 실시되었다.”(『자본론』 Ⅰ, 379쪽, 강조는 인용자)

(ⅲ) 1847년의 신공장법

1847년의 신공장법의 규정 내용: 신공장법은 1847년 7월 1일부터 ‘소년’(13세부터 18세까지)과 여성 노동자 전체의 노동일을 우선 단축할 것과, 1848년 5월 1일부터는 그것을 최종적으로 10시간으로 제한할 것을 규정했다.

신공장법의 입법의 배경을 살펴보면 1846~47년은 영국 경제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시대를 이루는데, 이때 마침내 곡물법이 폐지되었고(1846년), 면화와 기타 원료에 대한 관세가 폐지되었으며, 자유무역이 입법의 지침으로 선포되었다. 동시에 차티스트운동과 10시간 노동일을 위한 운동이 그 절정에 달하였다. 당시 자본가들은 당초 약속한 10시간 노동법안 채용을 곡물법 폐지 후 배신한 상태였는데, 이와 반대로, 패배한 토리당은 복수심에서 10시간 노동법 안에 찬성하였고 노동자운동은 토리당을 동맹자로 삼게 되었다. 그리하여 브라이트와 콥덴을 선두로 한 배신적 자유무역주의의 발광적인 반항에도 불구하고 10시간 노동법안은 드디어 의회에서 통과된 것이다.

자본은 이 법률이 1848년 5월 1일부터 완전히 시행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예비전을 시도하였다. 공장주들은 10%의 일반적 임금인하를 통해 노동자들이 공장법을 스스로 파괴하도록 유도하려고 하였다. 다음으로 노동일이 11시간으로 단축되자마자 임금은 또 다시 813% 인하되었으며, 그 뒤 노동일이 최종적으로 10시간으로 단축되자마자 그것의 두 배나 인하되었다. 그러므로 사정이 허락한 모든 곳에서 임금은 적어도 25% 인하되었다. 이처럼 조성된 기회를 이용해 1847년의 법률을 폐지하기 위한 공장노동자들에 대한 선동이 개시되었다. 사기, 유혹, 협박 등등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 법에 대해 불평하게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하자, 이번에는 그들 자신이 신문과 의회에서 노동자의 이름으로 더 한 층 소리 높여 떠들어댔다. 이 조차 효과가 없자 공장주들은 공장감독관들을 비난했으나 이 술책도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또 하나의 ‘온건한’ 술책은 성인 남자 노동자들을 12~15시간 일을 시킨 다음, 이 사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심으로부터의 바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공표하는 것이었으나 이 역시도 실패하였다. 이와 같이 자본의 예비전은 실패로 끝나고 10시간 노동법은 1848년 5월 1일에 시행되었다.

(ⅳ) 자본가들의 반란

그러나 1848년 10시간 노동법의 완전한 실시 이후, 자본가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정세도 노동자계급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우선 차티스트운동의 대실패로 영국 노동자계급의 자신감이 흔들렸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파리의 6월 봉기와 그 피비린내 나는 진압은 영국에서도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들을 재산, 종교, 가족, 사회의 구원이라는 공동의 구호 아래 통합시켰다. 노동자계급은 모든 곳에서 법의 보호를 박탈당했으며,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으며, 각종 탄압법의 단속을 받게 되었다. 공장주들은 10시간 노동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1833년 이래 노동력의 ‘자유로운’ 착취를 제한하려고 시도했던 모든 입법에 대해서도 공공연한 반란을 일으켰다.

공장주들은 미성년자와 여성 노동자의 일부를 해고하기 시작했으며 성인 남자 노동자의 야간 노동을 부활시켰다. 또한 식사를 위한 법정 휴식시간을 아침 작업 시작 전이나 저녁 작업 종료 후에 두려고 시도하였다. 공장주들은 미성년자와 부녀자에 대하여 과거의 ‘허위에 찬 릴레이제도’를 공공연히 부활시켰다. “그 제도는 교대제라는 핑계 하에, 노동자들을 카드처럼 한없이 다양하게 뒤섞어 놓고, 개개인들의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매일 변동시킴으로써, 동일한 작업반에 속하는 노동자 전원이 결코 전과 동일한 시간에 전과 동일한 장소에서 함께 작업하지 못하게 만든다.” 2년간에 걸친 자본의 반란은 재무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최후의 승리를 획득했다. 이 판결로 10시간 노동법은 폐지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때까지는 미성년자와 부녀자에 대한 릴레이 제도의 적용을 꺼리고 있던 다수의 공장주들도 이제는 그것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ⅴ) 1850년의 새로운 추가적 공장법

그러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은 랭카셔와 요크셔에서 위협적인 집회를 열고 큰 소리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공장감독관들은 계급적 적대관계가 들어보지 못한 정도의 긴장상태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정부에 긴급히 경고했다.

1850년 8월 5일의 새로운 추가적 공장법: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에는 타협이 성립되었다. ‘미성년자와 부녀자’의 노동일은 1주일의 첫 5일은 10시간에서 1012시간으로 연장되었고, 토요일에는 712시간으로 제한되었다. 작업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사이에 수행되어야 하며, 식사를 위한 112시간의 휴식이 허용되어야 하는데, 이 식사시간은 전원에게 동시에, 그리고 1844년의 규정에 따라 주어야 했다. 이것으로 릴레이 제도는 영원히 폐지되었다. 아동노동에 대해서는 1844년의 법률이 계속 효력을 유지했다. 1853년부터 1850년의 공장법은 거의 예외 없이 그것이 적용되는 산업부문들에서 일체의 노동자들의 노동일을 규제하게 되었다. 최초의 공장법이 제정된 이래 이미 반세기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공장법의 원칙은 [현대적 생산방식의 독특한 창조물인] 대공업부문들을 지배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1853~1860년의 대공업부문들의 놀라운 발전과 공장노동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재건은 아무리 아둔한 사람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반세기 동안의 내전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노동일의 법률적 제한과 규제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공장주들 자신이 자기들의 공업부문과 아직도 ‘자유로운’ 착취가 남아 있는 공업부문들 사이의 현저한 대조를 자랑스럽게 지적하였다. 대공장주들이 불가피한 대세에 체념해 순응하게 된 뒤 자본의 저항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이에 반해 노동자계급의 공격력은 [공장법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회계층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동맹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강화되어갔다. 이리하여 1860년 이래 공장법은 비교적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염색공장과 표백공장은 1860년에, 레이스공장과 양말공장은 1861년에 각각 1850년의 공장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아동노동 조사위원회』의 제1차 보고(1863년)의 결과, 일체의 토기(도자기뿐만 아니라), 성냥, 뇌관, 탄약, 카펫, 능직포의 제조공장, 그리고 ‘마무리작업’이라는 이름 하에 총괄되는 수많은 과정들에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공장들도 역시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1863년에는 ‘야외표백업’과 빵 제조업이 특별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c) 영국의 공장법이 타국에 준 영향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의 단순한 결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물질적 생산방식의 변화와 이에 상응하는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처음에는 노동일의 한계를 무제한으로 확대했고, 다음에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휴식시간을 포함하는 노동일을 법률에 의해 제한하고 규제하고 균일화하는 사회적 통제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19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통제는 예외적인 입법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공장법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일반화되면서 그 예외법적인 성격에서 점차 벗어나거나 노동이 수행되고 있는 가옥을 모두 공장이라고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표준노동일의 제정은 장기간에 걸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의 산물인 것이다. 이 투쟁은 우선 근대사업의 모국 영국에서 일어났다. 프랑스는 영국의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12시간 노동법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2월 혁명이 필요했는데, 이 법률은 그것의 원형인 영국의 12시간 노동법에 비해 결함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혁명적 방법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혁명적 방법은 한꺼번에 전체 작업장과 공장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노동일에 대한 동일한 제한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국에서는 오직 아동과 미성년자와 부녀자의 이름으로 쟁취했을 뿐이고 또 맑스가 글을 쓰던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반적 권리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을 프랑스의 법률은 원칙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노예제도가 공화국의 일부를 불구로 만들고 있던 동안에는 독립적인 노동운동은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다. 검은 피부의 노동자에게 낙인이 찍혀지고 있는 곳에서는 흰 피부의 노동자도 해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예제도의 폐지로부터 즉시 새로운 생명의 싹이 돋아났다. 남부전쟁의 첫 번째 성과는 8시간 노동일을 위한 운동이었는데 볼티모어에서 열린 전국노동자 대회(1866년 8월)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나라의 노동을 자본주의적 노예제도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필요한 최대의 급선무는 아메리카 연방의 모든 주에서 표준노동일을 8시간으로 만드는 법률의 제정이다. 우리는 이 영예로운 성과를 달성하기까지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강조는 인용자)

『자본론』에는 국제노동자협회 제네바대회에서 채택된 다음의 결의문도 실려있다.

노동일의 제한은, 그것 없이는 개선과 해방을 위한 앞으로의 노든 노력이 좌절되지 않을 수 없는 예비조건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 우리는 8시간을 노동일의 법정한도로 제안한다.

제10장 노동일은 맑스의 웅변조의 구절로 끝난다. 많은 울림을 주는 구절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한다.

노동자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뱀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자본과의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가족을 죽음과 노예상태로 팔아넘기는 것을 방지해 줄 하나의 법률[즉, 아주 강력한 사회적 장벽]을 제정하도록 하나의 계급으로서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라는 화려한 목록 대신 법적으로 제한된 노동일이라는 겸손한 대헌장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노동자가 판매하는 시간은 언제 끝나며, 자기 자신의 시간은 언제 시작되는가를 비로소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이전과 비교해서 얼마나 큰 변화인가!(강조는 인용자)

 

보론: 『자본론』 Ⅰ권 발간 이후의 노동시간(노동일) 단축의 역사

8시간 노동일 요구 운동은 1889년 창립된 제2인터내셔널에 의해 계승되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일을 확인하는 결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년 5월 1일을 국제 노동운동의 시위의 날로 정하였다. 프랑스의 대의원 라비뉴가 제출한 이 제안은 1890년 5월 1일을 기하여 8시간 노동일을 위한 총파업을 일으키려고 했던 미국노동총동맹의 제안을 지지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1890년 5월 1일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공업 도시를 메웠다. 그리고 해가 감에 따라 메이데이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통으로 되었다.

8시간 노동일 요구가 노동자운동의 일반적인 요구가 되었지만 현실의 노동시간(노동일) 단축은 오랜 기간 10~11시간 선을 넘지 못했다. 영국의 경우도 노동시간은 9시간제 또는 10시간제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동시간은 크게 연장되고 군수공장에서는 노동시간 제한이 사실상 폐기되기조차 하였다.

8시간 노동일이 본격화된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였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 직후인 1917년 10월 29일 8시간 노동일에 대한 명령이 공포되었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분출하고 세계사회주의혁명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각국의 자본가계급은 혁명을 두려워하며 노동자계급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8시간 노동일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자본가계급은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유 평화조약 안에서 특별히 노동에 대한 원칙(평화조약 제13편)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조약 제13편 「노동」은 노동문제를 취급하는 국제기구(ILO)를 창설할 것과 1일 8시간 또는 주 48시간 노동제 도입을 선언하였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19년 10월에 워싱턴에서 제1차 총회를 개최하여 6개의 조약과 6개의 권고를 채택하였는데 조약 제1호가 1일 8시간, 주 48시간 노동제였다. 이 조약에 대해서 영국, 미국, 독일의 의회는 비준하지 않았고, 프랑스, 이탈리아가 약간의 조건을 붙여 비준하였다. 그런데 비준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8시간 노동이이 실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8시간 노동일은 러시아혁명 이후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5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는 제19차 총회에서 주 40시간 노동제에 대한 조약을 채택하였다. 1940년까지 이 조약을 비준한 나라는 뉴질랜드뿐이었고 비준하지 않은 채로 주 40시간 노동제를 실시한 나라는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였다. 프랑스에서는 1936년 6월에 성립한 인민전선내각이 주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하여 6월에 실시하였다. 프랑스의 주 40시간 노동제는 공황과 파시즘의 득세라는 시기에 임금인하 없이 이루어진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의의를 가졌다. 주 40시간 노동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1998년에 주 35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다.

이상에서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을 검토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맑스의 말처럼 “표준노동일의 제정은 장기간에 걸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의 산물”(『자본론』 Ⅰ, 402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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