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는 빠진 변혁당의 “사회주의 대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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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사회변혁노동자당(이하 변혁당)이 “사회주의 대중화”를 말하고 있다. 지난 1월 26일 변혁당 4차 총회는 “사회주의를 대중화하기 위한 구체적 경로를 마련하고 사업에 착수”하고 이를 위해 전당적 토론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를 위해 ‘사회주의대중화사업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변혁당의 기관지 『변혁정치』에 따르면, 사회주의대중화사업특별위원회에서 ‘사회주의 전면화’, ‘활동 당원 원칙’을 “사회주의 정당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핵심 정신”으로 제시하고 1차 당원토론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8월 중순 열린 정치캠프에서는 사회주의 대중화를 주제로 여러 섹션을 열고 주제 토론을 진행했다.

2008년 세계대공황 이후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악화되어 왔고, 새로운 공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면서 이러한 모순 악화는 더욱 가속화될 실정이다. 이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전면화되고 사회주의 운동 자체도 미국 등을 중심으로 고양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때에 한국 사회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가 중요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일견 “사회주의 대중화”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혁당의 “사회주의 대중화”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사회주의 대중화”를 말할 때, 그 전제는 그것을 말하는 주체들이 사회주의 내용을 확고히 확립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전제가 부재하다면, 즉 스스로 사회주의 내용을 제대로 확립하지도 못한 채 “사회주의 대중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허울뿐인 구호에 그칠 것이다. 그런데 변혁당이 바로 이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미 필자는 변혁당의 운동을 “알리바이성 운동”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2016년 10월 28일 『사회주의자』에 게재한 글 「알리바이성 운동은 이제 그만하자」에서 필자는 변혁당의 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글은 주로 사회변혁노동자당(이하 변혁당)을 ‘알리바이성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비판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변혁당이 대외적으로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전진이 중요한 역사적 과제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건 세력들이 증가하는 것은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변혁당의 실천은 사회주의를 내걸었을 뿐 실제에 있어서는 알리바이성 운동을 통해 사회주의를 애매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글은 다른 개량주의, 기회주의 세력의 알리바이성 운동보다 변혁당의 알리바이성 운동을 심각하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우선, 애초 사회주의정당 건설에 반대했던 세력들이 변혁당 창당주체로 참여했다는 점, 둘째 비록 강령은 ‘사회주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당의 지향이 나타나는 당명에서는 ‘사회주의’가 아닌 ‘사회변혁’이란 단어를 택해 “사회주의를 정말 전면화하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는 속내”를 드러냈다는 점, 셋째 변혁당이 사용하는 일상적 정치용어인 ‘반자본’, ‘사회화’ 역시 “‘반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전면에 쓰기 부담스러워서 대체어”로 나온 것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정의당, 민중당(당시 민중연합당) 등 이미 자유주의화한 사이비진보세력과 단절하려고 하지 않는 불철저한 정치적 태도를 견지한 점을 들었다. 그런데 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변혁당은 사회주의와 관련해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닌’ 알리바이성 운동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이것은 변혁당의 “사회주의 대중화”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내용 부재, 사회주의 활동 실종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주의 대중화”의 전제는 스스로 사회주의 내용을 확고히 확립하고 그에 입각해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 내용 확립이라는 대목에서 그 동안 변혁당은 이렇다 할 만큼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변혁당 차원에서 사회주의와 관련된 회원 교육, 강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당의 주장과 실천을 보면 사회주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는 입장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잘못된 자본주의 규정이 버젓이 주장되다

최근 변혁당은 『사회주의자』에 실린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다」에 대한 반박 글을 『변혁정치』에 실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이 글은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잘못된 규정을 담고 있었다.

이 글은 “현재 여성억압의 근원은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있다”다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의 “근간”은 바로 “가부장적 질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간”은 임금노동제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있다. 예컨대 맑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자본의 역사적 존재 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라고 말하며 이 점을 매우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변혁당에 실린 글의 주장은 사회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만약 이 글의 주장대로 실천한다면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운동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 글에 따르면 ‘임금노동제 철폐’, ‘사적 소유 철폐’가 자본주의 철폐를 위한 핵심 투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변혁당의 구성원들 모두가 자본주의의 근간이 ‘가부장적 질서’에 있다는 데 동의하거나 자본주의의 근간이 임금노동제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자본주의 규정이 버젓이 주장되고 있다면, 사회주의의 기본적 내용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대중화”를 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이비 진보세력에 대한 잘못된 규정

한국사회의 정치세력에 대한 규정 역시 사회주의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 변혁당의 “사회주의 대중화”에 대해 나름 상세히 밝힌 올해 9월 1일자 글 「사회주의 대중화를 제안한다: 육하원칙으로 보는 사회주의 대중화」를 보면, 이승철 집행위원장은 “민주노동당 붕괴 이후 진보정당 운동은 각각의 이념을 더욱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어떤 당은 ‘헌법 안의 진보’로 압축되는 사민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으며, 또 어떤 당은 ‘자주-민주-통일’을 중심으로 한 민족민주운동세력의 결집을 택했다”, “이처럼 한국 진보정당 운동이 <사민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로 삼분 돼가는 상황”이라고 적고 있다.

이른바 정의당-사민주의, 민중당-민족주의, 변혁당-사회주의라는 매우 도식적인 정치세력 규정은 변혁당 말고는 아무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정의당의 경우, 오랜 우경화의 끝에 이미 자유주의세력화 했다. 이는 그동안 정의당의 민주당 이중대 행보에서 확인되어 온 사실이고, 최근 정의당은 조국 임명에 찬성하는 것으로써 이런 자유주의적 성격을 재차 보여주었다. 민중당 역시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탄압받는 세력이라는 착시효과가 생겨서 그렇지, 실은 민주당의 정책에 대부분 동의하는 세력이다. 이러한 잘못된 정세인식이 어떤 잘못된 실천을 낳는지는 뒤에서 따로 설명할 것이다.

계급타협적인 “연대연합전략”

정치세력 규정을 넘어 계급동맹에 대한 부분에서도 사회주의적 관점을 찾기는 어렵다. 김태연 대표는 작년 9월 3일자, 「지금, 여기, 사회주의 운동_사회주의 운동 대중화의 가능성과 실천과제」란 글을 썼다. 이 글은 이른 시기 “사회주의 대중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대중화를 고민하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고립포위 국면을 뚫고 우군을 넓히는 방향으로 연대연합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사민주의 운동, 협동조합 운동 등 제반 반자본(비자본)공동체 지향 운동에 대해 그 한계에 착목하여 ‘주타방’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사회주의 우군이 될 수 있도록 폭넓고 유연하게 연대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필자가 “반자본주의”를 전면화하기에 부담스러워 사용한 용어라고 한 “반자본”조차 꺼려지는지, 이제 “비자본”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른바 우군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사민주의뿐 아니라 협동조합 운동과 같은 소부르주아적 성격의 운동에 대해서 노동자계급적 입장이 결여된 매우 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껏 사회주의 운동이 견지해온 계급동맹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다른 계급 및 계층과의 동맹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1848년 프랑스 혁명 및 1871년 파리코뮌의 패배 요인으로 농민과의 동맹 실패를 중요하게 들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농민과 같은 다른 계급과의 동맹을 위해 정치적 문턱을 낮추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식의 태도를 반대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계급동맹의 전제조건으로 다른 피억압 계급, 계층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보았고, 사회주의 세력 또한 다른 피억압 계급, 계층으로 하여금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서도록 만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김태연의 주장은 계급타협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조국사태’와 같은 현실 정치사안 대한 소극적 대응

마지막으로, ‘조국사태’에 대한 변혁당의 태도를 거론치 않을 수 없다. 이승철은 위의 글에서 “거리에서 함께 외치지만, 현실정치에는 관심 없는 운동세력”이 아닌 “현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국사태’와 같이 중차대한 현실 정치의 사안에서, 학생위원회를 통해 교육제도가 문제라는 정도의 지적이 나온 것 외에 변혁당은 스스로의 주장에 걸맞은 입장과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학생위원회에서 나온 것을 제외하고 ‘조국사태’ 때 나온 글은 이승철이 쓴 9월 16일자 「‘조국사태’가 우리 사회에 드러낸 것」이 유일한데, 이 글에서는 ‘조국사태’에 대한 매우 혼란스러운 인식을 보인다.

“권력의 상층에서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다툼은 개혁이 아니다. 실제 민중의 삶과 연결되고, 기득권 일반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 개혁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것이 ‘전통기득권’이든 ‘신흥기득권’이든, 기득권 밖의 세력이 필요하다. 이제는 기득권 전쟁으로 변질된 ‘개혁’이란 단어가 아니라, 판을 뒤집는 한국사회 구조의 ‘변혁’이란 단어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마치 문단의 앞에서는 제대로 된 개혁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뒤에 가서는 개혁이 아니라 변혁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논지를 뒤죽박죽 전개했다.

조국이 사퇴한 후 나온 「‘조국 내전’ 이후」란 글 역시 사회주의 세력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기는커녕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았다”며 무기력한 푸념만 늘어놓고 있다. ‘조국사태’는 대중들에게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환상을 깨고, 한국 사회의 진정한 문제가 바로 계급문제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따라서 사회주의 세력이라면 ‘조국사태’를 중요한 정치적 기회로 삼는 게 당연하다. ‘조국사태’에 대한 변혁당의 무기력한 입장은, 변혁당 식 ‘사회주의 활동’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사이비 진보세력에 대한 투쟁을 방기하는 변혁당

한편 변혁당의 정치세력 규정은 특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정의당을 사민주의, 민중당을 민족주의로 보는 것은, 규정이 그 자체로 틀렸다는 점을 넘어 심각한 정치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사실상 이미 자유주의세력화한 정의당과 민중당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주의, 진보 운동에게 중요한 과제는 20년 동안 우경화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완전히 자유주의세력화한 사이비 진보세력의 실체를 폭로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정치적으로 제거해가는 것이다. 사이비 진보세력은 한때 진보운동에 몸을 담았으나 이제는 변절, 배신한 세력인데, 여전히 마치 ‘진보’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노동자 민중의 의식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 진보세력이 발호하고 그들이 노동자 민중으로 하여금 ‘진보’로 여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성장하고 “대중화”하기 바라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그런데 변혁당은 말로는 “사회주의 대중화”를 떠들면서 정작 그것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이비 진보세력에 대한 투쟁을 방기하고 있다. 더 나아가 변혁당은 사이비 진보세력을 연대세력으로까지 보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이승철의 글에는 사민주의, 민족주의로 분류된 사이비 진보세력에 대해 “어느 노선이 옳고 그르냐를 가르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위의 인용문에서 나오듯이 김태연은 사민주의 운동을 “사회주의 우군”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민주의를 우군으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와는 동떨어진 주장인 것은 차치하고, 여기에는 구체적으로는 정의당을 우군으로 여기고 연대를 모색하겠다는 발상이 담겨있다.

이미 필자는 2016년 글에서 당시 이종회 공동대표가 “기존의 보수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 운동이 가지는 나름의 의미도 있지 않겠”냐며 정의당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보인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의당과 같은 사이비 진보세력에 대해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그들과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변혁당의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대중화”가 허상임이 사이비 진보세력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잘못된 정치적 태도는 어떻게 변혁당 내에 자리 잡게 된 것일까? 그것은 변혁당의 구성원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사회주의 운동에 오랜 기간 헌신해온 이들이라기보다는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해오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사회주의를 대외적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김태연 현 대표와 이승철 현 집행위원장이 그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알리바이성 운동은 이제 그만하자」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들 대부분이 민주노총 구조에 의지하여 활동하면서도 민주노총의 투쟁회피나 우경화 등에 반대하는 현장파-좌파세력으로 존재해왔고, 여전히 이 구도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상당수가 나름 헌신적인 경제투쟁을 전개하여 왔고 민주노총의 퇴보에 비판적인 건강성을 보여 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조합주의 운동을 넘지 못하였고, 민주노총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민주노총 구조에 기댄 운동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고 사회주의가 그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객관적 상황이 형성되어가자, 변혁당 창당 주체들은 사회주의를 내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사회주의를 내걸었지만 사회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닌 운동, 사이비진보정치세력을 한편으로는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단절하지 않는 운동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시야는 대개 민주노총 내의 정치구도라는 협소한 틀에 머물고 있고, 정치세력에 대한 규정에서도 민주노총 내 정파구도를 외부로 확장한 데 불과하다. 즉 자신들의 협소한 조합주의 시야 속에서 민주노총 내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세 정파에 대해 나름의 ‘주의’를 붙여 분류한 것이 사민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 구도다. 또한 민주노총 내에서 아무리 반목한다고 해도 각종 선거와 회의 등에서 경우에 따라 서로 협력해야 하는 현실이 사이비 진보세력과의 ‘연대’ 입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가 제 아무리 사회주의를 간판으로 내걸어도 결국 민주노총 관료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를 바라보고 있다는 진실을 실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등록정당 논란: 허울뿐인 “사회주의 대중화” 논의의 귀결

이종회 사회주의대중화사업특별위원장의 글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한 하나의 목표와 세 가지 계획」에 따르면, 변혁당은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한 세 가지 계획으로 △사회주의의 전면적인 선전·선동, △사회주의 정당 등록 추진, △2022년 사회주의 대선후보 전술을 내놓았다. 사회주의 선전·선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고 2022년 대선을 사회주의 대중화의 유력한 기회로 삼으며, 이를 위해 사회주의 정당 등록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원토론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는 기이하게도 등록정당 문제였다. 『변혁정치』에 실린 글에 따르면 “사회주의 대중화”를 주제로 한 강연과 지정토론이 끝난 뒤 이어진 분반 토론 때 “대다수 분반에서 등록정당 문제가 무엇보다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이 토론에서는 등록정당으로 갈 경우 발생할 우경화, 선거정당화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고 한다. 일견 타당성이 있는 우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진정 “사회주의 대중화”를 고민한다면 나와야할 이야기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대중화”가 논의되려면 누누이 강조한 전제인 자기 내부에 사회주의 내용이 올바로 확립되고 있는지, 사회주의 활동이 초기 단계라 할지라도 제대로 되고 있는지 등, 스스로 발 딛고 있는 지점을 먼저 점검하고, 그러면서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한 방안을 하나하나 고민해가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반성, 점검보다는 대선 대응, 그리고 이를 위한 정당 등록 문제가 “사회주의 대중화” 논의를 지배한 것이다.

이러한 내부 논란은 역설적으로 변혁당의 “사회주의 대중화”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사회주의 대중화”의 세 가지 계획은 “사회주의의 전면적 선전·선동 → 그러한 활동의 결과로서 조직 확대와 정당 등록 → 2022년 대선 대응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 확대”라는 논리적 흐름을 갖지만, 실상에서는 그 역순이 진실인 셈이다. 즉 자신들이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2022년 대선에 후보를 내야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당 등록이 필요하고, 사회주의 선전·선동도 필요하다는 식인 것이다. 대선 대응이 “사회주의 대중화”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주의 대중화”가 대선 대응의 수단으로 자리매김된 셈이다. 한 마디로 “사회주의 대중화”는 자신의 조직 상황에 맞춰 내놓은 정치일정 대응 계획이라 할 수 있다. 이러다보니 내부 논쟁도 정작 정당 등록 여부 문제로 흘려간 것이다.

마치며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 정치세력에 대한 규정, 계급동맹 문제, 현실 정치 사안에 대한 입장 등과 관련해 최근의 경우만 몇 가지 살펴봐도 변혁당 내에는 “사회주의 대중화”의 전제인 사회주의 내용의 확립 자체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변혁당은 사회주의 운동이 대안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제인 사이비 진보세력에 대한 투쟁을 방기하고 오히려 이들과의 연대를 자기 입장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으로 변혁당의 “사회주의 대중화”는 사회주의 운동을 정말 전면화하고 확산시키려는 것보다는 2022년 대선에 대응해 활로를 모색한다는 자기 조직의 주관적 정치일정 대응에 맞춰 제시된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을 “사회주의 대중화”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닌 것을 사회주의라 포장하는 알리바이성 운동을 대중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대중화”가 변혁당 내에서 논의되자 당 내에서는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승철의 8월 1일자 글 「사회주의 대중화를 제안한다: 사회주의 대중화를 둘러싼 우려와 답변」를 보면, 1차 당원토론에서 제기된 질의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이 우경화에 대한 경계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우경화를 우려하기 전에 현재의 자기 모습을 직시하는 게 변혁당으로서는 오히려 합당한 일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과제로는 사회주의 사상확립, 선전보급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을 육성해가는 것, 사이비 진보세력과 같이 사회주의 운동의 앞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과 치열한 사상투쟁, 정치투쟁을 벌여 가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 과제를 위한 치열한 고민과 실천이 없이 “사회주의의 대중화”를 논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을 가로막는 알리바이성 운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겠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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