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집회 후기: 박근혜는 끝났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환상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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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9일 청계광장에서는 박근혜 퇴진 촉구 촛불집회가 열렸다. 좁디좁은 광장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의 예측으로만 약 3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운집하여, 현 정국에 대한 대중들의 높은 문제의식을 실감케 해주었다.

쌓이고 쌓인 민중의 분노, 마침내 분출하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여 거리로 나오게 된 표면적인 계기는 박근혜라는 ‘개인’이 최순실이라는 ‘개인’과 함께 자신들 멋대로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지난 4년간 누적될대로 누적되어온 박근혜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분노와,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극단화된 남한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한 고통이 깔려 있다. 때문에 참가자들은 세월호 희생자들과 해고당한 노동자들 그리고 백남기 열사를 언급하는 것과 함께, 이 모든 죽음과 고난의 책임자는 바로 박근혜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며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였다. 그 투쟁의 열기란 가히 뜨거웠다고 할 만했다. 한 참가자의 말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전혀 춥지가 않”았으며, 또 다른 참가자는 “최근까지 봤던 어떤 집회보다도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할 정도였다.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와 법’이란 환상을 깨자

극복해야 할 몇몇 한계점도 드러났다. 첫째로, 집회에서의 발언자들과 참가자들은 아직 ‘정의를 실현하는 중립적인 국가’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게 나라냐’ ‘나라 꼴이 엉망이다’ ‘헌정을, 민주주의를 수호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같은 프레임의 발언과 구호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런 구호는 국가의 본질을 명확히 폭로하지 못한 채, 국가에 대한 환상만을 유포한다. ‘이게 나라냐, 나라가 어찌 제 역할을 다 못하느냐’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가라는 게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백남기 열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한 도구라는 제 역할을 충실히 잘 해냈기 때문에 명을 달리한 것이다.

둘째로, 행동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버리는 막연한 비폭력주의의 모습이 있었다. 경찰이 행진을 막아서자 그것을 뚫기 위해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러는 동안 대오 뒤쪽에서는 “비폭력, 비폭력”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미 정권의 정당성은 타격을 입을 대로 입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나아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능한 한 많이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외치는 ‘비폭력’이란, 법률이 정해 준 영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자기검열의 신호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가란, 자본가계급의 도구일 뿐

일순간에 바지사장으로 불리고 있는 박근혜도, 비선실세라는 이름을 얻은 최순실도,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자본’이다. 박근혜 이전의 모든 정권들에서 남한의 거대자본들과 그 소유주들은, 남한 정부 내지는 대통령을 자신들의 ‘집사’쯤으로 여겨왔다.

자본주의 체제는 일부 계급 내지는 일부 개인이 국가를 사유화하여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사용하게끔 하지만, 그 본질은 여러 제도적 장치(헌법, 의회, 선거, 삼권분립 등)와 이데올로기적 장치(언론, 교육 등)로 인해 철저히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집회의 구호에서도 드러났듯이) 국가가 마치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사회정의 실현의 기구로 작동한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국가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운동의 방향도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성이 있다. 운동이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타격하지 못하고 사실상 긍정하면서, 자본가들의 도구에 불과한 국가에 대해 잘못된 기대감을 품고 기존 체제의 영역(선거, 투표, 준법, 합법 등) 안에 갇혀버리는 방향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집회에서도 몇 명의 유명한 민주당 소속 (또는 민주당 성향) 정치인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하자, 몇몇 참가자들이 그 이름을 호명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행진 과정에서 나온 ‘비폭력’ 구호 역시 국가와, 그 국가가 정한 법률은 정의로운 것이라는 환상에 일정부분 기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이번 사건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가란 근본적으로 자본가계급의 도구’라는 이 체제의 본질을 만천하에 드러내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으며,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환상을 깨고 사회를 진정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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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비록 위와 같은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상황은 민중의 쌓이고 쌓인 분노가 표출되는 매우 긍정적인 국면이다. 3만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기능을 했고, 대중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지금까지 참아왔던 이야기를 소리높여 분출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런 자발적인 역동성은 거리행진 때 곧바로 드러났다. 원래 예정된 행진경로인 종로-종각-광화문 루트가 경찰의 차벽에 의해 봉쇄되자, 기나긴 행진대열로 인해 그 때까지 청계광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던 참가자들은 자발적으로 뒤로 돌아 곧바로 광화문 광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향을 바꾼 행진대열의 숫자만으로도 세종로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경찰병력을 향해 “비켜라”를 외치며 자신감을 표출하였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경찰은 뒷걸음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현 정권 자체가 자신감을 잃은 사면초가 상태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인식의 발전가능성을 보여주는 모습 역시 있었다. (비록 ‘이게 나라냐’라는 프레임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세월호 희생자들과 백남기 열사에 대한 언급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대중들이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하지 않는다는 연대의 가능성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또 발언자들 중에는 “이 문제의 근원에는 자본주의가 있다”라고 발언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참가자들의 호응이 좋았다는 점도 매우 고무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지금의 고양된 국면 속에서 본질을 폭로하는 발화를 꾸준히 해나감으로써 국가 자체를,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를 뛰어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고민을 함께 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의 자발적인 역동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비폭력을 외치는 것만이 능사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범위를 스스로 규정해버리는 자기검열로 작동할 수 있다. 오히려 정말로 변화를 일으키려면 무조건적인 비폭력이 아닌 ‘대항폭력’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환상과 막연한 비폭력주의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명확히 폭로해야만 비로소 ‘박근혜 퇴진’ 구호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현실로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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