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폐지로 야만의 역사를 청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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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노동자의 책 국가보안법 탄압저지 공동행동]

《노동자의 책》 대표 이진영동지의 국가보안법 재판을 보면서 황당무계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수구정권에서조차 국가보안법사건 재심이 20건 이상 진행되었다. 그리고 진보당 사건, 인혁당 사건, 학림 사건 등, 대법원 결정에 의해 극형에 처해졌거나 엄청난 고통을 받은 사건들이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재판부가 지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고 반성하는 일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지난 6월 15일 대법원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하여, 이들이 한 집회나 시위 선전홍보 등이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동조한 행위라거나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당시 제주 강정마을에 미국의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이 한창이었다. 이것이 2012년 4월에 치러지는 총선에 악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하여 공안검찰이 무리하게 기소를 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안당국은 2016년 7월 이진영 동지를 조사를 하고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노동자·민중들의 촛불투쟁이 한창인 올해 1월 5일 《노동자의 책》 대표 이진영동지를 이적표현물 반포, 판매와 이메일 송부 등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구속시켰다. 이 사건을 두고 극히 일부 수구세력의 시대착오적 행태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수구적 잔재들이 사회 곳곳에 여전히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중들의 요구를 짓밟아온 야만의 역사를 기억하자

국가보안법은 일제치하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해서 태어났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19세기말에 이르러 소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값싼 원료와 생산품의 판매를 위해 식민지 쟁탈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 등 먼저 식민지를 차지한 국가들과 독일 등 후발제국주의 국가 간에 심각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그 결과 러시아와 독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약소식민지국가에서도 민족해방투쟁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로 인해 일본에서도 민주주의 운동, 공화제 운동,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 지배계급은 러시아의 혁명 기운이 유입되는 것을 막고 민족해방투쟁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치안유지법은 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었다는 점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식민지 민족해방이 전세계적으로 전개되자 이에 고무되어 1919년 3・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3・1운동 후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많은 독립투사가 해외로 갔고, 국내에 남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문화운동, 실력양성운동, 협동조합 등을 하다가 변절하기도 했다. 사회주의계열인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민중을 각성시켜 민족해방을 목표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악용하여 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치안유지법은 폐지되었다.

그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1948년 2월 26일 UN을 앞세워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추진했다. 이에 민족해방운동의 세력들은 남북한 총선거 및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미군철수와 망국적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한 제주도민들의 항쟁이 발생했다. 이에 당황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양민을 억누르려 했다. 이에 반대한 14연대가 여순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빌미로 이승만 정권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이렇게 국가보안법의 역사와 쓰임새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잘 활용했다. 박정희는 1972년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이를 소위 ‘토착적 민주주의 헌법’이라 선전했다.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항상 등장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유신헌법에서부터이다. 반면 1948년 건국헌법부터 1969년 3선 헌법까지, 헌법 전문에 사용되었던 용어는 ‘민주주의 제(諸) 제도’였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의 뿌리는 서독 기본법의 “전투적 민주주의”에 있다.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구호로 대표되는 “전투적 민주주의”는 사실상 위선적인 악법이었다. 즉 독일 제국주의가 자행한 노동자민중 착취, 약소민족에 대한 억압은 생각지 않고, 자신들의 체제와 기득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전투적 민주주의”를 도입한 것이었다. “전투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위헌정당해산제도’와 ‘기본권 실효제도’ 이다. 서독 지배계급은 이 조항들을 활용하여 독일공산당을 해산시켰고, 여타 세력들은 기존의 정치체제를 인정하고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이른바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수호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이러한 “전투적 민주주의”를 국가보안법에 이식시켰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하는 이유들

국가보안법은 그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자 야만이며, 법의 이름을 빌어 법전에 실렸지만 그것은 법의 이름에 값할 이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절차상 문제를 살펴보자. 2004년 8월 23일에 나온 국가인권위원회의 「국가보안법 폐지권고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해서 단행된 제6차 개정에서는 반공법을 국가보안법으로 통합하였으며, 찬양․고무 조항을 비롯한 반공법의 처벌 조항은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흡수되어 형량이 가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처벌 범위 또한 광범위해졌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국회가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제정된 반공법의 처벌 조항들이 고스란히 국가보안법으로 흡수된 것인데 이 개정안은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통과된 것으로 상정․제안 설명․가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991년에 단행된 제7차 개정에서는 ‘목적’ 요건 추가, ‘국가변란’ 개념 추가, 불고지죄의 일부 축소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당시 여당의 개정안에 반대하면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야당의원들에게 심의․표결에 참여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국회의장이 법안에 대한 설명과 심사보고, 수정제의 보고 등 모든 절차를 서면으로 대체하면서 표결 절차를 생략한 채 불과 35초 만에 날치기 방법으로 통과시켰다.

이렇다보니 결정문 자체에서도 “개정 절차는 대체로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입법기관인 국회가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나 국가보위입법회의 등 비정상적인 기구를 통하여 입법되었거나 국회를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절차적인 정당성이나 민주적인 적법성을 갖추지 못한 채 이루어진 개악의 과정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 국가보안법은 헌법의 전문 및 평화통일 조항과 모순된다. 국가보안법의 근거 조항은 헌법 제4조(영토조항)와 유일합법정부론인데 이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결의 제195호를 왜곡한 결과이다. 이 결의에 따르면 한국정부의 유효한 지배가 미치는 범위는 유엔 감시 하에 선거가 시행된 남한지역에 국한된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는 유일합법정부라 해석하기는 어렵고 북한을 우리 영토 안에 있는 불법단체이며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남북적십자회담, 남북국회회담, 남북고위급당국자회담 및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89년 9월 11일 남북한의 대등한 법적 지위를 전제한 ‘남북공동체통일방안’ 발표, 91년 12월 13일 남북한의 평화공존이 보장된 ‘남북한 기본관계합의서’가 남북 쌍방대표에 의해 서명된 것 등은 헌법의 묵시적 변경인 “헌법변천”에 의해 사실상 영토조항이 사문화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셋째, 국가보안법은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하고 있다. 죄형법정주의는 ‘국가형벌권의 남용으로부터 개인의 신체와 생명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한 근대국가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근대형사사법의 대원칙’이다. 국가보안법은 이에 어긋남으로써 마치 중세암흑기의 법률과 다름없다. 조항 중 대부분이 구성요건의 내용이 불명확하고 광범하며 추상적이라 소위 반정부활동 백지형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다보니 적용에서 광범한 유추, 확대해석이 이루어진 사례와 종류를 헤아리기 어렵고 사법부와 수사기관이 국민의 기본권을 국가권력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과중한 형량도 문제이다. 이는 구성요건의 확장, 유추해석과 결부되어 사소한 말 한마디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의 엄청난 형량을 받은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사형이 선고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실 국가보안법이 규정하고 있는 대부분의 조항이 이미 형법이나 기타 형사특별법규와 중복된다. 그런데도 굳이 국가보안법을 존치시키려는 진정한 이유는, 반공이데올로기를 권력의 강화와 생존의 명분으로 삼아온 역대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일반 형사사범의 처리절차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법으로 인식하게 하여, 이 법이 국민에 대하여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도록 만들고 법질서의 상위에 존재하는 가치인양 국민들의 잠재의식 내부에 각인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

김대중 정부는 1999년 8월 15일 경축사에서 국가보안법 전면개정을 언급했으며, 노무현 정부는 2004년 8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 결정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국회의장과 법무부장관에게 권고했다. 노무현은 2004년 9월 5일 MBC TV에 출연하여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그리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항이 있으면 형법 몇 조항 고쳐서라도 형법으로 하고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대한민국이 드디어 야만의 국가에서 문명국가로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와 더불어 ‘UN 자유권규약위원회’의 폐지권고와 ‘미국무부’의 폐지권고 등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권의 한계와 지배계급간의 법안 주고받기로 인해 국가보안법 폐지는 무산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권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촛불투쟁에 힘입어 등장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 의지가 그다지 크지 않다. 19대 대선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는 국가보안법 중 제7조 찬양・고무・동조 조항이 악법이므로 개정해야 한다는 답변을 했다. 최근 도종환 문체부장관 내정자가 청문회에서 국가보안법의 일부개정을 언급한 정도이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확인했듯이 지배계급에 노동자민중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은 노동자민중이 투쟁을 할 때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노동자민중의 목소리가 강력해진다면 문재인 정권도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민중들이 앞장서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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