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성과로 본 여성억압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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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차탈회이위크 유적지에서 발견된 벽화]

메갈리아의 출현과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계기로 한 추모 흐름, 그리고 “#○○ 내 성폭력” 해시태그로 시작되어 “Me, too”로 이어진 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간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이런 고발을 하는 것은 당연히, 이런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며,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면 ‘꽃뱀’이라는 의심부터 받아야 하는 부당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기에 우리는 그런 차별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와 달리, 인류 역사 내내 여성억압이 항상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성이 본성적으로 열등하다고 우기는 성차별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성차별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 역시 이런 관점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정희진 씨는 2016년 6월 경향신문에 게재된 칼럼에서 “여성혐오는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개최된 “미소지니는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여성혐오는 늘 있어왔다. …… 아주 오래전엔 말할 것도 없다. 플라톤 역시 다양한 여성비하 발언을 했다. 더 거스르면 아담과 이브, 뱀에서도 여성혐오가 나타난다. 여성혐오 없이 오늘날의 문명은 불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여타 여성학 교과서 등도 그런 여성억압이 언제부터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하기보다는, 여성들은 먼 옛날부터 항상 억압받아 왔던 것처럼 은연중에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여성억압이 정말로 인류 역사 내내 존재해온 것이라면, 여성억압의 ‘기원’을 질문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남성들이 원래부터 여성들을 비하하고, 차별하고, 여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면, 여성해방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남성들을 처벌하거나, 여성들만의 안전한 공간을 구축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수십 년 간 축적되어 온 인류학적 발견들, 연구들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살았던 사회, 여성의 임신·출산 가능성이 여성에 대한 구조적 억압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사회는 분명 존재했다. 그렇기에 대체 언제부터, 왜 여성이 억압받기 시작했는지를, 즉 여성억압의 기원을 질문할 필요가 있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했던 사회의 증거

“9000년 전 평등사회계급도 남녀 차별도 없었다”(중앙일보, 2017. 7. 31.).

계급도 폭력도 없이 9000년 전 농경 이상향’”(연합뉴스, 2017. 7. 30.).

작년 7월, 터키의 한 신석기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가 이런 제목들과 함께 신문에 오르내렸다. 한국-터키 수교 60년을 맞아 주 터키 한국대사관과 터키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문화 학술 교류행사 ‘아나톨리아 오디세이’의 일환으로 한국 대표단이 터키 아나톨리아의 차탈회이위크 유적지를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1993년부터 그곳에서 발굴 프로젝트를 지휘해 온 이안 호더(Ian Hodder) 교수에 따르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여성억압이 존재하지 않았다. “남녀 또한 평등했다고 볼 수 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호더 교수는 “그렇다. …… 당시 식생활을 조사한 결과 남녀 차이가 없었다. 같은 노동을 했다는 의미다. 발견된 유골의 성비도 동일했다. 공동육아로 마을이 유지된 것이다. 각 집은 작은 구멍으로 연결됐는데, 이곳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기다리며 산 것 같다.”라고 답했다(위 중앙일보 기사). 뿐만 아니라 공동생활 거주지에서 혈연관계가 아닌 유골들이 여럿 발견된 점, 서로 붙어 있는 여러 개의 방의 크기와 구조가 균일한 점, 관공서 역할을 하는 공간이 달리 없었다는 점을 통해,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동등한 지위를 누리며 공동체 생활을 했을 뿐 계급이나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평등 사회의 흔적은 비단 터키 아나톨리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년 10월 『가디언(The Guardian)』지에 실린 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만(James Suzman)의 글에 따르면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주/호안시(Ju/’hoansi)‘ 부족을 연구한 결과, “그들은 불평등이나 자기 자랑을 감내할 수 없으며, 어떤 공식화된 지도자 제도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은 의사결정에서 동등한 권한을 누렸고, 아이들은 여러 연령대가 섞인 집단 속에서 대개 경쟁적이지 않은 놀이를 했다. 그리고 연장자는 매우 애정 어린 대우를 받았지만, 어떤 특별한 특권도 부여받지 않았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어떤 이도 굳이 부나 영향력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고 결코 자기 주변의 환경을 과잉착취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사진: 제임스 수즈만 / 가디언]

또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마크 다이블(Mark Dyble)이 주도했고 과학 저널 『사이언스(Science)』에도 실린 한 연구 역시 비슷한 결론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수렵채집 단계에서는 대개 혈연에 따라 친족들끼리 모여 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아직까지 유지되는 수렵채집 사회집단들의 주거 및 네트워크 패턴을 살펴보면 집단 내에 가까운 친족 관계가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으며 혈연적 연결이 의외로 느슨하다는 ’역설‘이 발견되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연구진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본 결과, 거주지 결정에 있어 남성만 권한을 행사할 경우 가까운 친족들끼리 모여 살게 되지만,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권한을 행사할 경우 혈연적으로 관련이 적은 사람들과도 같이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즉,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남이 평등했기에 위와 같은 ’역설‘이 나타났을 거라고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억압이나 계급, 국가가 없는 원시공산주의 사회의 존재는 1884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이미 주장한 바 있다. 한때 이 주장은 반공주의적 편견 등으로 인해 인류학계에서 외면당했다. 하지만 엘리너 버크 리콕(Eleanor Burke Leacock), 리처드 리(Richard Lee) 등의 진보적인 인류학자들이 풍부한 질적 연구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엥겔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찾아낸 결과 오늘날 인류학계에서는 올바른 통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렵채집 사회·초기농경 사회의 성별 노동분업

물론 원시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이 주로 채집을, 남성이 주로 수렵을 담당하는 성별 노동분업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 분업은 억압적인 성격을 갖지 않았다. 의학 지식 등이 미발달한 당시의 생산력 수준에서는 이런 분업은 자연적, 객관적 조건에 대한 적응이었지 사회 구조적 억압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불합리한 성별 분업과 달리, “인류 역사의 최초 단계에서의 성별 분업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든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지배를 반영하는 것이다.”(린다 번햄, 미리엄 루이, 「불가능한 결혼」, 『여성해방이론의 쟁점』, 태암, 1989, 225쪽)라는 지적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인류학자 엘리너 버크 리콕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 대해 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인용자: 수렵 채집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은 가구가 공동체였고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이 호혜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살림살이는 남편에 대한 아내와 아이들의 의존과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 여성들은 자신들 또는 아이들의 경제적 궁핍을 두려워하느라 폭력적으로 화를 내는 남성으로 인해 다치는 것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 사실, 여성들은 식량의 많은 부분—종종 주요한 부분—을 공급했다. 많은 수렵채집민들은 주식으로 여성들이 채집하는 식물성 식량에 의존했고, 육류가 여기에 추가되었다(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이 이러한 사례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식물성 식량의 채집자이자 십중팔구 작물을 최초로 길렀을 원예농업사회들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농사일의 대부분을 했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결정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회적 필요노동의 주요한 몫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 그들의 기여에 상응하는 의사결정권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이와 같이 수렵 채집 사회에서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도 사회적 생산에 남성들 못지않게, 혹은 남성들 이상으로 기여할 수 있었기에, 성별 노동분업은 여성억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약 1만 년 전에, 유랑하던 수렵채집민들이 정주하여 경작을 하기 시작하는 이른바 ‘신석기 혁명’이 서서히 일어나서 초기 농경사회로 이행했을 때도, 여전히 주된 식량은 괭이나 뒤지개로 경작하는 여성의 농업노동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생산의 발전으로 성별분업이 억압적 성격을 갖게 되다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 같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생산의 발전으로 인해 초기 농경사회가 중농업 사회로 전환되면서 성별 노동분업의 성격은 달라졌다.

보다 잘 생존하기 위해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주요 농업 도구가 괭이와 뒤지개에서 쟁기로 대체되었다. 이는 생산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쟁기는 기존의 괭이나 뒤지개보다 더 많은 근력을 요구했다. 혹은 쟁기가 아니더라도, 농사에 관개시설을 활용하게 되는 등 더 고된 노동이 요구되는 방식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동시에, 수렵 채집을 하며 유랑생활을 할 때는 이동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출산을 어느 정도 억제할 필요가 있었지만, 정주생활을 하게 되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아이들을 많이 낳는 것이 집단의 생존에 유리했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당시의 생산력 수준 하에서는 오늘날처럼 피임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여성들은 많은 시간을 임신 상태로, 혹은 수유를 하며 보내야 했다.

이런 조건 하에서, 가축을 몰고 쟁기질을 하는 것이 주된 생산 방식이 되자 여성들은 사회적 생산에 예전만큼 참여하기 어려워졌다. 더불어 장거리 무역과 전쟁이 증가하였는데, 이 역시 임신과 출산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기는 힘든 활동들이었다. 그리하여 사회적 생산에서 남성의 노동이 여성의 노동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자 여성의 지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주된 식량생산자 역할을 하고, 여성들은 집 안에서 임신과 출산, 육아를 주로 담당하는 식의 성별 노동분업은 여남 모두 사회적 생산 자체에는 동등하게 참여했던 이전의 분업과는 달리 여성억압적 성격을 갖는다. 이렇게 생산이 발전하여 중농업 사회로 접어들자 성별분업의 성격이 여성억압적으로 변화한 것이 바로 여성억압의 근원이다.

생산의 발전은 여성억압을 출현시킴과 동시에 잉여생산물과 사적 소유를 출현시켰고 이는 계급과 국가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상 등장한 최초의 계급 적대는 일부일처제 결혼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적대 발전과 일치하며,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주된 식량생산자가 남성이기에 잉여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것 역시 남성이었다. 이에 따라 지배 계급은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가구 단위의 생산과 소비를 지휘하여 잉여생산물을 지배자들에게 바칠 책임을 부여했다. 이는 가구 내에서 연장자 남성이 가족 구성원들의 생산과 소비를 통제하는, 인류학적 의미의 ‘가부장제’ 구조를 강화하였다. 그러면서, 평등주의적으로 운영되던 기존의 혈통집단 공동체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이렇듯 생산의 발전이라는 공통의 원인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은 상호작용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켰다. 일각에서는 ‘계급억압이 여성억압의 근원이다’라는 것이 맑스주의의 입장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펼친 주장도 계급억압이 여성억압의 원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두 억압의 발생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억압의 기원을 질문해야 하는 이유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났던 이런 일들에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여성억압이 어디까지나 사회적·역사적 산물임을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즉 남성은 원래부터 여성을 억압하는 본능을 가진 존재가 결코 아니며,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살았던 사회는 분명 존재했다. 위에서 언급된 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만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사회들에 존재하는 위계를 불가피한 것으로, 우리라는 존재의 자연적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호모 사피엔스 20만 년 역사의 대부분 기간과 모순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면,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관계는 얼마든지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여성억압의 기원을 질문하지 않고 여성억압에 초역사적으로 접근한다면 이 지점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생산의 변천과 여성억압 사이의 관계이다. “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에,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에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일치한다”라는 맑스의 말처럼, 여성억압의 기원 역시 생산의 변천, 즉 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계급억압 역시 여성억압과 비슷한 시기에 생산의 발전이라는 공통의 원인으로부터 출현했다. 그렇기에 여성억압의 문제는 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생산관계의 발전 속에서, 계급 문제와 함께 총체적으로 인식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다.

4 댓글

  1. 엥겔스가 상속, 사적소유를 여성억압의 원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는 계급억압을 여성억압에 대해 우위에 두었습니다. 엥겔스에 동의하든 안하든, 그의 주장을 왜곡하면 안되죠.

    • 엥겔스는 계급 적대와 여성 억압의 기원이 일치했다고 했지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엥겔스의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을 직접 읽어보고 하는 소리인지…

  2.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를 참고하면 오해는 곧 풀릴 것 같은데..계급해방 안에서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상기문헌은 엥겔스의 기원을 직접 전거로 거론하므로 엥겔스의 여성해방 논의에 대한 기자의 해석은 오해임이 곧 드러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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