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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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뜨거운 여름,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기 위해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의 더 뜨거운 분노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것이 벌써 1년 전 이맘때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해방운동의 활력은 유지되고 있다. 미투 운동은 여성 청소년들의 ‘스쿨미투’로 이어지고 있으며, 올해 4월에는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되는 성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여성들이 끊임없이 여성해방운동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이들은 쉬지 않고 일상에서, SNS에서, 학교/일터에서, 거리에서 여성억압에 맞서 싸우는 중이다.

최근에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라는 책을 출간한 것은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 같은 시기, 운동이 한 발 더 전진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틀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가장 기본적인 질문인,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이 여성억압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답하지 못하고, 이는 여성해방의 전망을 둘러싼 혼란으로 이어진다. 가령 많은 여성들이 ‘비연애, 비혼, 비출산을 하며 남성을 멀리하는 것이 여성해방의 방법일까?’라는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여성들이 자기계발, 재테크를 잘하고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된다는 ‘야망 페미니즘’이 대두되기도 한다. 위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틀 속에서 명쾌하게 대답이 되지 않는 이런 질문들에 적절히 답하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주의 관점의 여성해방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주장하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 그게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니야?’라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틀렸다

먼저 지적할 점은 페미니즘과 여성해방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성향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제1물결)부터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제2물결), 그리고 그 이후까지 페미니즘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억압을 철폐하고자 하는 사상’이 아니라, 여성의 억압을 다른 모든 억압에 앞선 사회의 기본 모순으로 바라보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기고, 여성억압의 사회체제(예컨대 ‘가부장제’)가 독자적, 보편적으로 존재했다고 본다. 그 영향으로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역사적 기원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현재 여성해방운동 안에서의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페미니즘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것, 그리고 필자가 페미니즘의 틀을 벗어나자고 주장해온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페미니즘 앞에 ‘사회주의’를 붙인다고 위와 같은 한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1960년대 말에 등장한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양쪽을 모두 비판하면서 출발하였다. 여성문제와 계급문제 모두 중요한데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문제만 설명하고, 사회주의는 계급문제만 설명하기 때문에, 이 둘 다 설명하려면 페미니즘과 사회주의가 결합하여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었다. 이들은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여성억압의 사회체제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을 받아들였다(이 개념 자체는 인류학적 개념이지만, 이를 여성억압적 체제를 총칭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한 것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다). 논자마다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하나, 대체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이원론적 구조로 요약된다.

계급문제는 생산 영역, 자본주의의 문제이며 맑스주의로 설명되고, 여성문제는 재생산 영역, 가부장제의 문제이고 페미니즘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가부장제에 맞선 투쟁 둘 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론은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서로 분리된 것으로 파악한 후 이를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이론이었기에, 결국 여성문제와 계급문제 중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실제 현실에서 여성억압은 계급억압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며, 여성억압의 기원은 생산과 분리된 모종의 ‘재생산’ 영역이 아닌 생산이라는 틀 속에서 비로소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구체적 현실로부터 여성억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여성억압의 보편성과 독자성을 주장하려는 페미니즘의 주관적인 태도를 수용했다. 이것은 초역사적인 ‘가부장제’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시키려는 애초 의도와는 다르게 여성문제의 독자적 영역, 자율성을 강조하다 보니 이들의 실천은 점차 사회주의로부터 멀어져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독자적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와 같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는 그것이 처음 등장했던 1970년대부터 드러났고, 이후 서구 사회주의 페미니즘 내부에서는 자신의 이원론적 구조에 큰 한계가 있으며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평가를 지속해서 내놓았다. 이를테면 리즈 보겔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일관되고 비기계적 방식으로 이 체제들을 관계 맺게 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원체제 이론들은 사회 발전에 관한 분리된 설명들이 신비한 공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원성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 이론이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던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사이의 대립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평가했다. 수 퍼거슨 역시 “이 두 가지 불충분한 공식들을 넘어서지 못한 무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한 때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였던 상당수 사람들로 하여금 맑스주의뿐 아니라 유물론적 분석 일반을 거부하도록 조장”했고, “점차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 절정에 이른 여성억압에 대한 순수한 문화적 설명으로 옮아”가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몇 년 전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책이 보다 원제에 가까운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고, 미셸 바렛의 『반사회적 가족』도 재출간되며 사회주의 페미니즘 저작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사실 한국 바깥으로 눈을 돌려 보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충분히 나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지금 여성해방운동을 한 단계 더 전진시키기 위해 사회주의 세력이 해야 할 일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답습하기보다는, 페미니즘의 틀을 벗어나 사회주의 관점에서 여성해방에 대한 적극적인 분석과 입장을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제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사회주의 세력 중 일부는 사회주의 관점에서 여성해방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공연하게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경우는 사회변혁노동자당(이하 변혁당)이 대표적이다. 다른 한편 노동해방투쟁연대(이하 노해투)처럼 부지불식간에 사회주의 페미니즘 입장에 서고 있는 경우도 있다.

공공연하게 사회주의 페미니즘 입장에 선 변혁당

변혁당의 여성해방 강령 부분의 첫 문장은 “여성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견고한 결합구조 아래 억압·차별받고 있다”이다. 이 문장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형적인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가부장제 개념은 앞서 보았듯이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나온 것이고, 이를 받아들여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이원론적 틀로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형적 틀이다. 요컨대 변혁당은 강령에서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원론적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변혁당은 성명이나 기관지에 실린 글에서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왔다. 일례로 올해 여성의 날을 맞아 변혁당 학생위원회가 낸 성명은 그 제목부터 “2019년, 가부장제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였다. 작년 5월 16일자 변혁정치 65호에 실린 여성억압 관련 글에서도 “우리는 여성억압을 구조화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혐오의 정치를 넘어 평등의 정치로–강남역 살인사건부터 #MeToo까지」)라는 대목이 있다. 2018년 정치캠프 자료집 중 「현시기 페미니즘 운동의 과제」란 글에서는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적극 활용함. 여성노동을 부차적 노동, 여성임금을 보조수입원으로 취급함. 성별분업, 성차별, 가족중심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분리, 위계, 포섭 등 자본의 이윤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으로 작동함.”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변혁당은 현재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인 동시에 가부장제 사회라고 보는 이원론 입장을 채택했음에도 정작 ‘가부장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여성억압은 매우 오래되었고, 심각하다’는 말을 반복하기 위해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는 느낌까지 준다. 또한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결합구조’를 이루고 있고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여성억압을 구조화”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여성이 왜 억압받는다는 것인지, 자본주의와 이른바 ‘가부장제’가 왜 결합하게 되는지, 서로 결합해 있는 두 체제를 철폐하려면 하나의 혁명이 필요한지 아니면 두 개의 혁명이 필요한지 등 정작 기본적인 질문에는 답이 없다. 한마디로 변혁당은 앞서 살펴보았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실천적으로 결국 사회주의로부터 점점 멀어져 페미니즘으로 향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변혁당 역시 이런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변혁당은 여성억압 관련 사업에서 페미니즘을 스스럼없이 표방하고 있다. 가령 작년 11월 2일자 변혁정치 75호에 실린 「총여학생회 존폐 논쟁을 통해 본 학생운동의 과제」라는 글은 아예 공공연하게 “페미니즘을 통해 학생정치를 복원하자”고 말하고 있다. 또한 2018년 변혁당 정치캠프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의 현황과 과제’라는 세션이 있었다. 세션의 제목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입장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페미니즘운동의 장에서 계급적 여성운동 진영이 한 축을 형성해 나가기 위한 계획을 실물화해 나가자”는 발제문의 내용을 보면, 변혁당은 페미니즘에 별다른 위화감이 없으며 스스로를 페미니즘 운동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지불식간에 사회주의 페미니즘 입장에 서고 있는 노해투

노해투는 여성문제에 대한 명확한 조직 입장을 표명한 바는 없고, 기관지의 글을 보면 전반적으로 여성문제에 대해 입장을 내는 빈도수 자체가 높지 않다. 한편 노해투 회원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해투에서 최근 꾸준히 번역 소개한 여성해방투쟁 관련 외국 기사들을 살펴보면, 노해투가 부지불식간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4월에 노해투에서는 2017년 9월 15일에 『레프트 보이스(Left Voice)』에 게재되었던 프란체스카 고메스(Francesca Gomes)의 기사를 「현실 속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르헨티나 <빵과 장미>의 경험에서 배운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하였다. 제목에서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이 기사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PTS) 활동가들이 주축인 ‘빵과 장미’라는 여성 노동자 단체를 취재한 것이었다.

위 기사 하나뿐이라면 외국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한다는 좋은 취지에서 해당 기사를 번역 소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해투는 2018년 11월에 또다시 「우리의 페미니즘은 ‘반자본주의’여야 한다」라는 『레프트 보이스』 글을 번역 소개하였다.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이 글은 서두에서부터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시각이 좁고, 사회주의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에겐 전략이 결여돼 있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뿐만 아니라 그 글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언급하고 “가부장제와 맞서 싸우려면 자본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하는 등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원론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올해 4월 5일 노해투가 축약하여 번역 소개한 기사를 보면, 노해투가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입장에 서 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전 지구적 위기와 여성해방: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3년 전인 2016년 8월 15일 『레프트 보이스』에 실렸으며, 전에 소개한 바 있는 여성 노동자 단체 ‘빵과 장미’에서 활동하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인 안드레아 다트리(Andrea D’Atri)와 라우라 리프(Laura Lif)가 쓴 글이다. 노해투의 번역 기사만 읽으면 페미니즘의 여러 조류들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여성해방을 논하는 글로 보인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결론 부분의 맨 마지막 문장이 번역 과정에서 생략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해방을 위한 여성의 투쟁과 페미니즘의 기여를 통해 풍부해진 맑스주의적 비판은, 빛을 보기를 기다리는 새로워진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서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이다. 이 기사 역시 그 원문을 보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글이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노해투 회원들은 분명 스스로를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로 여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글들을 별다른 논평도 없이 번역 소개한다면, 노해투가 여성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노해투가 사회주의 페미니즘 입장에 선 기사를 계속 번역하여 싣고 있는 이유는, 여성문제에 대해 사회주의 관점에서 명확한 입장을 세우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니 이에 대해 개입은 해야 하는데 여성해방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명확한 자기 입장이 없다보니, 결국 외국의 좌파, 사회주의 세력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소개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주장할 때다

사회주의 세력으로서 여성해방을 진정 중요한 과제로 생각한다면, 사회주의 관점에서 여성해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명확한 입장을 세워야 한다. 위에서 검토한 변혁당과 노해투의 모습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적지 않은 사회주의 세력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성문제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페미니즘에 기대지 않으면 어딘가 불안해하며, 페미니즘 책모임이나 페미니즘 세미나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정작 사회주의 관점에서 여성억압을 분석하는 연구와 학습은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주의자라 해도 어쨌든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것이 여성억압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고,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말하면 왠지 여성억압을 부차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글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저 스스로를 페미니즘과 구별 짓기 위해서, 또는 페미니즘이 이제까지 해왔던 역할을 깡그리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의 여성해방운동이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페미니즘의 틀을 넘어설 것이 객관적으로 요구되고 있고, 이러한 때에 사회주의가 많은 강점을 갖는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여혐’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인가? 남성은 원래부터 여성을 억압하는 존재인가? 여성억압과 다른 억압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성억압을 단지 완화하는 것 말고 근본적으로 뿌리 뽑을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질문에 더 잘 답할 수 있는 사상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여성억압에 대해 정말 진지하다면, 여성해방을 진정 원한다면, 이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말할 때다.

한개의 댓글

  1. 앞부분 일부에 거슬려서 말씀드립니다.작년 혜화역 시위가 정당한 시위였나요? 불법촬영 편파수사가 올바른 구호였나요? 파이가 더 커지고있어 고무적이라고 하기전에 남성배제적 등등 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전형적(+한국적)한계가 드러나는걸 경계해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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