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 노동착취 은폐하는 자유주의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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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화학섬유연맹]

불행과 고통으로 얼룩진 사회일수록 듣기 좋은 말들이 넘쳐흐른다. 가령 절망, 아픔, 무시, 차별이 상존하는 곳에서는 희망, 위로, 배려, 존중 같은 말들이 설치기 마련이다. 역설이고 모순이다. 대다수 노동자 민중에게 지옥으로 묘사되는 한국사회가 딱 그렇다. 특히 이런 저런 선거판은 가히 ‘아름다운 말들의 성찬’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도 온갖 듣기 좋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동존중’이라는 말도 그 중에 하나였다.

과거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심상정 후보나 김선동 후보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야당 소속인 이재명도 ‘노동존중 사회’를 역설하고 다녔다. 한때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은 아예 ‘노동존중특별시’라는 슬로건과 함께 관련 노동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자리 대통령’을 선언하며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문재인 후보 또한 한국노총과 ‘노동존중’ 정책 연대 협약서를 체결하고 ‘노동자가 존중받는 대한민국’을 선언했다. 광장의 촛불로 마련된 이번 선거에서는 어느 때보다 노동 의제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박근혜 탄핵을 추동한 촛불의 원동력이 자본주의 위기에 따른 심각한 계급모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이즈막에 ‘노동존중’이라는 말은 선거판을 넘어 현장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슬로건처럼 쓰이고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도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듭시다!’처럼 ‘노동존중’을 키워드로 내세운 현수막이 자주 내걸리고 있다. 심지어 민주노총은 대선에서 문재인의 당선이 확정되자 ‘노동존중 나라를 위해 거침없이 나가길 바란다’는 내용의 논평을 냈고, 이틀 뒤에는 ‘노동존중 사회 실현을 위한 노-정 교섭 제안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노동존중’이라는 프레임에 대중적 노동운동진영이 갇혀 있는 모양새다. 이쯤 되면 고전의 명구(名句)가 연상되는 한 문장이 떠오른다. ‘노동존중’이라는 유령이 노동자들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비정규노동자 탄압하는 게 노동존중?

왜 좋은 말에 유령까지 들먹이며 시비를 거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하다. 물론 ‘노동존중’이라는 말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내뱉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그 배경과 의미가 다르다. 사실 ‘노동존중’ 슬로건을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건 일선의 자본가들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계급대립이 격화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자본가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니 ‘노동존중’이니 하는 말로 노사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나선 것이다. 그 단적인 실례가 있다.

국제연합(UN) 산하에 유엔글로벌콤팩트(UNGC)라는 전문기구가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자는 취지로 2000년에 발족되어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본가들의 ‘동아리연합’쯤 된다. UNGC 한국협회에도 국내 240여 기업이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으며 삼성 계열의 유통자본인 홈플러스 이승한 회장이 협회장을 맡고 있다. 한편 UNGC 한국협회는 인권, 노동, 환경 등 부문별 경영실적이 좋은 기업을 선정하여 ‘UNGC 가치대상’을 시상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노동부문에서는 ‘노동존중경영대상’을 수여한다. 2013년에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그 상을 받았다. 문재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를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기업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지난 10년 동안 노조 파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횡포로 악명을 떨쳐온 기업이다. 상을 받을 당시에도 인천국제공항공사는 87%를 차지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공사 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 기업이 ‘노동존중’ 기업으로 선정된 것이다. 결국 UNGC 한국협회는 ‘노동탄압경영’을 ‘노동존중경영’으로 둔갑시켜주었다. 그로써 UNGC는 자신들이 내세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떤 방식으로 이행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동존중’ 프레임은 자유주의자들이 쳐놓은 덫

이처럼 ‘노동존중’ 프레임의 설계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집단 내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었다. 계급 대립이 첨예한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의 급진적 저항을 유예시키고자 내놓은 타협책인 셈이다. 자신들의 지배체제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것만큼은 막아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런 마당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존중’을 내거는 건 모순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노동존중’이라는 말을 자본가들과 같은 의미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기도 쉽지 않을 만큼 노동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노동의 참된 의미를 조금이라도 일깨우고 싶은 소박한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 이 말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본질적 의미에서 노동은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목적의식적 활동을 말한다.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며, 인류 진화와 사회 발전을 일군 원동력이다. 한마디로 인간 자체가 노동의 산물이다. 하지만 계급사회에 이르러 노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행위로 변질되었다. 고대 노예들의 노동도 그랬고, 봉건 농노들의 노동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임금노동 또한 잉여가치를 증식하여 자본가들의 사적 이익을 실현해주는 과정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계급사회에서 노동을 존중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착취당하는 행위를 존중한다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자본가들에게는 이보다 듣기 좋은 말이 없을 터지만.

우리는 계급 모순이 첨예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 감소와 실질임금 저하로 노동착취도 강화되는 현실이다. 그에 따라 다수 노동자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지배세력에게는 이러한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문재인 정권에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최저시급이 1만원으로 오르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임금노동의 성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동존중’을 내세우는 것은 착취관계에 기반을 둔 지금의 임금노동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노동존중’이 아니라 ‘노동해방’이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주된 구호는 ‘노동해방’이었다. 노동자로서 존중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투쟁의 목표는 아니다. 그래서 임금 인상 등 당면한 투쟁을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에서의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그것을 일상적으로 되새기는 의미에서 ‘노동해방’을 외치고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를 노래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노동해방’은 ‘노동존중’으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는 ‘노동자가 존중 받는 사회’로 대체되었다. 게다가 명망 있는 자유주의자들의 입을 통해 ‘노동중심’이니 ‘노동배제’니 하는 정체불명의 모호한 말들이 흘러나온다. 혹자는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처럼 말이 안 되는 말을 내놓기도 한다. 겉으로는 중립을 가장한 말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임금노동에 의한 착취구조를 은폐하고 노동자대중의 계급의식을 지우기 위해서 조작된 말들이다. 여기에는, 이미 난파한 자본주의 체제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을 말하면서 노동을 왜곡한다. 그들의 말을 여과 없이 따르다 보면 노동자들 또한 노동을 말하면서 노동을 왜곡하는 이율배반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임금노동의 굴레에 갇힌 자신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는 식의 씁쓸한 광경을 연출하지는 말아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행하는 노동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또한 투쟁 현장에서는 자신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치켜들어야 할 것은 ‘노동존중’이 아니라 ‘노동해방’의 깃발이다. 노동자의 발걸음이 향해야 할 곳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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