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자본주의’ 타파하면 불평등 해소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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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울신문]

정의당 제5기 당직선거에서 심상정 후보가 대표로 당선되었다. 노동조합 간부 출신 양경규 후보가 심상정의 대항마로 나섰지만, 선거 초반부터 ‘어대심(어차피 대표는 심상정)’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만큼 결과가 빤한 선거였다. 예상대로 심상정은 83.58%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아 2년 만에 당 대표로 복귀했다.

다만 이번 정의당 당직선거에서는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하나 있긴 했다. 심상정의 당대표 후보 공약에 “불평등 해소하고 세습자본주의 타파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헤드라인으로 걸린 것이다. 아울러 출마 선언을 통해 심상정은 “불평등의 근본 뿌리인 세습자본주의를 개혁하고 경제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일갈했다. 태생부터 퇴행과 우경화를 거듭하며 사이비 진보의 길을 걸어온 정의당(이와 관련해서는 2016년 12월 발행된 본지 3호의 기사 「정의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의 당내 선거에서, 비록 ‘세습’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긴 했지만 ‘자본주의’를 문제 삼았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과거에도 정의당은 ‘자본주의 개혁’을 당 비전 가운데 하나로 내세운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사뭇 어감이 다르다. 게다가 심상정의 대항마를 자처하고 나선 양경규 후보 측 선거 슬로건 또한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그간 민주당 2중대를 자처하며 자유주의 노선을 걸어온 정의당에 어설프게나마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정의당이 반(反)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진보정당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무엇보다도 심상정의 세습자본주의 모델은 반자본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전혀 진보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한물 간 가설에 불과한 까닭이다.

‘세습자본주의’는 한물 간 자본주의 옹호론

세습자본주의는 몇년 전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가 저성장 자본주의 시대 불평등의 원인으로 내세운 경제 가설이다. 결론은 별다른 게 없다. 이 시대가 겪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의 주원인이 분배소득의 차이 때문이므로 세금을 더 거두어 불평등을 완화하자는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 같다. 언뜻 자본주의 공황이 심각하던 20세기 초반에 나온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주장이 떠오른다. 이미 한국에서도 많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했던 말이다. 심지어는 말잔치로 끝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과도 뿌리가 닿아 있다. 다만 피케티는 접근법은 참신해보였다. 그 내용을 대략 살펴보자.

피케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이른바 ‘국민소득’을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으로 구별한다. 여기서 자본소득은 대부분 상속 받은 자본, 즉 세습 자본을 이용한 소득이다. 피케티는 이 자본소득 배분율과 경제성장률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이터를 통해 경제성장률이 낮을수록 세습에 의한 자본소득 배분율이 증가하고 노동소득 배분율은 하락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따라서 부유세, 상속세 같은 세금을 늘려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 피케티의 해법이다. 큰 틀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가 세습단계에 이르러 더욱 심각한 불평등의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정부의 개입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세습자본이든, 세습자본으로 인한 자본소득이든 그 원천은 생산단계에서 발생한 잉여노동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피케티는 불평등의 진짜 원인인 생산관계의 모순을 외면한 채 성장률과 분배소득의 관계에만 집착했다. 상속, 또는 세습 이전에 형성된 자본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불평등을 말하고자 한 피케티의 시도 자체가 중대한 오류였던 셈이다.

피케티는 세습자본을 ‘21세기 자본’의 특성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19세기 자본이나 20세기 자본과 다른 21세기 자본이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21세기자본, 즉 세습자본 또한 보편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으로 빚어진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피케티는 현상을 현상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순환논리를 통해 생산관계의 모순을 은폐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해묵은 수법이다. 결과적으로 피케티의 세습자본주의 모델 또한 수많은 자본주의 옹호론 가운데 하나이다. 맑스의 『자본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나 정의당 같은 사이비 진보세력은 피케티를 ‘소심한 맑스주의자’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피케티는 맑스주의의 반대쪽에 서서 불평등에 관한 영악한 접근법으로 맑스주의를 교란시켰을 뿐이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는 자유주의자들

사실 한국에서는 세습자본주의 모델이 수입되기 전부터 항간에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야만자본주의’, ‘정글자본주의’ 같은 말도 더러 나돌았다. 이런 말들은 특히 나름대로 진보를 자처하며 젠체하는 사람들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렸다. 이 가운데 가장 유행한 천민자본주의는 한국 자본주의가 서구 자본주의, 또는 선진 자본주의에 비해 매우 천박하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라는 게 근사한 인격과 소양을 갖춘 엘리트들이 주도하면 괜찮은 제도인데 천하의 ‘상것’들이 나서서 설치는 바람에 잘못 작동되어 부작용이 생긴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현실의 불평등을 외면할 수는 없고,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것도 알지만 대놓고 반(反)자본주의를 말할 용기는 없는 사이비진보와 자유주의자들에게 천민자본주의 모델은 편리한 레토릭(rhetoric, 정치적 수사)이었다.

하지만 천민자본주의 같은 레토릭은 뭔가 허전했다. 의미가 추상적이어서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는 학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권위를 획득하기 어려웠다. 21세기 벽두는 가뜩이나 한국에서는 재벌자본의 3세 세습이 전면적으로 이뤄지던 터였다. 굳이 재벌자본이 아니더라도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축적된 부(富)가 2세대에 세습되는 한편 실질임금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상속받을 재산도 없고 취업전쟁에서도 도태된 다수의 청년 예비노동자들의 좌절이 깊어지던 때였다. ‘금수저, 흙수저’, ‘조물주 위에 건물주’ 같은 말들이 유행했다.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들의 처지도 살얼음판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처럼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젊은 경제학자 피케티의 세습자본주의 가설이 상륙했다.

세습자본주의 가설은 21세기 자본주의의 한국적 상황에 주효했다. 덕분에 피케티는 저성장과 불평등의 어두운 터널로 접어든 대중에게 책을 팔아 거액의 저작료를 챙겼다. 하지만 그의 책은 현실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국내 자유주의 경제학자들 가운데 피케티 아류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른바 ‘분배의 정의’를 추구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자본주의가 문제” 대신 “세습자본주의가 문제”라고 말한다. 이 가운데 장하성, 김상조 등은 재벌개혁을 주장하다가 문재인 정부의 경제 관료로 발탁되기도 했다. 자유주의 언론들은 이들이 재벌개혁의 칼날을 휘두를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막상 관직을 차지한 그들은 재벌개혁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피케티와 그의 아류들은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가 망한다. 자본주의를 고쳐 써야 한다”며 짐짓 비장하게 말하지만 정작 ‘생산의 정의’가 없으면 분배의 정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폭로되는 것은 두려워한다. 이들은 다만 자본주의 모순을 ‘세습’자본주의 모순으로 축소하고, 착취적 생산관계의 문제를 시장적 분배관계의 문제로 호도한다. 그 점에서 이들은 여전히 ‘착한 자본주의’나 ‘선진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판매하는 지식상인들이다. 뒤늦게 뒷북을 치듯 세습자본주의를 들먹이며 이들을 답습하는 정의당의 심상정 또한 낡은 자본주의체제의 연장에 부역하는 자유주의자 정치인일 뿐이다. 심상정의 속물적 정치언어와 정의당의 진부하고 고답적인 행태가 이번 당직 선거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 셈이다.

세습자본주의는 대중 기만 슬로건

심각한 불평등의 늪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한국의 노동자 민중은 나날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깨달으며 의식적으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따라서 내년 총선을 앞둔 정의당이 진보정당 흉내를 내면서 최소한의 존재감을 유지하려면 자본주의적 불평등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당직 선거에서 세습자본주의니 민주적 사회주의니 하는 슬로건이 등장한 것도 그런 사정을 반영하였을 터다. 하지만 심상정은 출마선언에서 “불평등의 근본 뿌리인 세습자본주의를 개혁하고 경제적폐를 청산하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사이비진보임을 실토했다. 불평등의 근본 뿌리를 자본주의가 아니라 세습자본주의라고 말함으로써 피케티의 오류를 답습한 까닭이다. 결국 심상정은 “자본주의는 문제가 없는데, 세습된 자본이 문제”라는 자본주의 옹호론을 교묘하게 펼친 것이다.

한편 심상정은 출마선언문에서 정의당의 경제비전과 관련하여 심각할 정도의 정치적 무능함과 기회주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과 미래성장산업에 대한 과감한 국가투자로 새로운 한국형 경제성장전략을 제시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당대표 산하에 ‘그린뉴딜경제위원회’를 설치하겠습니다. 적극적인 정부의 확대재정정책, 수송·에너지·건물 분야의 인프라를 녹색으로 전환하는 그린뉴딜을 통한 경기활성화, 글로벌 분업 체계에서 한국 제조업의 위상을 높이는 첨단제조산업 육성 등 경제대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오래 전부터 귀에 익은 내용들이다. 그러고 보니 ‘4차 산업혁명과 미래성장산업에 대한 과감한 국가투자’나 ‘첨단제조산업 육성’, ‘새로운 한국형 경제성장전략’ 등은 박근혜의 창조경제 모델과 흡사하고,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에서 나아간 게 없다. ‘그린뉴딜을 통한 경제 활성화’라는 비전은, 오카시오-코르테스의 ‘그린뉴딜’을 따온 듯 보이지만 미국에서 루즈벨트 정부가 시행한 ‘뉴딜’과 한국의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녹색성장’의 합성어란 냄새를 지울 수 없다. 심상정이 추구하는 정의당의 경제비전은 루스벨트와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가 각각 실패한 정책들을 두서없이 나열한 성장 일변도의 비전이다. 심상정이 슬로건으로 내세운 ‘세습자본주의 타파와 불평등 해소’와도 정면으로 어긋난다. 심상정은 상속세 인상 같은 흔하디흔한 불평등 해소정책도 언급하지 않는다. 세습자본이 불평등의 근본 뿌리라면서, 세습자본의 한 원인인 성장정책으로 불평등을 치유하겠다니. 참으로 해괴한 논리다. 이러한 점에서 심상정의 세습자본주의 모델은 사이비진보다운 대중 기만 슬로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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