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승리는 필요없다! 체제의 문제를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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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포기’가 아닌 ‘저항’이다? 청년에게 ‘정신승리’를 종용하는 논리들

‘정신승리’, 이 말은 루쉰의 『아Q정전』에 나온다. 실제 현실은 좋지 않은데 사실 자신은 좋은 상황에 있는 것이라고 근거없는 자기암시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흔히들 지금의 청년세대를 일컬어 미래 준비와 관련한 여러 가지 것들을 포기했다는 의미로 ‘N포세대’라거나, 건국 이래 처음으로 자신들 부모세대보다 소득이 낮아진 세대라는 등의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낮아진 출산률과 취업률, 소득수준 등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든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방송이나 신문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청년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나 육아 등을 하지 않고 어렵게 구한 직장을 퇴사하고 주택 구하기나 저축 등을 포기하는 현상에 대해, 이것은 ‘포기’가 아닌 거부이고, 주체적 선택이며, 기존 사회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하는 기괴한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청년문제를 두고 신종 ‘정신승리’ 논리가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를 추적해보면 몇 년 전부터 이미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대학내일』이란 매체는 2016년 6월 14일자 기사 「N포 세대에게 필요한 건 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포기하고 있는 현실이, 내가 하고 싶어서 주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내몰려 수동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 포기를 수동적으로 하는 게 아닌, 스스로 결정했단 느낌이 들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최근 다시 정신승리 논리가 언론에 부쩍 실리는 모양을 보이고 있다. 올해 수구언론 동아일보는 새해 첫날부터 N포세대가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라며 “결혼이나 출산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 ‘포기’했다는 건 기성세대의 기준이고”, “포기가 아니라 ‘거부’다. 포기는 ‘왜 이런 세상을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느냐’ 하는 20대의 저항 의지를 담지 못한 말”, “포기하는 것들이 많다고는 느끼지만 그렇게 불리는 게 싫다. 앞으로도 내가 포기하는 삶을 살게 될 것 같아서”와 같은 인터뷰 내용을 쏟아냈다. 자유주의 언론 한겨레신문조차 3월 17일자 기사에서 “청년 퇴사는 기존 사회 질서에 금을 긋는 청년 세대의 무의식적 집단 행위”라고 말했다.

시사IN 6월 5일자 기사 「‘n포 세대’가 포기하지 않은 것」은 ‘정신승리’ 논리의 대미였다. 이 기사는 청년들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지만 사실은 ‘나’라는 자기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다며, 마치 ‘N포’가 ‘개인’의 중요성을 자각한 것처럼 미화했다.

청년들이 무엇을 포기했는가보다는 결국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n포 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게 ‘나’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에게 청년들이 처한 문제에 대한 ‘시각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결혼이나 육아, 주택구입, 저축, 직장 등에 대한 ‘포기’를 청년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길이라고 여기거나, ‘포기’라는 행위 자체가 이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봐야 한다는 식이다. 청년을 단지 ‘피해자’ 내지는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청년이 겪고 있는 고난은 사실 고난이 아니라 선택이고, 새로운 삶의 양식이고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스스로가, 청년들의 지금과 같은 ‘포기한’ 상태 그 자체를 인정하고 수용하여, 그런 모습 그 자체로도 가치있다고 해 줄 것을, 청년들이 계속 그런 모습으로도 살 수 있게끔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보장해줄 것을 주장한다.

정신승리 논리의 문제

위에 거론된 이들의 주장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위와 같은 ‘정신승리’ 논리는 암담한 현실은 털끝만치도 건드리지 못한 채, 자기 혼자만의 인식개선을 통해 자기 혼자 만족하고 끝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들은 부모세대보다 더 높은 취업경쟁률 속에 자신을 소모시켜가며 ‘노오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양질의 일자리, 충분한 소득, 안정된 주거 등을 스스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빚을 갚고 먹고 살기 위해 수백 군데에 입사지원을 하지만 계속 낙방하고, 야근과 주말근무를 비롯한 가혹한 노동조건 및 직장 내 괴롭힘과 성폭력에 시달리지만 생계 때문에 퇴사는 꿈도 꿀 수 없는 청년들이 넘쳐난다. 결혼이나 출산 및 육아에 있어서도,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 및 퇴사요구, 경력단절로 인해 그 선택이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6월 7일자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에 따르면, 20~30대 중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기혼자 비율도 낮아지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벼랑 끝에 내몰린 지금의 상태를 바꾸기는 커녕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애초부터 포기나 선택이 아닌 ‘박탈’임에도 불구하고 이 박탈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승리’ 요법들은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들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엇 때문에 삶이 이렇게 힘든지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이 되지도 못한다. 말로는 청년들의 선택과 주체성을 말하는데, 자본주의 안에서 뭘 하고 싶어도 하질 못하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저런 말은 결국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정신승리가 아니라, 체제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승리 논리가 왜 계속해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청년들이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예에서 보면, 정신승리론을 주로 설파하는 사람들은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 같은 지배계급과 그 하수인임을 알 수 있다. 청년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분명한데, 청년들이 이 사실을 직시할 경우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이 진실을 숨기려는 것이다. 또한 청년들로 하여금 이 체제를 마치 좋은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청년들의 현실을 마냥 나쁘게만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며 정신승리를 처방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청년의 삶은 심각하다. 또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청년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정신승리 논리처럼 개인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면 되는 것일까? 또는 개인의 ‘노오력’을 ‘노오오오력’으로 대체하면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청년의 삶이 바뀌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이 사회의 구조적 측면에 눈을 돌려야 한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그 자체다. 청년들의 삶의 문제를 정말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해야만 한다.

패스트푸드 업계의 노동자. 맑스 저작과 자본론 학습을 통해 사회주의를 배웠다. 사람을 '노동자 대 고객'이나 '상사 대 부하'의 관계로 만나는 것을 매우 싫어하며,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만으로도 모두가 유익해지고 발전할 수 있게끔 되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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