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상에 영광은 없다 ②: 에베르트 재단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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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http://www.fes-europe.eu/about/fesde/]

[편집자 설명] 촛불투쟁 1주년이 다가오는 지난 10월 16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은 촛불 시민에게 ‘2017 에베르트 인권상’을 수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축하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에서 주는 상이 정말 환영할만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26일 게재된 기사에서는 에베르트가 어떤 존재이고 독일혁명을 파괴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 지를 살폈다. 이번 글에서는 에베르트 재단이 어떤 곳인지 설명한다. 기고해주신 채효정님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2017)의 저자이다.

오명은 어떻게 명예가 되었나

[지난 기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상에 영광은 없다: 독일 혁명의 파괴자 에베르트」는 에베르트가 보수 우익의 반동보다 노동계급의 해방을 더 두려워 한 인물로 자국민을 학살하면서까지 독일 혁명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훗날의 사민주의자들은 독일 사민당의 이 씻을 수 없는 원죄와도 같은 그 이름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FES: Friedrich Ebert Stiftung)’이라는 사민당 정치재단의 이름 속에 기입하여 계속 쓰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마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에 ‘히틀러의 시대’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치 하에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폭압의 시대를 겪으면서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저질러졌던 혁명에 대한 탄압과 민중에 대한 폭력을 망각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전두환의 시대와 이명박 박근혜의 시대가 너무 끔찍했으므로 그 사이에 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실제보다 훨씬 더 좋은 ‘민주 정부’로 부각되고 심지어 좌파 정부로까지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독일의 지식인들은 종종 바이마르 시대를 탈정치화 하여 문화의 전성기로만 기억하려고 한다. ‘좋았던 그 시절’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점을 지우는 것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좌파 사냥꾼 자유군단을 창설하고 이끌었던 구스타프 노스케도, 구체제 인사들과 손잡고 노동자평의회를 박살낸 프리드히 에베르트도 나치 하에서는 모두 탄압 당했다. 나치는 온건파 사민주의자들도 감시하고 통제했으니까. 1925년에 창립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도 나치 하에서는 활동이 금지되었다.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왔다’에서처럼 나치의 시대는 공산주의자, 사민주의자, 노동조합원과 유태인을 차례로 덮쳤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그 시대가 끝나고 나니 거의 대부분이 나치에 의해 탄압당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전후 점령기에 서독을 통치한 미군정은 독일의 지식인과 문화예술계의 나치 부역자들에게는 관대했다. 냉전기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우월성과 서방세계의 문화적 우월성을 전파할 지식인과 문화그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과오는 동서독의 분단과 냉전기 대결구도 속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게다가 내전과 분단의 경험 때문에 전후 독일 정치는 필사적으로 타협을 추구했다. FES라는 재단의 성격은 그런 전후 냉전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은 어떤 곳인가

전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은 다시 부활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FES는 전 세계 곳곳에 사무소를 설립하는데 한국사무소도 1960년대 말에 들어왔다. 재단은 홈페이지를 통해 “다원적 민주주의 속에서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경제 정책을 추진하고, 이를 통한 경제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기본 목표를 밝히고 있다.

FES의 목표와 주요활동은 재정 지출, 사무국의 분포, 보고서, 인권상 수여자 등의 면면을 분석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FES)의 재정은 그 절대적인 부분(약 95%)이 연방정부로부터 충당된다. 2007년의 예산은 1억 1,700만 유로(약 1,500억 원) 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 1억 1천만 유로가 연방정부의 재정에서 나왔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지출 부문이다. 지출부문을 보면, 예산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국제 협력사업이다. 전체 예산의 55%인 6,700만 유로가 여기에 쓰인다. 그 외 900만 유로는 학술연구 및 연구진흥 사업에, 1,400만 유로는 장학사업에, 그리고 2,000만 유로는 정치교육 부문에 할애된다. (희망제작소 소식 [독일의 정책브레인을 해부한다(8-1)]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FES) 2008. 12. 23. 참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해외 사무소는 전 세계 곳곳에 100여개가 넘는다. 한 국가의 정당재단이 관할하는 해외 사무소 치고는 규모가 상당하다. 구체적 지역을 살펴보면 아프리카 20개국,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10개국,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에 24개국, 라틴아메리카에 17개국, 북미 3개국, 유럽 29개국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많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서유럽은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정도이고, 남부 유럽의 그리스와 터키 외에는 모두 보스니아, 코소보, 크로아티아,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이며, 러시아가 포함되어 있다.

독일에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외에도 정당과 연계한 이런 성격의 재단들이 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1964)은 기독민주당(CDU)과, 한스 자이델 재단(1967)은 기독사회당(CDS),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1958)은 자유민주당(FDP)과, 하인리히 뵐 재단(1996)은 녹색당(Grünne)과 각각 연결되어 있다. 그 중에서 FES의 재정 및 사업 규모가 가장 크고 해외 지부의 수도 가장 많다. 좌파당(Links Partei)과 연계된 정당 재단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으로 1998년에 설립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인권상은 1994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994년 첫 수상자는 제 3세계 여성 지원 활동을 하는 마리 슐라이(Marie Schlei) 협회였다. 마리 슐라이는 1970년대 독일 경제개발협력부 장관이다. 첫 해만 독일이었고, 이후의 수상자들은 모두 폴란드, 나이지리아, 보스니아, 인도, 러시아, 세르비아, 르완다, 수단, 페루,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남아프리카공화국, 파키스탄, 태국, 콜롬비아 등 거의 대부분 비서구 국가들에서 나왔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한국 내 협력기관을 보면 유력 사회단체들과 국가기관을 망라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대화문화아카데미, 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선거관리연수원, 시민사회포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전국금속노동조합, 참여연대, 통일부,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보건의료노동조합,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독경상학회, 한반도평화포럼, 희망제작소 등이 FES와 협력한다.

이처럼 FES는 독일의 입장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와 경제 이념을 제 3세계에 이식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가장 중심적으로 해왔다. 동시에 해외 사무국을 통해 각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협력기관들과 함께 정책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도 하였으며 이것은 ‘수혜국 맞춤형 원조 프로그램’이라는 개발협력 정책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영리 공익 재단이라는 성격으로 제3세계 정치와 운동에 개입해온 것도 사실이다. 재단은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자유와 다원주의 의회주의를 보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지원이란 이름으로 때론 협력이란 이름으로 제 3세계 국가들의 정치와 운동에 개입했으며 사민주의적 대안은 절충과 중재를 통해 혁명을 무력화하고 제도 안으로 흡수하는 데도 기여했다. 민주주의의 지도자나 인권운동가(단체)에 상을 주는 것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FES 인권상의 가장 중요한 척도 역시 ‘평화와 질서’이다. 재단 소개 사이트에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정치적 유산을 따르는 것이 재단의 임무라고 밝히고 있듯이 인권상 역시도 그의 유지를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라는 이름은 과거의 오명이 아니라 현실의 독일 사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에도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이마르 시대와 실패한 사민당의 교훈

『바이마르 문화』를 쓴 피터 게이는 바이마르 시대가 남긴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바이마르의 가장 큰 과오는 구질서 기구였던 군부, 관료, 법조인들을 무력화시키거나 개혁하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은 재앙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에베르트는 노동자들의 무장 봉기를 막기 위해 우익 민병대의 무장을 허락하였고, 노스케는 이 우익의 군대에게 ‘빨갱이와 불순분자들, 사회혼란세력들’을 박살낼 자유를 주었다. 그런 정부에서 황제에게 충성하던 제국의 법관들은 공화국에서도 여전히 법관으로서 판결하고 있었다.

피터 게이에 따르면,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겐 어떤 동정심도 베풀지 않았지만 전직관료들에겐 유순한 태도를 보였다.” 1918-1922년 좌익의 우파에 대한 암살은 22건이었다. 그 가운데 17명은 중형, 10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반면 우익의 암살은 354건이었다. 이 가운데 단 한 건만 중형을 받았다. 좌익의 평균 형량은 15년이었고, 우익은 4개월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만의 시대에 일어난 일인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이름을 가지고 인권상 수상을 트집을 잡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민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보다 더 크다.

에베르트의 바이마르 시대에 지식인들은 절충으로 일관했다. 피터 게이는 그런 사람들을 머리만 공화주의자란 의미에서 ‘이성적 공화주의자’라 부른다. 나쁜 군주 대신 좋은 군주를 여전히 기대하는 그들은 사실상 군주제를 옹호하며 노동자 민중보다 훌륭한 군주의 통치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노동자들도 처음에는 말(馬) 안장을 만드는 노동자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자신들의 편일 것이라고 믿었다. 유럽에서 말은 귀족의 상징이다. 귀족들이 타는 말의 안장을 만들던 노동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전복된 권력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자 출신인 에베르트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않았다. 케이트 에번스의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집권 첫 날의 에베르트는 마치 노동계급에서 태어난 카이저(Kaiser)처럼 행동하고 있다.

지금 사민당은 어떤가? 1999년 가난한 노동자계급 출신인 게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이 집권했을 때 그의 집권기에 빈곤층이 두 배로 늘어나고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지리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사민당은 ‘제 3의 길’ 노선을 채택하면서 복지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법인세 인하,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 주요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대학 등록금이 도입되었고, 영리대학 설립이 허가 되었다. 슈뢰더 정부의 ‘아젠다 2020’의 경제개혁 정책인 하르츠 개혁안을 만든 하르츠는 폭스바겐사의 사장이었다. 세계적 경제 위기와 고통의 시기에 사민당은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계층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중도’를 구호로 내세우며 중상층의 부르주아 계층에 집중했다.

슈뢰더 집권 10년 동안 20만명이 넘는 당원이 사민당을 떠났다. 추락에는 끝이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의 좌초를 불러온 이 절충과 타협의 대연정 노선은 지금 한국에서는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최근 ‘제 3의 길’ 대신 ‘혁신’이란 화두를 던지며 사회혁신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민간 씽크탱크인 여시재는 노무현 정부의 롤 모델이었던 슈뢰더를 다시 불러왔다. 노무현을 계승하는 정부에서 핵심 친노 인사인 이광재 여시재 부원장이 협치를 외치며 슈뢰더에게 ‘연정의 대결단’에 대해 묻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며 상징적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상을 받아야 한다, 만다,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촛불을 빠른 속도로 과거화 하고 있는 현상이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촛불은 승리하지도,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도처에서 배신당하고 좌초하고 있다. 광장은 낭만의 기억으로 남기에는 아직 이르고 남은 이들의 고통은 여전히 너무 크다. 정권은 바꾸었지만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이 교훈이 다시 한 번 반복될 때, 다음의 정치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이 질문은 2017년 총선에서 제 3당으로 부상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답해줄 것이다. 그 또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시대의 유산이다.

2 댓글

  1. 글은 감사히 읽었습니다만 다소 의아한 구석이 남습니다. 에베르트와 사민당의 유사성이 정확하게는 이해가 가질 않네요…작금의 에베르트의 행위들을 과거의 에베르트 그리고 현재의 사민당과 등치시킬 수 있는지…즉 근거로 드신 에베르트가 상을 수여하는 행위가 사민당의 제3의길 만큼 패악인지가 안갑니다.

    • 그런 논리면 서정주 문학상도 문제 없겠네요. 서정주가 친일을 했건 부역행위를 했던 서정주 문학상이랑은 관련 없으니까요. 글부터 명확히 읽고 댓글 답시다. 글의 핵심은 에버트란 인물이 한 행위를 두고서도 그런 애버트를 기리는 재단의 상을 받는 게 마땅하냔 비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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