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상에 영광은 없다 ①: 독일 혁명의 파괴자 에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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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사진: 노동과 세계]

[편집자 설명] 촛불투쟁 1주년이 다가오는 지난 10월 16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은 촛불 시민에게 ‘2017 에베르트 인권상’을 수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축하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에서 주는 상이 정말 환영할만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에베르트는 1918년 독일혁명을 실패하게 만들고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한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상세히 밝히는 글을 기고받았다. 이 글은 두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2편도 조만간 게재할 예정이다. 기고해주신 채효정님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2017)의 저자이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누구인가

‘촛불 시민’이 상을 받는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퇴진행동)는 2017년 10월 16일 독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한국사무소 측과 공동 주최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2017 에베르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축하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에서 주는 상이라면 과연 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한국사무소와 퇴진행동 측은 그를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일의 첫 대통령’이라고만 밝혔다. 그런데 역사는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우리는 1919년 1월 11일 베를린에서 있었던 학살의 밤에 절망에 찬 시민들이 외치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지옥에나 떨어져라”

[사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Wikimedia Commons]

케이트 에번스의 작품 『레드 로자』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이 마지막 진압을 당하는 순간을 묘사한 장면이다. “황제도 이런 짓은 안했어. 한번도. 독일군은 자국민에게는 총을 쏘지 않았다고. 그런데 지금은 ……” 시민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죽어간다. 그 때 독일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1918년 독일혁명(11월 혁명) 당시 노동자 시민들을 황제의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고, 자신의 오른팔인 우파 사민주의자인 구스타프 노스케에게 ‘자유군단(Freikorps)’이라 불리는 우익 민병대를 조직하도록 하여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유혈 진압하도록 한 장본인이다.

거리의 깡패들과 퇴역군인들로 구성된 이 자유군단은 ‘서북청년단’과 같은 조직으로 빨갱이 때려잡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좌파에 대한 정치테러를 담당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바로 그들의 손에 납치되어 암살당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구스타프 노스케는 그들에게 사민당의 옛 동지였다.

독일혁명과 사민당의 배신

독일혁명의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918년 11월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키일(Kiel)에서 해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전운은 이미 기울었고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해군 사령부는 마지막 모든 것을 걸고 영국 함선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전쟁에 좋은 전쟁이 있겠는가마는 유럽인들이 일으킨 20세기의 양차 대전은 지금까지 인류의 전쟁사와 확연이 구분되는 최악의 전쟁이었다. 특히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대량학살이 그러했다. 이전의 전쟁은 군인과 군인끼리의 일이었다면 1차 대전에서는 그 금도가 깨어졌다. 적국의 민간인도 적으로 간주되었다. 황제와 군부는 독일 영해권을 지나는 영국 국적의 모든 배들에 대한 공격을 승인했다. 그러나 수병과 화부들은 고향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그 명령에 불복종하기로 한다. 독일 해군사령부가 실패할 것이 자명한 무모한 공격 명력을 내렸을 때 마침내 수병들은 봉기를 일으킨다.

전쟁이 지긋지긋했던 것은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이 호응해 봉기에 가담하면서 키일에는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구성되었고, 평의회가 시(市)의 실권을 장악했다. 혁명은 독일 북부로부터 남부와 서부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바이에른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최초로 수립되었고 곳곳에서 병사와 수병, 노동자들이 만든 평의회가 기존의 지방정부를 대체해나갔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까지 시위가 확산되었다. 우익 지배층과 군부로부터 퇴위 압박을 받으면서도 버티고 있던 빌헬름 2세는 결국 11월 9일 밤 네덜란드로 도망갔다. 11월 혁명이었다.

[사진: 1918년 12월 스파르타쿠스단 주도의 시위 사진http://www.iwm.org.uk/collections/item/object/205083063]

제국은 무너졌다. 독일 전역에서 인민대표평의회(Rat der Volksbeauftragten)가 제국의 지방정부를 대체했다. 제 1당이었던 사민당은 노동자와 민중들이 봉기하는 과정에서 늘 뒷북을 쳤다. 항상 민중이 권력을 무너뜨린 이후에야 마지못해 승인하는 방식이었다. 우파 사민주의자였던 샤이데만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제국의회 창문을 통해 돌발적으로 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입헌군주제를 옹호했던 에베르트는 그조차 분개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베르트는 그날로 임시정부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당시 사민당이 내각의 제 1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당이 된 사민당은 노동자의 편도, 민중의 편도 아니었다. 에베르트의 다수파 사민당(MSPD)은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하였던 집단이다. 이 때 전쟁 참여에 반대하며 사민당에서 탈당하여 독립사민당이 만들어졌지만 독립사민당 역시 혁명의 순간에는 민중의 힘에 놀라며 주저하고 망설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토의하고 토론했다. 그러다 다시 다수파 사민당과 급진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으로 흩어져 흡수되어 사라졌다. 지금 독일 사민당의 뿌리는 에베르트의 다수파 사민당이다.

1918년 12월이 되자 이미 독일 민중은 사민당의 배신을 깨닫는다. 민중의 분노는 더욱 높아졌다. 12월 에베르트 정권이 사회주의자였던 베를린 경찰국장을 해임하고 인민위원회의 장악을 시도하자 이에 반발하여 무려 15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 시민들이 베를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집회를 준비하고 있던 급진 사회주의자들과 공산당 지도부까지 놀랄 정도로 예상치 못한 인파였다. 베를린의 공장과 거리도 시민들에 의해 사실상 점령되었다. 12월 31일 결국 급박한 일정 속에 독일공산당이 창당된다.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이라 불리는 혁명이 일어난다. 베를린 시내로 쏟아져 나온 노동자와 시민들은 “에베르트 정권은 퇴진하라”를 외치고 사민당의 기관지였던 『포어베르츠(Vorwärts, 전진)』를 향해 전진하였으며 건물을 점거했다. 포어베르츠 신문은 변절한 사민당의 상징이다. 포어베르츠 건물에는 새로운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사진이 ‘평화와 질서(Ruhe und Ordnung)’라는 구호와 함께 붙어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독일어로 ‘루에(Ruhe)’는 소요, 소란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국가 안보를 위해 전쟁에 찬성했던 사민당이 말하는 평화의 의미는 결국 ‘폭력 시위의 중단과 소요의 종식’을 뜻했다.

피비린내 나는 ‘평화와 질서’의 이름으로 주는 상

‘평화와 질서’에는 그런 의지와 태도가 집약되어 있다. 누가 평화를 질서를 안전을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개념은 현실 위에서 성립한다. 저 말은 즉시 다른 방식의 저항을 폭력과 무질서, 혼란이라는 틀에 가두는 힘을 발휘한다. 에베르트와 그의 사민당은 안전(security)을 내세워 전쟁을 지지했고, 평화를 내세워 노동자 민중의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노스케의 자유군단이 저지른 테러는 ‘질서의 회복’이란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져야할 집단은 도리어 패배의 책임을 엉뚱한 곳으로 돌렸다. 그들은 ‘독일은 연합군에 진 것이 아니라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은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그리고 유대인에게 배신당한 것’이라고 선동했다.

1919년 1월 11일 베를린 포어베르츠 건물은 마치 1980년 5월 27일의 광주 도청 같다. 시민군은 진압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노스케의 자유군단은 항복 의사를 전하기 위해 백기를 흔들며 나오는 시민대표들도 사살했고, 살아남은 저항세력들은 거리에서 즉결 처형했다. 바이에른 공화국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도 정규군이 아니라 이 우익민병대였다. 저항이 폭력이 되고, 혁명은 무질서가 되었던 곳,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에서 침묵(Ruhe)과 질서(Ordnung)는 파시즘이 자라는 토양이 되었다.

에베르트와 그의 사민당은 사회주의를 말하면서도 노동계급의 단결보다는 독일이라는 국가 이익을 더 우선하였고, 좌파 세력을 혐오하였다. 1918년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자 SPD는 혁명적 변화의 전망을 찾기보다는 낡은 질서를 지키는 쪽에 섰다. 그들은 보수 우익의 반동보다 노동계급의 해방을 더 두려워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총리가 되자마자 첫날 제일 먼저 한 일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그뢰너 장군과 ‘에베르트-그뢰너 협약’을 맺고 좌파 척결과 혁명의 방지를 위해 협력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는 “우파의 보수적 경향보다 사회적 혁명을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구정권의 부패한 지휘자들에게 눈길을 돌려 그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결국 베를린 거리의 유혈 폭동과 나치당 창설을 이끌었다.” 매우 보수적 시각에서 일관되게 혁명을 쿠데타라 부르고 저항을 폭동으로 부르는 찰스 필립스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20세기에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123-125 참고. 찰스 필립스, 홍정민 역 좋은책 만들기, 2000)

“프라이코르프스 부대는 총선이 있던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시민들을 때리고 약탈하고 강간하며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바바리아(바이에른)의 폭동이 진압될 때까지 두 달이 넘는 동안 그들은 약 1천2백 명의 베를린 시민들을 죽였다.” 마침내 1919년 1월 19일 인민위원회를 장악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그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베를린에서는 도저히 공화국 정부를 구성할 수 없어 조용한 시골 마을인 바이마르로 도피하여 세운 정부였다. “많은 시민의 피를 흘리게 한 잔인한 프라이코르프스 군대는 후에 히틀러의 돌격대원이 되었고, 결국 전체 독일 군대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경멸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개념 자체마저 혐오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진: 1988년 동베를린에서 열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추모 집회. AP/Press Association Images]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촛불 시민은 과연 이 상을 기뻐하며 받을 수 있을까. 그것도 ‘인권상’을. 이토록 피비린내 나는 이름으로. 퇴진행동을 이끌었던 수많은 인권활동가들은 과연 로자 룩셈부르크를 죽인 이 이름으로 주는 인권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1919년 1월 15일을 기억하며」에서 죽은 동지의 시신 위에 떨구어진 노동자들의 얼굴을 보라. 1919년 1월 15일은 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된 날이다. 그 날 자유군단의 우익 깡패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쳐 으깨서 죽였다. 그 다음 차가운 운하에 던져버렸다.

우리는 산 자로서 죽은 자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이름을 단 인권상이 2017년 한국의 촛불시민에게 묻는다.

한개의 댓글

  1. 역사적 인물의 민낯과 그 왜곡을 지금도 목격하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목격할 수도 있는 이 격랑의 시대를 사는 평범한 시민들이 꼼꼼히 읽고 새겨야 할 글입니다. 채 선생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깨우침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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