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기구’는 노동운동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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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시스]

지난 10월. 문재인 정권은 집권 초부터 골칫거리로 여기던 신고리 5, 6호기 핵발전소 건설 문제를 ‘공론화위원회’라는 방식으로 모면했다. 물론 핵발전소 건설 재개 여부에 대한 문재인식 숙의민주주의는 천동설과 지동설을 투표에 붙이는 것만큼이나 의제가 잘못 설정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온 핵발전소 문제를 ‘위원회’라는 틀로 축소해 놓고 소수의 표본을 설득했다. 결국 핵 발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세력은 집요하게 공론화위원 일부의 마음을 돌림으로써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형식과 절차에 충실했지만 정작 내용을 왜곡했다. 이러한 의사결정 방식이라면 ‘마약 판매 합법화’ 같은 의제도 공론화에 붙이면 통과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에 대한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은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의 성공이라며 대중적 칭송을 받았다.

공론화 민주주의 퍼포먼스에서 성공한 문재인 정권은 이어, 자신에게 계륵 같은 존재인 민주노총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민주노총 대표단과 몇몇 노조위원장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흔치 않은 이벤트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다. 그러나 절차와 형식 문제로 청와대 오찬은 불발되었다. 여론의 화살은 청와대의 초대를 ‘감히’ 거부한 민주노총 쪽으로 향했다. 민주노총은 화가 날 일이었지만, 이미 대화와 소통의 명분을 얻은 문재인은 속으로 웃었을 터였다. 박근혜의 독단적 어법과 불통 이미지에 넌더리 난 대중에게 문재인의 민주주의, 대화, 소통 이미지는 약발이 잘 먹히는 통치 수단이었다. 내친김에 문재인은 지난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대선공약 가운데 하나였던 ‘사회적 대화기구’를 주문했다.

민주노총 발목 잡을 ‘사회적 대화기구’

보름 뒤에 청와대 밖에서는 문재인의 주문에 화답하는 행사가 열렸다. 11월15일부터 16일까지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주관하는 ‘아시아미래포럼’이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것이다. 8회째 열리는 이 행사의 올해 주제는 ‘일의 미래,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향하여’였다. 여기에 걸맞게 행사에는 한국노총,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고용노동부 등 노사정(勞使政) 6자 대표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는 ‘노사정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대하여 11월16일자 한겨레는 ‘노사정이 치열한 논의 끝에 대화의 물꼬를 텄다… 민주노총은 불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청와대 초청을 거부한 민주노총에 대한 한겨레의 감정이 섞인 헤드라인이었다.

그런데 한겨레의 예단과 달리 며칠 뒤에는 민주노총 안에서도 ‘사회적 대화’가 크게 이슈가 되었다. 민주노총 제9기 집행부 선거전이 한창이던 11월 19일, 국민tv의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 초청 선거토론회에서도 사회적 대화 기구 참여 여부가 으뜸가는 쟁점이 된 것이다. 이날 기호 3번 윤해모 후보는 지금의 노사정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공약을 표명했다. 기호1번 김명환 후보는 노사정에 더해 여야당 대표자 등 8명이 참여하는 ‘신8인 회의’를 새로운 사회적 대화 기구로 제시했다. 기호4번 조상수 후보는 지금의 노사정위는 폐기되어야 하고 새로운 기구가 마련되어야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 등 사안별로 노사정위에 참여해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다만 기호2번 이호동 후보만이 노정 교섭과 투쟁을 강조했다. 민주노총의 차기 위원장을 맡게 될 후보 4명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3명의 후보가 결국 ‘사회적 대화 기구’에 참여하겠다고 표명한 것이다. 따라서 기호2번을 제외한 나머지 세 후보 가운데서 누가 위원장에 당선이 되든지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사회적 대화기구를 외면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벤트에 능한 정부와 자본가집단이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기구가 민주노총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기구 참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먼저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개념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것은 ‘사회적 계급과 계급 사이의 대화기구’를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사정위원회를 사회적 대화기구의 전형으로 보는 까닭이다. 따라서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개념이 문재인 정권에서 나온 발상은 아니며 한국에서도 이미 노사정위원회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노사 대화 테이블이 종종 마련되었다. 심지어 자본가 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의 제안에 따라 1975년에 경총, 한국노총, 노동청이 참여한 비정기적 ‘노사간담회’를 한국적 사회적 대화기구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노사간담회는 1981년 이후 전두환 정권의 ‘중앙노사협의회’로 발전되었다. 말하자면 노사화해, 노사협력 등 자본가 이데올로기에 따라 어용노조 간부와 지배 자본가 세력이 카메라 앞에서 벌인 퍼포먼스를 사회적 대화기구의 원형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 사회주의자]

사회적 대화기구의 기능은 노동착취 강화

한편 오늘날과 같은 노·사·정 3자주의가 도입된 첫 공식적인 사회적 대화기구로는 민주노총 설립 이듬해인 1996년에 발족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도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계 대표로 참여했다. 이때 ‘대립적 노사관계 해소’와 ‘생산적인 신 노사관계 구축 방안’이 주요 의제로 논의되었다. 이어 악명 높은 정리해고제가 쟁점이 되면서 논의는 공전되었다. 그러던 중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정권이 바뀜에 따라 1998년 1월에는 전원합의제 의결 방식의 ‘노사정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2월에 큰 틀에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체결되었다. 한국 최초로 노사정 3자가 맺은 사회협약이었다.

하지만 노사정위원회의 본질이 곧 드러났다. 오늘날까지 노동자들의 목을 죄고 있는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과 파견근로제 등 자본가계급의 요구가 집요했던 것이다. 이에 반발한 민주노총은 1999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이후 한동안 노사정위원회는 경총과 한국노총이 짬짜미하며 사회 여론을 통해 민주노총을 고립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비정규직 합법화, 노조전임자 급여지급 금지, 복수노조 단체교섭 창구단일화 등 제반 노동조건이 속속 개악되었다. 이처럼 노사정위원회라는 이름의 사회적 대화기구는 경제위기를 빌미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애초에 노사정위원회는 국가와 정부, 즉 ‘정(政)’이 계급적 중립기구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에게는 기만적인 기구였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자본가계급의 팔다리나 다름없다. 정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철저히 자본가 편이다. 따라서 노사정위원회가 결코 노동과 자본 간의 평등한 대화기구가 될 수 없다.

한편 한국보다 앞서 1980년대 이후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도 노동과 자본 간의 사회협약이 속속 등장했다. 자본주의 모순에 따른 전반적 위기 상황에서 세계의 자유주의 지배세력은 재정적자, 경기침체, 고실업, 비정규직 증가 등 정치경제적 위기 상황을 복지축소와 임금삭감 등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리하여 노사정 ‘3자협력’을 내세워 사회적 합의 또는 사회적 협의를 시도했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자유주의 지배세력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이미 고통에 처한 노동자와 인민에게 더 많은 고통을 감수케 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는 생존 전략을 구사했고, 그 전략으로 사회적 대화를 들고 나온 것이다.

2012년에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의 연구 용역을 받아 경총에서 작성한 「사회적 대화 발전방향에 대한 연구」 보고서(이하 ‘보고서’)는 사회적 대화의 성공사례로 네덜란드의 1982년 ‘바세나르 협약’과 아일랜드의 1987년 ‘국가경제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사회협약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바세나르 협약의 핵심은 임금동결, 물가연동 조항에 따른 임금인상 포기, 최저임금 인하 등이었다. 이후 3년 동안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9%가 하락했다. 그로써 ‘수출가격경쟁력을 회복’했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은 제 살을 깎아 수출자본가들의 지갑을 채워준 셈이다. 아일랜드 또한 1987년에 ‘국가경제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사회협약을 맺었는데 그 골자는 ‘3년간 임금인상률 2.5%로 제한, 임금인상 자제, 공무원 신규채용 동결, 조기퇴직제 도입’ 등이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얻은 것이라곤 약간의 노동시간 단축과 실질임금의 대폭 하락뿐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노사정위원회가 이른바 ‘선진국들이 공유하는 일반화된 경험(보고서39쪽)’이라며 모델로 삼고 있는 예는 사회적 대화, 사회적 협약이 결과가 노동착취 강화로 이어지는 것들이다. 사실상 노동자들에게는 실패한 경험, 나쁜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후반부터 자본주의 진영 전반에 경기침체에 대한 위기 분위기가 일상화되고 이에 따라 고용 위기에 대한 의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선진국의 노동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협약한 내용들이 오늘날 한국에서 계급간의 대화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대화’의 함정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라는 적대적 관계에 놓인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은 투쟁의 한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투쟁 없는 대화는 칼자루를 쥔 적들에게만 유리한 것이다. 그 때문에 적대적 계급 사이에서 지배계급은 ‘대화’를 강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투쟁동력을 약화시킨다. 그들에게 대화란 착취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수단이다. 실제로 역사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대화는 모두 지배계급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그 결과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가 강화되었다. 문재인 정권 치하라고 다를 리 없다. 자본주의 모순은 심화되고, 노동조합의 투쟁동력은 약화된 상황에서 계급과 계급 간의 사회적 대화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려는 교묘한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싸우자고 덤비는 난폭한 적도 위험하지만, 대화로 꼬드기는 교활한 적은 더 위험하다. 거기에 사회적 대화의 함정이 있다.

사회적기업, 사회적기구, 사회적거래소, 사회적금융, 사회적투자 등 ‘사회적’이라는 말이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즐겨 쓰는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는 실상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하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공론화가 공론을 왜곡하고 숙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것처럼 ‘사회적’이라는 수식어가 사회를 왜곡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말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날고 기는 자유주의 지배 엘리트들도 내심 자본주의에는 답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무기는 투쟁이며, 그것이 운동의 기본이다. 기본을 저버린 운동은 망한다. 듣기에 좋은 ‘대화’라는 함정이 빠지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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