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 의지 ‘제로’, 문재인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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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YTN]

아직 박근혜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2016년 7월 15일, 경북 성주의 사드(THAAD) 반대 집회에 참가한 한 분이 “북핵은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고 미국을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드는 미국 방어용이라는 겁니다. 북핵은요, 저희하고, 남쪽하고 싸우기 위한 핵무기가 아닙니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 발언 장면이 포함된 집회 영상이 온라인에 게시되자, 며칠 후 조선일보를 포함한 극우 매체들은 그 분이 말하는 ‘저희’가 북한을 의미하므로 그가 북한의 입장에서 말하며 북핵을 옹호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를 ‘외부세력’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관련된 기사에 “#성주 외부인 개입” “#통진당 재건 세력” 같은 자극적인 태그를 달았으며, 일베 등의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신상을 캐고 ‘극렬선동녀’ ‘성주의 붉은 별’ 같은 모욕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결과 그 분은 15년째 성주에서 살고 있는 주민이었고, “저희하고, 남쪽하고”는 당연히 한국을 반복하여 말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박근혜가 물러나고 문재인이 집권한 지도 한참 된 올해 1월 10일, 위와 비슷한 장면이 또다시 재현되었다. 위 집회 발언을 이유로 경찰이 당시 그 주민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낸 것이다.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당시 보수 단체가 그를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였고, 이 사건이 대구지검을 거쳐 경북경찰청까지 배당됐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이 그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낸 바로 그날, 법무부는 유엔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 실무그룹 권고사항 중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에 대해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적폐 중의 적폐’라 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을 청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드반대 집회 참가자가 과거에 한 집회 발언 하나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덫에 걸려 이렇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최근 이진영 노동자의 책 대표가 국가보안법 혐의로 수개월 동안 구속되어 재판을 받다가 다행히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가까스로 자유의 몸이 된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을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법무부의 변명은 사실상 민중을 우롱하는 소리로 들린다.

국가보안법 폐지도 불수용, 여성·성소수자 인권도 ‘나중에’

법무부가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불수용 입장을 밝힌 자리는 유엔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 실무그룹 권고사항 중 법무부가 3월까지 수용 여부를 밝혀야 하는 사항들에 대해 주요 시민단체들을 모아 놓고 논의하는 간담회였다. 권고사항 중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이외에도 사형제 폐지, 군대 내 동성 간 합의된 성관계를 형사처벌하는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 및 대체복무제 도입, 여성의 임신중절수술 허용,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진보운동이 몇 년째 꾸준히 외쳐 온 요구들이며,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에게는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들이다. 작년 5월, 한 육군 대위는 병영 밖 공간에서 상호 합의 하에 동성 인 다른 군인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군형법 제92조의6 때문에 육군보통군사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여성의 임신중절수술이 아직도 범죄화되어 있는 현실도 심각하다. 2010년 중반부터 관련 상담을 받고 있는 민우회에 따르면, 현행 낙태죄는 임신의 원인을 제공한 남성 파트너는 처벌하지 않고 여성만 처벌하기 때문에, 임신중절 사실을 빌미로 남성 파트너가 고소 협박을 하는 기막힌 사례가 지속적으로 접수된다고 한다. 차별금지사유에 ‘성적 지향’까지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역시,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몰상식한 차별 발언이 나오는 상황에서 인권운동가들의 숙원사업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비록 촛불 투쟁에서 전면에 부각되진 않았지만, 위 권고사항들 모두 민중이 꾸준히 청산을 요구해 온 적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 법무부는 이 권고사항들 중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행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사형제 폐지 관련 국제규약도 즉시 비준할 수는 없다고 했고,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도,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 및 대체복무제 도입도, 여성의 임신중절 수술 허용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도 ‘검토’해보겠다는 것이 법무부의 대답이었다. 여성의 임신중절 수술 허용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고 “실태 조사 등 제도 전반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는 것,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서는 “입법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고 판단되나 포괄적 차별금지사유에 대한 논란과 의견 대립이 심하다”는 것을 변명으로 내세웠다. 그날 간담회에 참여했던 시민단체들이 실망을 토로했듯이, 정부는 “사회적 합의 운운하면서 20년째 같은 의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정된지 70년을 맞이하는 악법 중의 악법 국가보안법도 철폐할 생각이 없고, 여성·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나중에’만 반복한다면, 대체 어떤 적폐를 어떻게 청산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적폐청산을 지지율 관리에 이용한 문재인 정권

문재인 정권이 적폐청산 과제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준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바로 박근혜 정권 때 이루어졌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재협상 논란을 지지율 관리에 활용한 경우였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밀실교섭으로 진행되어 ‘위안부’ 피해당사자들을 절차에서 소외시켰고, 일본의 법적 책임도 면제해준 채 10억 엔을 대가로 ‘불가역적 해결’을 약속한 불의한 합의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합의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다. 대표적인 ‘적폐 합의’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외교부 장관 직속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검토 TF’를 만들어 5개월에 걸쳐 협의 경과 및 내용 전반에 대한 검토를 벌였다. 그리고 작년 12월 27일, 박근혜 정권의 거짓말과는 달리 이면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폭로했다. 합의 당시 박근혜 정권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를 설득할 것,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노력’할 것 등을 약속하였고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는 일본의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면합의를 폭로하며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합의 파기까지 포함해) 모든 게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한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해야 될 것”이라고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1월 4일 ‘위안부’ 피해당사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지난 (위안부) 합의는 진실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정부가 할머니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내용과 절차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발언하여 피해당사자들에게 합의가 파기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겼다.

문재인 정권이 이면합의를 폭로한 때는 제천 화재 참사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면합의 폭로와 함께 지지율이 반등했다. 12월 26~27일 67.7%였던 지지율은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이면 합의’를 폭로한 다음 날인 12월 28일 69.0%로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4일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위안부’ 피해당사자 김복동 씨를 찾아가 손을 잡고 위로하는 장면, 이용수 씨 등 피해당사자 8명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해 끌어안고 인사하는 장면 등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1월 5일 집계한 새해 첫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72%로 나왔다.

그러나 이윽고 문재인 정권의 위안부 합의 폭로 및 관련 행보가 모두 진정성 없는 기만이었음이 드러났다. 1월 9일 강경화 장관은 “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이를 감안해 우리 정부는 합의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며 합의 유지 입장을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결국 대표적인 ‘적폐’로 인정받는 이 합의를 지지율 관리에 이용한 것이다. 진실이니 정의니 하는 화려한 말이 난무했지만, 적폐는 청산되지 않았고 변한 것은 없었다.

적폐청산을 할 생각이 없는 자유주의 정권

『사회주의자』는 그동안 민중이 원하는 적폐청산과 자유주의 세력이 원하는 적폐청산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해 왔다. 민중은 기존 질서의 틀에 머물지 않는 철저한 적폐청산을 원한다. 반면 자유주의 정권인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것은 기존 질서의 틀에 머무는 불철저한 적폐청산, 민중을 대상화하는 적폐청산이다.

최근 문재인 정권이 민주주의 요구와 관련된 부분에서, 그리고 대표적 적폐라 불리는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 보여준 태도는 이러한 지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준다. 아니 민주주의의 확장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적폐청산에 필요한 조치들조차 전혀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불철저한 적폐청산이나마 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안법 폐지, 여성인권 및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조치들조차 실현할 의지가 없다. 사실 이것 중 상당수는 자유주의 틀을 넘어서지도 않는 개혁이다. 반면 정권의 지지율 관리를 위해 적폐청산에 대한 민중의 기대를 이용하는 것이 문재인 정권이 보인 행태이다.

이제 문재인 정권이 할 수 있는 적폐청산의 최대치는 기껏해야 이미 죽은 권력인 이명박의 비리를 조사하고, 권력기관을 일부 손보는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기존 질서는 털끝 하나 손대지 않고 민중의 삶은 그전과 비교해 전혀 달라질 게 없는 이런 식의 적폐청산에 민중들은 분명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민중이 적폐청산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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