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표 그린 뉴딜: 이명박의 녹색성장 DNA를 탑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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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청와대]

2018년의 폭염, 그리고 올해의 수해는 기후변화로 인해 인간 생존의 조건이 가혹해지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지금 지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기후 ‘위기’와 ‘비상사태’에 있다는 점은 그 무엇보다 분명하다. 지구 온도가 더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구 온도 상승의 주범인 온실가스의 배출을 중단하게 만들기 위해 즉각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그 행동의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IPCC의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시기 대비 1.5℃ 이내로 막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절반으로, 2050년까지는 ‘0’로 만들어야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한국 역시 과감한 배출 감축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으로 이른바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이 부상하게 되었다. 그린 뉴딜은 과거 1930년대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가 시행한 ‘뉴딜’을 하나의 모델로 삼아, 그와 마찬가지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대규모 대응에 나서자는 것이다. 한편 그린 뉴딜이 이전 기후위기 대응 논의와 차이가 나는 지점은, 그것이 단순히 기후위기의 대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 대응을 사회 불평등 및 빈곤 타파, 경제위기 극복과 긴밀히 연결지었다는 점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확대하고 일자리를 제공했던 뉴딜과 마찬가지로 기후위기 대응에 막대한 자원을 투여하는 과정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일자리를 대거 확대하며 사회의 불평등 역시 타파하자는 것이 그린 뉴딜의 특징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민주적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와 같은 민주당 상원의원 에드 마키가 그린 뉴딜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한 2019년 2월 이후 그린 뉴딜은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2019년 2월 이후 환경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그린 뉴딜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고, 정의당이나 녹색당뿐 아니라 민주당과 같은 기성정당에서조차 그린 뉴딜을 검토하거나 당 정책으로 채택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급기야 지난 7월 14일에는 문재인 정권의 ‘한국판 뉴딜’ 중 하나로 그린 뉴딜이 공식 포함되기에 이른다.

문재인표 그린 뉴딜

문재인 정권이 그린 뉴딜을 공식 정부정책으로 삼기 전부터 이미 민주당 차원에서는 그린 뉴딜의 검토가 있었다. 민주당 부설 민주연구원은 2019년 「한국형 「그린 뉴딜」 제안」이란 제목의 정책브리핑을 내놓았고, “기후변화-일자리-경제적불평등 문제를 아우르는 ‘한국형 그린 뉴딜’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또한 민주당은 4.15총선을 앞두고는 ‘2050년 탄소 제로 사회’ 실현을 목표로 ‘그린뉴딜 기본법’ 제정을 공약했다.

한편 문재인 정권은 올해 상반기에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비상경제회의를 꾸려 운영해왔다. 4월 22일에 열린 제5차 비상경제회의에서는 주되게 ‘민생·금융안정 패키지 프로그램’의 규모 확대와 자본에 대한 대대적 지원을 위한 ‘위기극복과 고용을 위한 기간산업 안정기금’ 마련이 결정되었다. 이 날 회의에서 문재인은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서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겠다는 입장 역시 밝혔다. 그리고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는 그린 뉴딜이 “한국판 뉴딜에 포함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린 뉴딜이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지 협의해 서면 보고해달라”고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등 4개 부처에 지시했다. 문재인은 5월 13일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재차 그린 뉴딜을 언급하며 “그린뉴딜은 그 자체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국제사회가 그린뉴딜에 대한 한국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5월 20일 4개 부처의 합동 서면 보고가 있었고, 그 직후 그린 뉴딜을 ‘한국형 뉴딜’에 포함시키는 것이 공식 결정되었다. 그리고 7월 14일에는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를 통해 문재인표 그린 뉴딜이 세상에 드러났다.

문재인 정권은 마치 대기업의 신제품 발표회를 연상시키는 한국형 뉴딜 국민보고대회를 요란스럽게 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은 자본을 위한 돈 잔치 이상 대단할 것이 없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남일의 기사 「한국형 뉴딜, 자본가를 위한 돈 잔치」를 참고하기 바람). 그린 뉴딜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은 그린 뉴딜의 3대 분야로 ▲도시·공간·생활 인프라 녹색 전환 ▲저탄소·분산형 에너지 확산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구축을 꼽고 세부 8대 추진과제를 선정했는데, 하나같이 기후위기의 시급성에 비해 뜬구름 잡는 내용에 불과했다. 심지어 기후전문가들에 의해 기술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을 뿐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산화탄소 포집 저장 기술 개발에 적지 않은 예산을 투여하기로 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린 뉴딜 사업에 2025년까지 국고 42조7천억 원을 투여하기로 했는데, 그 중 ‘전기차와 수소차 등 그린 모빌리티사업 확대 사업’에만 13조1천억 원을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린 뉴딜 사업에 투여되는 국가예산 중 30.7% 가량이 전기차와 수소차 개발 지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에 비해 ‘신재생에너지 확산 기반 구축 및 공정한 전환 지원’에 들어가는 예산은 전체 예산의 21.5%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사실은 그린 뉴딜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재인표 그린 뉴딜의 목적이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가 기후위기 상황에 맞춰 자본의 활로를 모색해주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14일 국민보고대회의 진행 내용에서도 곧장 확인됐다. 당일 보고대회에 문재인 정권은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을 화상으로 연결하여 그린 뉴딜 관련 보고를 받았고, 보고대회 참석자들과 정의선은 서로를 상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진: 기후위기비상행동]

그린 뉴딜은 무엇인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구체적 로드맵은 없이 기후위기로 인해 변화하는 국제경제 상황에 한국 자본이 적응하도록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그린 뉴딜에 대해 기후위기 운동 단위들이 비판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은 7월 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목표 없는 그린 뉴딜로는 기후위기에 결코 대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미 기후과학과 파리협약 등에서 제시하는 명확한 목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분명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문재인표 그린 뉴딜에는 “‘탄소중립 사회 지향’이라는 막연한 문구만 들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사회경제시스템 전환을 위한 전략”이나 “노동자와 지역주민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서도 전혀 내용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작년부터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진보적 의제로 각광받던 그린 뉴딜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애초 그린 뉴딜은 좋은 것인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문재인 정권의 정책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변질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 답하기 위해서는 그린 뉴딜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민주당 하원 의원인 오카시오-코르테스에 의해 그린 뉴딜이 유명해지자 그린 뉴딜은 마치 오카시오-코르테스와 같은 진보적 인물에 의해 주장된 버전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애초 그린 뉴딜은 진보적 성격을 찾아보기 힘든 매우 친자본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등장했다. 그린 뉴딜의 등장을 말하기 전에 우선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1987년 유엔이 후원한 브룬트란트 위원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정의를 내놓는데, 그것은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할 가능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이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것이 갖고 있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그 뜻이 불분명하여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이 사용되기 십상이었다. 가령 발전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식으로도 이 용어는 이용될 수 있었다. 설상가상 화석연료를 개발하면서 그것을 “지속가능하게 개발될 것”이라고 포장하는 경우까지 나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차 생태, 기후 문제에 대처하는 것과 경제성장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발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생태문제에 대한 지배적 시각은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적 성장 추구가 지속되는 한 생태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발전’이 자본의 언어로 전환되면서 이런 시각이 내버려졌고,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들은 더 과감한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로써 ‘녹색경제’, ‘녹색성장’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됐다. 요컨대 그것의 함의는 자본주의가 성장을 추구하면서도 녹색으로 바뀔 수 있고, 생태, 기후 관련 영역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녹색경제’, ‘녹색성장’이 ‘그린 뉴딜’로 연결되는 지점은 2008년 세계대공황이 제공했다. 2008년 세계대공황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났고, 그 이후 십년 동안 전 세계 노동자 민중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고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틀 안에서 이 위기를 해결하길 바라는 이들은 경제위기를 해결하면서 기후위기도 해결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그린 뉴딜’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30년대 미국 루즈벨트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대공황을 극복했듯이(그러나 당시 뉴딜로는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기후위기와 경제위기를 동시에 극복하길 바랐다.

이런 최초의 그린 뉴딜 논의는 2007년 영국 『가디언』의 기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래리 엘리엇의 2007년 10월 29일자 기사 「기후변화는 협상으로 풀릴 수 없다」에는 환경주의자 콜린 하인즈의 그린 뉴딜 제안이 소개되어있다. 기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펀드를 마련한 후 이 재원을 가지고 건물 에너지 효율 개선,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대에 사용하고 이에 대한 투자에서 나온 이윤에 대해서는 면세 혜택을 주자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해 말 래리 앨리엇과 콜린 하인즈는 기업가 제레미 레깃과 함께 ‘그린 뉴딜 그룹’을 결성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인 토마스 프리드먼은 “미국이 세계질서 안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녹색”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린 뉴딜을 제안했다.

오바마는 명시적으로 ‘그린 뉴딜’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내용적으로 그와 유사한 정책을 대선 후보 시절 제시했고, 그것을 2008년 집권한 후 이른바 ‘녹색 회복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경기부양책에 포함시켰다. 미국은 2008년 대공황 직후 7천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다음 해 2월 8,13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진행했다. ‘녹색 회복 패키지’는 바로 이 경기부양책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900억 달러에 불과했다. 전체 부양책 규모에 비하면 세발의 피였던 것이다. 더욱이 기후위기와 관련해 오바마 시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위선’이라 할 수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입 발린 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집권 기간 내내 미국 내 석유 생산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셰일가스 생산에 힘입은 것으로 2013년에 와서 미국의 석유 생산량은 수입량을 앞지르게 되었다.

그린 뉴딜은 2008년 영국 신경제학재단의 관련 보고서, 2009년 유럽 녹색당들이 모여 만든 보고서 등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논의는 유엔으로까지 넘어가 유엔 환경프로그램은 2010년 “글로벌 그린 뉴딜”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게 된다. 이들의 그린 뉴딜은 대개 ‘녹색 자본주의’의 추구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틀 안에서 기후위기와 빈곤, 사회불평등, 경제위기 등을 모두 해결하길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녹색으로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을 유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후, 생태 관련 산업에서 자본의 새로운 이윤 추구 기회를 찾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린 뉴딜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유럽에서 발간되는 『격동(turbulence)』라는 이름의 잡지 2009년 12월호에서 그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글은 독일 녹색당 초창기 당원인 프리더 오토 볼프와 해당 잡지의 편집자로 ‘기후정의행동’이란 단위에서 활동하는 타지오 뮐러의 대담이다. 이 대담에서 타지오 뮐러는 그린 뉴딜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궁극적으로 그것들[여러 생태문제들] 모두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팽창과 상대적으로 안정적 생태-사회 체제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 삶의 필요조건 사이의 모순이라는 한 가지 중심 모순의 결과이다. …… 이제 그린 뉴딜이든 아니든 어느 종류가 되었든 ‘녹색 자본주의’의 요점은 그것이 이러한 적대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탄소중립 연료에서 생산된 전기로 경제성장을 하는 자본주의를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항상 더 많은 에너지 사용, 더 많은 온실가스, 더 많은 환경 파괴를 의미해왔다. …… 성장지상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 생명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확신한다. 따라서 나는 그린 뉴딜을 지지하는 것이 좌파에게 좋은 기회를 준다고 믿지 않는다. 이 기획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성장의 재출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이야말로 무엇보다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발생한다. 이른바 ‘급진적’, 혹은 ‘민중적’ 그린 뉴딜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2008년 대공황 이후 성장한 노동자 민중의 급진적 의식화의 결과였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 그들은 대공황 이후 실업과 주거, 의료보장 부재 등의 문제를 겪었고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2018년 11월 미국의 청소년 기후운동 단체 ‘선라이즈 무브먼트’는 미국 민주당의 거물 하원의원 낸시 펠로시의 의회 사무실을 점거하고 그린 뉴딜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입법권한이 있는 특별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한편, 의원들이 화석연료기업으로부터 정치후원을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뉴욕에서 하원의원으로 갓 당선되었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당선인 신분으로 이들이 점거한 펠로시의 사무실에 지지방문을 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다음 해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상원의원 에드 마키와 함께 그린 뉴딜 결의안을 발의했다. 결의안은 다음 다섯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① 공정하고 정의로운 전환을 통한 온실가스 배출 넷제로 달성.
② 양질의 고임금 일자리 수백만 개 창출, 모든 미국 민중에게 번영과 경제적 안전 보장.
③ 21세기의 도전에 지속가능한 대응을 하기 위해 미국 산업과 인프라에 대한 투자.
④ 향후 세대들을 위해 미국 모든 민중에게 청정한 대기와 물, 기후, 공동체 수용력, 건강한 식량 등 보장.
⑤ 민중에 대한 억압을 중단, 예방, 시정하기 위해 정의, 형평성 촉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결의안은 기존 그린 뉴딜에 비하면 노동자, 민중적 요구가 더 강화된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기존 그린 뉴딜 담론과 달리 ‘뉴딜’에 대한 해석이 변했다. 뉴딜을 사회의 자원을 대규모로 동원한 것으로 파악한 점에서는 비슷하였으나 오카시오-코르테스의 그린 뉴딜은 뉴딜의 등장배경과 동력에 대해서 당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1930년대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체제의 위협을 느낀 루즈벨트와 미국의 일부 자본가 분파가 어쩔 수 없이 개량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한 기존 기후운동이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에 대해 환상을 품고 순응적이었던 점에 비해 선라이즈 무브먼트나 오카시오-코르테스가 민주당 주류와 대결적 태도를 취했던 점 역시 특징적이었다.

한편 2019년 8월 22일 버니 샌더스는 화마가 휩쓸고 간 캘리포니아 파라다이스시에서 자신의 그린 뉴딜 강령을 발표했다. 그의 그린 뉴딜은 분명 오카시오-코르테스의 그린 뉴딜보다 더 나아간 것이었다. 오카시오-코르테스는 화석연료기업으로부터의 정치후원에 명시적으로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의안에서는 ‘화석연료’라는 단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타협적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샌더스는 화석연료 기업의 기후위기 책임을 명시적으로 제기했다. 또한 기존 그린 뉴딜 제안에 비해 더 대규모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고, 에너지 전환을 책임을 공적 민주적 운영기구의 형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후 그린 뉴딜은 기후위기를 해결할 진보적 의제로 널리 확산되었다.

문재인표 그린 뉴딜과 이명박의 녹색성장

대략 10년 전 등장한 녹색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인 그린 뉴딜과 지금 오카시오-코르테스나 샌더스로 대변되는 이른바 민주적 사회주의자와 여러 사회주의 진보세력이 지지하고 있는 그린 뉴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문재인표 그린 뉴딜은 당연히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재인표 그린 뉴딜이 녹색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내용이 된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의 그린 뉴딜은 바로 이명박 정권 시절 추진한 녹색성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명박은 2008년 취임 후 녹색성장을 중심 정책 기조로 삼고 동아시아기후파트너쉽을 만들었다. 2009년에는 유엔 환경프로그램에서 한국이 “녹색성장 모델국가”로 선정된다. 그 후 2010년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 설립, 녹색기후기금 송도 유치 등이 진행되었다. 이명박의 녹색성장의 주된 내용이 녹색과는 거리가 먼 대규모 토목공사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녹색성장이라고 추진한 대부분의 사업은 4대강 사업과 홍수예방 사업 등이었다. 환경파괴적 토목사업이 ‘녹색’으로 버젓이 포장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내건 녹색성장은 앞서 설명했듯이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국제적 흐름이었다. 더욱이 성공한 개발도상국이 이제 기후, 환경문제에서도 국제적 리더쉽을 발휘한다는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미국, 유럽의 선진국들이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을 미화해줬다. 이를테면 영국 녹색당은 세계대공황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9년 4월경 영국은 경기부양책 중 녹색 기술에 단 7%만의 예산을 투여하는데, 한국은 경기부양책 중 82%를 녹색기술에 지출하고 있다며 한국의 이명박 정권을 높이 평가했다. 앞서 언급한 영국의 ‘그린 뉴딜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명박의 녹색성장은 한국에서 ‘그린 뉴딜’과 종종 뒤섞여 사용되었고, 외국에서도 ‘그린 뉴딜’로 소개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문재인 정권이 그린 뉴딜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이미 많은 주류 언론이 그것이 녹색성장과 뭐가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문재인 정권의 정책관련자는 자신들의 그린 뉴딜이 이명박 정권 때의 녹색성장과 그렇게 다르지 않고 녹색성장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솔직히 시인했다.

[사진: 이명박재단]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은 다시 노무현 정권으로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언론에서는 문재인의 그린 뉴딜을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과만 연관 짓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은 사실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진 내용이었다. 2005년 유엔은 “녹색성장” 개념을 유행시키기 시작하면서 ‘2005 유엔 아·태 환경과 개발 장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지속가능한 발전 수사를 넘어서 녹색성장을 추구”하자는 취지에서 모였는데, 회의 개최국이 바로 서울이었다. 이 회의는 “지속가능한 녹색성장에 관한 서울이니셔티브”를 선언했고, 그에 따라서 한국환경공단이 사무국을 맡아 지금까지 매년 “서울이니셔티브 정책포럼”을 개최해왔다. 요컨대 녹색성장을 정권 차원의 정책 기조로 삼은 것은 이명박 정권이지만, 그 기틀은 노무현 정권이 마련했고 그것이 다시 문재인의 그린 뉴딜로까지 이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이들 정권이 모두 자본가 정권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충분히 이해된다. 기후위기를 진정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생시킨 기후위기 속에서도 이윤 추구의 기회를 포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충실한 계급적 입장이 드러난다. 반면 기후운동 진영 안에서 나왔던 그린 뉴딜 논의나 문재인표 그린 뉴딜에 대한 비판을 보면, 이러한 비판을 접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재인표 그린 뉴딜이 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기후위기를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정책이 나온 것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비판도, 제대로 된 운동도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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