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왜 김원봉을 띄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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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공방’이 뜨겁다. 정치권 안에서 여야 정객들이 떠들고 정치권 밖에서 논객들이 거드는 모양새다. 한쪽에서는 김원봉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뼛속까지 민족주의자”라고 한다. 또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를 두고도 극명한 찬반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를 빗대어, 보수 색깔 짙은 한 지방 일간지에서는 ‘죽은 김원봉이 한국사회를 흔들다’는 제목의 데스크 칼럼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럴 듯한 표현이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죽은 김원봉을 흔들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김원봉이라는 이름은 논란거리이다. 어떻게 죽었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를 김원봉이라는 이름이 역사학계도 아닌 정치권에서 뜨거운 이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대통령 문재인이 김원봉을 언급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날 추념사에서 문재인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며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나아가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면서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하여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수구보수 세력의 비난이 쏟아졌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가서 고위직을 지내며 북한 정부 수립에 부역하고 6.25전쟁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을 현충일에 언급한 건 부적절하다는 수구 논객들의 비판도 이어졌다. 그러자 청와대는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통합으로 가자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또 “추념사의 핵심 메시지는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수구야당의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김원봉의 국가유공자 서훈을 추진하는 게 아니냐며 그 배경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이에 청와대는 보훈처 규정상 김원봉에 대한 서훈은 없다고 못을 박았지만, 수구세력은 문재인의 김원봉 발언에 대한 정치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문재인의 ‘김원봉 소환’은 임시정부 정통론 퍼즐 맞추기

단면만 보면 김원봉 발언을 빌미로 문재인에게 색깔론을 덧씌우는 자유한국당과 수구세력의 시도는 억지스럽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은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세력과 자유한국당으로 대변되는 수구세력 사이에 이어져온 ‘역사전쟁’의 맥락에서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문재인이 김원봉을 띄운 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있던 2015년 광복절에도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 올해 3월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원봉) 선생을 서훈할 것이냐”는 야당 의원 질의에 “현재 기준으로는 되지 않는다. 의견을 수렴 중”이라면서도 “가능성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보훈처는 지난해 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도록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을 개정한 터였다. 하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한 경우에는 포상할 수 없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런 터에 김원봉의 서훈 가능성이 있다는 보훈처장의 답변은 수구 정객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당장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나경원이 “김원봉은 뼛속까지 북한 공산주의자”라며 입에 거품을 문 게 바로 두어 달 전이었다. 사실 이때부터 정치권의 김원봉 논란은 불이 붙은 셈이다. 한편 문재인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논객들은 나경원의 발언에 대하여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라고 반박했다. 김원봉의 월북 행위에 대해서는 “노덕술 같은 친일파가 설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북으로 갔을 뿐,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논리로 방어했다. 더불어 청와대 국민소통광장에는 김원봉의 건국훈장 서훈을 위한 국민청원도 올라왔다.

문재인의 현충일 추념사는 이러한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기댈 곳이라고는 해묵은 색깔론 밖에 없는 자유한국당과 수구세력 입장에서 문재인의 발언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물론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문재인이 국가기념일 추념사에서 천연덕스럽게 김원봉을 언급하며 논란을 증폭시킨 데에는 모종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양대 지배세력 간의 역사전쟁 맥락에서 보면 문재인의 현충일 추념사 발언은 ‘임시정부 정통론’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지배세력은 그간 ‘임시정부 정통론’을 자신들의 역사이데올로기로 이용해왔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지 30호에 실린 필자의 글 「임시정부 정통론은 반공주의 냉전시대의 산물」을 참고할 것) 툭하면 건국절 논란을 일으키며 역사왜곡을 감행해온 수구세력과의 권력경쟁에서 그것은 유용한 정신적 무기였다. 특히 올해 문재인 정부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계기를 십분 활용하여 나경원 등 경쟁 세력에게 ‘토착 왜구’라는 혐오 이미지까지 씌우는 등 수구세력의 친일적 이미지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역사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문재인 정권은 내친김에 김원봉을 현실 정치판으로 호출했다. 그리고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충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흡수된 과정을 ‘좌우합작’으로 표현함으로써 통합 임시정부 이미지를 드러내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밑천인 ‘임시정부 정통론’에 정당성을 더해주었던 것이다.

왜 하필 김원봉인가?

좌우합작이란 흔히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제휴하거나 연대하여 투쟁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충칭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문재인이 언급한 좌우합작 또한 이러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김원봉이, 나경원의 표현대로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인 한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해방 전에 김원봉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였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공산주의 조직이나 사회주의 조직에 들어가 활동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황푸군관학교 졸업 후 김원봉은 반공주의 노선을 지향하던 중국 국민당군 소위로 임관하여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이후에도 주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영향권에서 활동했다.

다만 1929년에 김원봉은 제3차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안광천과 함께 잠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한 바 있다. 하지만 이때도 김원봉은 자신의 휘하에서 활동할 사람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지, 결코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조직적 활동을 벌인 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안광천은 친일단체의 창립선언문을 써주고, 자신의 아내를 불법적으로 복당시키는 등 부적절한 행위로 조선공산당에서 제명을 당한 뒤 중국으로 건너온 터였다. 한편 의열단은 1930년대에 서울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파업에 개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이재유 등 사회주의자들이 의열단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들을 거부했다. 해방 후 귀국을 했을 때도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김원봉을 외면했다. 다만 중앙학교 시절 은사였던 김성수와 송진우가 사주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가 김원봉과 의열단 투쟁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김원봉은 민족주의 세력 사이에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문재인 정부가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 정통론을 부각하려 했다면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이 참여한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를 부각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문재인이 김원봉을 택한 이유는 뻔하다. <암살>이나 <밀정> 같은 상업영화의 흥행을 통해 김원봉이 최근 몇 년 새 독립운동 영웅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올해 한 상업방송에서 김원봉을 직접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이몽>을 방영하고 있는 사실도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동상은 영화, 드라마 등 상업적 스토리로 쓰기에는 만점짜리 소재였다. 김원봉이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은 캐릭터에 신선함을 더하는 요소가 된다. 이들의 활약은 첩보전을 능가하는 비밀작전들이라 스토리에 허구를 가미할 여지도 충분하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이념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색깔론 시비에 휘말릴 필요도 없다. 미디어 자본가들은 이 군침 도는 소재를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약은 2015년 여름, 영화 <암살>을 탄생케 했다. 일제부역자의 후예 박근혜 정권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한 1,200만 대중이 이 미디어 상품을 구매했다. 비슷한 모티브로 만들어져 이듬해에 개봉한 영화 <밀정> 또한 75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원봉은 일제가 최고의 현상금을 내건 독립투사, 냉철함과 치밀함에 신비감마저 갖춘 전설적인 독립운동 영웅으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이러한 이미지가 마침내 문재인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소비된 것이다.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사는 자유주의 정치권력의 속성상 문재인 정권이 김원봉의 이미지에 숟가락을 얹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중적 이미지 뒤에 가려진 실상

그렇다면 상업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된 김원봉의 이미지는 과연 실제 사실에 얼마나 부합할까. 그리고 문재인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말한 조선의용대의 임시정부 편입이 실제로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이 집결’된 것으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미디어 상품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된 김원봉의 영웅적 이미지는 다분히 각색되고 미화된 것이다.

20대의 혈기왕성한 그들은 암살과 파괴 등 폭력적 수단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이 일제로 조선 독립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그들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의열단 내부에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암살과 파괴 활동은 일제 억압에 신음하던 조선 민중에게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선사했지만 매번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컸다. 한계를 절감한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밀정 김달하를 암살한 것을 끝으로 기존 폭력투쟁 노선을 청산했다.

이처럼 길지 않은 의열투쟁 기간에 비판받을 만한 일도 있었다. 1924년에 김원봉은, 한때 의열단 동지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사회주의자 윤자영의 청년동맹회 사무실에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었다.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장 시절이던 1932년에는,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자치론을 주장한 바 있는 박문희를 이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했다. 박문희는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의 오빠였다. 사적인 친분관계 때문에 원칙을 무시한 행위로 비판받을 만했다. 이밖에도 의열단은 자금을 구하려고 종종 범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무작정 독립운동을 구실로 삼기에는 부적절한 일들도 많았다.

한편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충칭 임시정부에 조선민족혁명당이 참여하고 광복군에 조선의용대가 편입된 사실을 일종의 통일전선 정부가 세워진 것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문재인의 현충일 추념사 내용도 이러한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로의 민족운동 세력 결집은 당시 공산당과 대립하던 중국국민당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게다가 1941년 상반기에 조선의용대는 내부 분화를 겪었고 110여 명이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북 지역으로 옮겨가서 팔로군에 합류한 뒤였다. 남은 조선의용대 병력은 김원봉을 포함하여 20명 남짓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중국군사위원회는 나머지 한인 무장병력을 하나의 지휘 체제 아래 두고 철저히 통제하려 했다. 김원봉은 이처럼 조선의용대 안에서 자신의 지도력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충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합류했다. 문재인의 표현대로 좌우합작이나 통합이라 부르며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다소 민망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조선의용대 주력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쪽과 합작을 이뤘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원봉과 김구는 합류 후에도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럼에도 문재인이 국가기념일 공식 추념사에서 이 사실을 언급한 것은 임시정부 정통론을 과대포장하려는 정략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김원봉은 반공주의의 피해자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이기는커녕 공산주의자라 부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우두머리 노릇을 주로 하던 그는 조직적 속박 자체를 싫어한 민족해방운동가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그가 반공주의의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흔히 자유주의 논객들은 노덕술 등 친일경찰의 횡포가 김원봉의 월북 계기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덕술 같은 친일 경찰이 설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이 조장한 반공주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해방 후 정국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좌익 사회주의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친일관료를 중용하고 이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세력을 청산케 했다. 주객이 완전히 바뀌었다. 더구나 김원봉이 북한으로 간 뒤 남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대부분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했다. 김원봉은 명백히 반공주의 피해자였다.

여전히 수구세력은 그에게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느라 여념이 없다. 여기에 자유주의 세력은 ‘친일 프레임’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이 또한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또 하나의 색깔론이다. 이처럼 두 세력은 색깔론 대 색깔론을 맞서며 겉으로는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의존적인 공생관계를 이어왔다. 계급적 속성이 같은 두 세력은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는 악이라는 냉전적 반공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며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진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수법을 구사해왔다. 문재인이 자꾸 김원봉을 띄우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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