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를 가장한 자유주의자

0
6966

한때 ‘진보’는 수구보수세력도 자유주의세력도 아닌 왼편에 존재하는 급진적 세력을 지칭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진보는 마치 자유주의와 동일어인 것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가령 자유주의자인 유시민은 이제 “진보정치”를 논하고 대중매체에서 진보인사로 불리고 있다. 그가 진보정치를 논한 2011년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현재 16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대 교수 조국은 그보다 앞서 『진보집권플랜』이란 책을 냈다. 그러나 사실 책에는 진보라고 할 내용은 전혀 없고 민주당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정권교체하는 게 진보라고 말할 따름이다. 언론도 이에 합세했다. 언론은 선거 때만 되면 선거 구도를 보수 대 진보 구도로 잡아간다. 교육감 선거가 대표적인데, 보수 교육감 대 진보 교육감 구도로 치러진지 벌써 오래되었다. 이렇다보니 예컨대 진보로 볼 수 없는 이재정 같은 인물조차 졸지에 진보 교육감이 되었다.

어떻게 자유주의는 진보가 되었나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주의가 진보로 포장될 수 있었던 것일까?

한국의 자유주의는 비록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세력에 맞서 투쟁하긴 했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버팀목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김영삼의 국제화·개방화 정책과 노동법 개악에서 시작해서 김대중·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책까지 이런 흐름은 매우 일관된 것이었다. 더욱이 2000년대 중반까지도 자유주의세력은 스스로를 ‘민주’나 ‘개혁’으로 간주했지 감히 ‘진보’를 자처하지는 못했다. 노무현이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07년 2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논박하는 글에서 스스로를 ‘유연한 진보’라고 칭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조소를 야기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정태인조차 노무현의 이런 착각을 비판하고 “재벌과 보수언론이 노 대통령을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 자유주의자인 유시민이 어떻게 스스로를 규정해왔는가 살펴보면 자유주의가 진보로 포장되어간 과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유시민은 10여 년 전에는 자신을 “개혁세력”이라고 지칭했다. 2003년 4월 재보선에서 승리하여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했을 당시,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당선을 “모든 개혁 세력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예비후보 경선과정에서의 연설을 보면 “민주개혁세력”이라는 말을 쓴다. 2010년 5월 경 경기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비로소 ‘진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다기 보다는,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 진보정당과 스스로를 아우르기 위해 “진보개혁세력”이란 말을 쓴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유시민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칭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시점은 2011년경으로 보인다. 가령 앞서 언급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는 아예 “진보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장 하나를 할애하여 자신의 진보정치를 설명하고 있고, 최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청하고 있는 ‘썰전’이란 TV프로그램은 아예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에서 유시민이 진보를 대변하는 인물로 홍보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퇴보로까지 거슬러갈 수 있다.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키는 성공을 거둔 후, 민주노동당은 계속 우경화하면서 열린우리당 2중대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대선 실패와 분당과정을 거친 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공히 야권연대, 민주대연합으로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갔다. 사회양극화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진보는 급진화하지 않고, 우경화를 택했던 것이고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더욱 진전시킨 것이다. 진보세력이 우경화하여 자유주의에 가까워지면서, ‘진보’라는 용어 자체도 역사적 무게를 상실하고 자유주의자도 쉽사리 끌어다 쓸 수 있는 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주진보”, “진보개혁”이라는 식의 합성어들이 스스럼없이 나오게 된다.

이 과정은 통합진보당 건설로 더 심해진다.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이탈파 등 진보정치세력은 노무현 정권에 참여하고 신자유주의를 추구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진보통합”이라고 규정했고, 합당 후 당명까지 ‘통합진보당’으로 정하였다. 이로서 자유주의세력인 국민참여당 계열은 진보의 범주 안에 안착하게 되었다. 요컨대 진보정치세력이 자유주의자들이 스스럼없이 진보라는 용어를 쓸 수 있게 하는 허가증을 준 셈이다.

이와 더불어 이 과정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작용했다. 자유주의가 진보로 인식되는 것은 자본가계급에게도 유리한 일이었다. 보수세력의 경우에는 자유주의세력을 ‘진보’, ‘좌파’, ‘빨갱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정치 공세를 펼치기에 편했기 때문에, 꾸준히 보수/진보로 정치구도를 재단해가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자 역시 스스로를 진보로 포장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진보로 포장하는 것을 통해 진보운동 및 노동자, 민중 운동 세력을 자신의 정치적 영향권 안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류 언론도 이에 적극 동참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특히 교육감 선거가 대표적이다.

자유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자유주의가 진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진짜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된 것은 아니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 이치와 매한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을 통해 지적되었다. 가령 조국의 『진보집권플랜』을 예로 들어보자. 이 책에 대해 김규항은 2011년 2월에 쓴 글에서 이미 “그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해온 말이 ‘진보 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대세가 된 시민 기반의 운동에 민중 기반의 운동을 귀속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들어선 아예 ‘개혁’을 떼버리고 ‘진보’로 가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오연호, 조국 선생이 얼마 전 낸 책의 제목은 <진보집권플랜>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자유주의를 진보로 포장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은 스스로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김만권의 입에서도 나왔다. 그에 따르면, 자신은 “조국 교수가 말하는 내용과 사실상 거의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필자는 스스로를 진보라고 규정해 본 적이 없다. 실제로도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자유주의와 거리를 둔다. 내가 아는 지식 내에서 볼 때, 조국 교수의 진보규정은 결코 자유주의 좌파의 틀을 넘어서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조국은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자기랑 별반 다를 것 없는데 진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자유주의가 진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잘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민망할 정도로 빈약한 사상적 내용을 글솜씨로 매우고 있는 이 책에서 그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모든 인간 공동체의 텔로스[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강한 맹신을 보여주며, “비타협적 급진주의”는 “전체주의”요 “유토피아적 공학”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적 자유주의 사상가인 칼 포퍼를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제시한다.

그는 진보정치에 대해서도 이론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도덕율로 일관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는 자유주의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이 결합한 국가론을 제시하는데, 이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국가에 “‘미덕국가’ 또는 ‘선행국가’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에 입각해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으로 정의된다. 이런 한심한 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그는 “진보주의에 매혹을 느꼈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면서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이라고 말한다. 왜 그가 진보가 아닌지 밝혀지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보수적”이고,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서 주로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이 형성되고 표출”된다고 말하며, 부유한 중간계급의 편견을 솔직히 드러낸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상

자유주의는 역사의 진공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봉건제와의 투쟁 속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 당시 자유주의는 진보적이었다. 인간이 신분제에 예속된 사회에 반기를 들고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며 등장한 정치사상이 자유주의였다. 물론 자유주의가 자비롭고 선한 사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유주의의 등장은 자본주의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생산과 교환을 밑바탕으로 하는 체제이고, 상품의 생산과 교환은 동등한 사적 개인의 계약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제체제의 특징 상,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거래를 제약하는 봉건적 관계는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특징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사상이 바로 자유주의 사상이었다.

자본주의가 초기 봉건적 질서를 해체하고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켜 인간해방의 물질적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으로 진보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여 독점자본주의가 되고 식민주의를 통해 약한 민족을 억압하고 장기적 구조불황으로 위기에 빠진 현재에 와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진보적 역할을 할 수 없고, 오히려 반동적 체제로 전환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를 사상적으로 표현하는 자유주의 역시 더 이상 진보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사상이 되었다. 결국 자유주의의 근본적 한계는 바로 자본주의의 정치사상이라는 데에서 나오고, 그것의 운명 역시 자본주의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시정하고 완화하고자 하지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용인하는 한 이러한 시정은 일시적인 것이고 악화일로의 삶을 전혀 막지 못한다.

이는 자유주의가 확고한 서유럽과 미국의 정치 현실에서 바로 지금 확인되고 있다. 그곳에서는 민주주의 위기가 제기되고 있다. 아무리 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치체제를 잘 갖추었어도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 공세로 인해 노동자, 민중의 삶은 악화되었고 2008년 대공황 이후 이런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자 겉으로만 민주주의일뿐 실상은 금권정치라는 비난이 사람들로부터 쏟아지고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는 현재의 박근혜 퇴진에 대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입장과 비추어서도 충분히 곱씹어 볼 부분이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하나같이 박근혜 퇴진에 나서는데 미온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이 박근혜 퇴진에 미온적인 이유는 아무리 민주주의를 떠들어도 더불어민주당이 보수세력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드는 자유주의적 자본가계급 정당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퇴진요구가 터져나온 초기 “국민의 분노를 담으면서도 국가가 더 큰 혼란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우상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박근혜 퇴진보다 퇴진투쟁이 열어 놓은 대중의 분출을 더 걱정했다.

이 시대의 진보는 자본주의와 싸우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주의는 진보적인 사상이 전혀 아니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치사상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진보로 인식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동자, 민중은 자유주의와 단절하지 못한 채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가령 JTBC에서 방영하는 썰전은 사회문제에 관심있는 상당수의 젊은 사람들과 노동자들이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가 진보로 포장되는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열을 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노동자, 민중이 독자적인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유주의와의 단절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주의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고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는 것과 투쟁해야 한다.

한편 자유주의가 진보가 아니라면 무엇이 진보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바로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현재의 진보는 단순히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반민주세력을 몰아내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의 삶을 옭아매고 대다수 삶의 문제를 야기하는 자본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이 낡은 사고라고 할 게 뻔하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솔직히 현실을 보자. 성두현의 글 「20년 동안 약속하고도 지배계급이 해결에 실패한 문제들」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는 그대로 둔 채로는 악화일로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은 갈수록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