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피소 사실 유출: 자기가 세운 원칙을 스스로 저버린 자유주의여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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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지난해 12월 30일, 박원순 성추행 피소 사실이 유출된 경위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피해자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에게 피해자가 박원순을 성추행으로 고소할 예정임을 밝히며 상담을 하였고,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이에 대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당시 상임대표 김영순과 상의를 하였다. 그런데 김영순 상임대표가 이 사실을 남인순 민주당 의원에게 유출하였던 것이다. 남인순 민주당 의원은 이를 다시 서울시 젠더특별보좌관 임순영에게 알려주었고, 박원순은 임순영 젠더특보를 통해 피해자가 자신을 고소하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성추행에 대한 제대로 된 검찰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박원순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서울시 관계자들이 각종 증거를 미리 인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실은 큰 파장을 낳으며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김영순 상임대표는 1월 14일 여연 정기총회에서 해임되었다. 한편 남인순 의원은 아직까지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냐는 질문을 했을 뿐이지 피소 사실을 유출한 것이 아니라는 한심한 변명을 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는 2021년 1월 18일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여 “피해자가 10시간 조사를 받는 중에 피의자 쪽에서는 대책 회의를 통해 이미 모든 상황을 논의하고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지 않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계획대로 압수수색이 이루어졌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법적인 절차를 밟아 잘못된 행위에 대한 사과를 받고, 상대방을 용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기회를, 세 분이 박탈했습니다.”라고 하며 유출에 관계된 김영순 전 상임대표, 남인순 의원, 임순영 젠더특보 세 사람을 규탄하고, 남인순 의원에 대해 사과와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였다.

박원순을 위해, 피해자 보호라는 기본 원칙조차 배반한 자유주의 여성운동가들

김영순 전 여연 상임대표, 남인순 의원, 임순영 젠더특보 모두 여성운동 경력에 힘입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선 사람들이다. 특히 김영순 전 상임대표와 남인순 의원 모두 여연 출신이다. 여연은 1987년에 설립되어,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등 ‘우리나라의 여성운동단체’라고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단체들이 대부분 가맹되어 있는 큰 단체다. 2014년경부터 청년층을 중심으로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면서 이러한 기성 단체들 바깥에 있는 청년 여성들의 움직임들이 활발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연이나 그 가맹 단체들의 활동을 빼고는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이나 여성 관련 현안에 대해 논하기 어렵다. 또한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피해사실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외부에 공개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기타 정보를 가해자에게 알리는 경우 2차 가해나 증거 인멸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고, 피해자는 비밀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는 반성폭력 운동의 원칙 역시 바로 여연이나 그 가맹 단체의 활동가들 스스로가 주장하고 정립해온 원칙이다. 바로 그렇기에 여연 출신으로 여성운동에 오래 몸담아 온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피해자의 상황과 사건 해결이 아니라 박원순과 자유주의세력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 만든 원칙조차 스스로 내팽개친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연 전 상임대표 김영순이 피해자의 동향을 민주당 의원인 남인순에게 알린 것은 여성운동계 전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더욱이 여연이 올해 1월 14일 성명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여연은 이미 2020년 7월 16일 김영순 상임대표의 유출 행위를 인지하고 그에 대한 직무배제 조치를 취하였다. 그렇다면 여연은 당장 자기 단체의 상임대표가 피해자에 대해 심각한 2차 가해 행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월 동안 공개적 사과나 반성도 없이 이를 숨긴 채, 대외적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규탄하는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연 가맹단체로 박원순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던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 역시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위선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여연의 규모나 여성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는 단순히 한 사람만의 일탈이 아니라 현재의 주류 여성운동이 전반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한국사이버성폭력상담소와 같은 다른 여성단체들이 검찰 수사 결과 밝혀진 김영순 등의 행동에 대해 “지난 20여 년 간 고착된 민주당과 여성단체 간의 이해관계 고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여성단체의 활동과, 여성단체 출신의 정치인 배출이 얼마나 활발하든 민주당과 남성 권력의 알리바이가 될 뿐 근본적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삶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여성단체의 뼈아픈 각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번 사태는 최소의 여성주의조차 배반하는 사례이자 기득권 정치에 부끄러움 모르고 타협한 참담한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처럼 강도 높게 비판하는 입장을 발표한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여성운동가가 이와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피해자 편이 아닌 박원순 편에 선 이번 사건은, 자유주의여성운동이 자유주의세력의 이해를 위해 자신들이 세운 성폭력 피해자 보호라는 기본 원칙조차 스스로 배반할 수 있음을 많은 대중들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지난 20년간 자유주의세력과 일체가 되어간 주류 여성운동

여연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여성운동은 1980년대에는 반독재 투쟁의 일부로 ‘진보적 여성운동’으로 불렸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같은 독재정권의 어용 여성단체와 대비되는 의미였다. 사상적으로도 모든 여성이 아니라 민중인 여성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여성해방은 사회의 총체적인 변혁과 함께 가야 한다는 관점이 주류였다. 그러나 이른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등을 거치면서 여성운동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가령 1991년 여연 정책수련회에서는 ‘생산직 중심의 사업 편향의 극복, 범여성 세력의 결집, 구체적인 정책 대안의 제시, 정치 투쟁의 수위 조절’이 이야기되었다.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하면서 여성운동은 본격적으로 자유주의화되었다. 김대중 정권 시기부터 지은희, 한명숙 등 여성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자유주의 정권의 장관으로 대거 입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여성운동단체들은 자유주의 정권의 협력 파트너가 되어 자유주의 정권이 위탁하는 사업을 처리하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1998년 공황 시기 여연은 긴급구호활동과 공공근로사업을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수행했다. 또한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6년에 여연은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협약’ 체결에 참여하였다. 이 협약은 정부와 자본가계급이 여성 고용 확대,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핑계 하에 탄력근로제 등 노동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확대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주류 여성운동의 그런 모습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계속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여성운동과 문재인 정권, 민주당은 인적으로 매우 강하게 결합되었다. 정현백이 여성부 장관에 임명되고 남인순, 권미혁, 정춘숙 등 여연이나 여연 가맹단체에서 주요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이 대거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여연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문재인 자유주의 정권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단적인 예로, 문재인 정권은 2018년 11월, 노동자에게 탄력근로제 확대 등 양보를 강요하기 위한 기구인 경사노위를 출범시켰는데, 박봉정숙 여연 성평등연구소장은 경사노위가 출범할 당시 공익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여연은 2019년 4월 거액의 주식 투자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이미선이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명을 환영하는 성명을 냈다.

주류 여성운동은 이렇게 2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자유주의세력과 일체가 되어갔다. 2000년대 초반부터 여성운동 내부에서, “때로는 제도의 메커니즘에 익숙해져서 ‘알아서 조율’하고 ‘스스로 온건해’졌으며, 운동을 앞서가는 ‘제도화’의 속도로 인해 여성운동은 ‘뒷북을 치거나’ 사후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성찰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오장미경, 「여성운동의 제도화, 운동정치의 확대인가 제도정치로의 흡수인가」, 2005). 어느새 3. 8. 여성의 날에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할 때 여성가족부의 후원을 받는 것, 활동가들이 정부나 서울시의 성평등, 젠더 문제 관련 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여성운동과 자유주의세력은 더 이상 서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얽혔다. 가령 이번에 문제가 된 김영순 전 상임대표도 여연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활동가인 동시에 국무총리 소속 양성평등위원회 위원직, 여가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비상임 이사, 서울시 성평등위원회 위원직,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위원직 등 다수의 정부 직책을 갖고 있었다.

이제 자유주의세력과 싸울 수 있는 새로운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주류 여성운동이 자유주의화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까지 자유주의여성운동의 본질이 다수 여성 대중들에게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못하였다. 우선 다수의 여성들은 자유주의여성운동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일반 여성들의 입장에서 ‘여성운동’ 하면 떠올리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이었고, ‘페미니즘 운동’ 하면 떠올리는 것은 여연, 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었다.

최근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면서 청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 칭해지는 입장에 서서 기성 여성운동을 비판하는 흐름이 생겨났기에, 여연 등의 주류 여성운동세력은 과거에 비해서는 영향력이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여자만 챙기자’는 식의 ‘래디컬 페미니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청년 여성들은 여연으로 대표되는 주류 여성운동세력으로부터 사상적으로, 실천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받아 왔다. 여성운동 내에서, 여연으로 대표되는 주류 여성운동보다 급진적인 목소리는 결집되거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번 박원순 피소 사실 유출 사건은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다. 김영순, 남인순, 임순영의 행동은 자유주의여성운동이 자유주의세력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주장해온 여성해방, 반성폭력의 기본 원칙조차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청년 여성들에게 대중적으로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7월 박원순 사건과 그에 뒤따른 자유주의세력의 심각한 2차 가해는 청년 여성들이 문재인 정권과 자유주의세력에 등을 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제 청년 여성들은 이런 여성운동가들이 여성해방을 위한 싸움에서 당연히 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사실 자유주의세력의 일부분으로서 자신들의 반대편에 서 있었음이 김영순, 남인순, 임순영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청년 여성들은 김영순, 남인순, 임순영 같은 여성운동가들이 자유주의세력의 안위를 위해 반성폭력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을 직접 목도하였다.

이 사실이 드러난 이상 여연 중심의 자유주의여성운동은 이제까지의 위상을 유지하기 어렵다. 자유주의여성운동은 본격적으로 위기를 맞으며 흔들릴 것이다. 그렇다고 ‘래디컬 페미니즘’이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래디컬 페미니즘’ 세력 역시 ‘야망’을 말하며, 여성들이 현 자본주의 체제에 영합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여성해방이라는 식의 주장을 계속 하고 있기에, 지금은 스스로를 여연 등과 구별짓고 있지만 결국 자유주의로 견인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최근 몇 년간 여성해방운동으로 각성된 청년 여성들 역시 ‘래디컬 페미니즘’을 계속 고수할 경우 김영순, 남인순, 임순영 같은 자유주의여성운동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세력과 싸우며 여성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여성들이 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국회의원, 자본가가 되어 남성과 동등하게 지배계급에 편입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여성운동은 이번 박원순 피소 사실 유출 사건을 통해 그 바닥을 드러냈다. 여성해방의 가장 큰 걸림돌인 자본주의와 싸우고, 그 과정에서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등 자유주의세력과도 싸울 수 있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만들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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