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서 말하지 말자―계급적 노동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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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계급적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안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원을 파악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해당 용어를 검색해보면 1990년대 무렵의 글에서부터 검색이 되는 것으로 보아 20여 년 이상 사용된 용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여전히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다는 사실은 2019년 11월 전태열 열사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배포된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유인물, “‘4차 산업혁명’의 시대―자본주의 ‘최후’의 시대, 계급적 노동 운동으로 새로운 전망을 열어 나가자!”나 근래 전교조를 중심으로 교육노동운동 내에 새로 만들어진 “교육노동자현장실천 추진위원회”에서 진행하는 기획강좌 제목에 “계급적 교육노동운동”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말이 노동운동을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을 회피하는 태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계급적 노동운동’은 어불성설

‘어불성설’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조리가 맞지 않아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런데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말이 따지고 보면 어불성설이다.

노동운동의 주체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계급적 노동운동’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동어반복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운동이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운동이 아니라면 ‘노동운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운동 앞에 ‘계급적’이라는 기이한 형용사가 덧붙여져 있다. 이 말을 만든 이들이 이 ‘계급적’이라는 말을 ‘자본가계급적’이라는 의미로 쓴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기실 ‘계급적 노동운동’은 ‘노동자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말로 쓴 셈이 된다. 사실 이 말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도 어려운 말이다. 영어로 예로 들면 ‘labor movement’, workers’ movement’, ‘working class movement’라는 표현은 영어에서 접할 수 있어도, 계급적 노동운동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영어 표현을 찾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 ‘노동자운동’, ‘노동자계급운동’ 등의 용어 앞에 붙는 형용사는 해당 노동운동의 사상적, 이념적 지향을 표현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노동운동 내에는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노동운동 세력도 항상 존재해왔고, 심지어 카톨릭과 같은 종교적 입장에 선 노동운동도 존재했다. 이 경우 전자는 예컨대 기회주의 노동운동, 후자는 카톨릭 노동운동과 같이 표현했다. 그러나 “계급적”이라는 형용사에는 딱히 어떤 이념이 담겨 있지 않다.

‘계급적’이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해석해보면, 그것은 아마도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정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노동운동 내에는 다양한 정치적 지향과 노선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노선들이 모두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올바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노동운동 내에 노동자들의 이해에 반하는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자본가세력의 편에 서는 세력들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명제를 하나의 원칙으로 제시하는 것 자체가 노동운동 내에서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활동가들의 의도도 이런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말이 조리에 맞지 않는 동어반복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급적”이라는 말에는 뭔가 대단히 원칙적이고 투쟁적인 이미지를 풍길 뿐 실제 그 말에 어떠한 사상적 내용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러 사업장을 보면 어용노조에 맞서 노동조합 선거에 나선 이들이 ‘노동자답게’, ‘노조답게’라는 구호를 내거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일견 “계급적 노동운동” 입장에 서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조합주의에 머무르는 노동운동이다. 요컨대 ‘계급적 노동운동’이란 용어에는 일견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다는 원칙적 태도가 담겨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사상적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는 공허한 용어라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운동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이다

만약 투쟁을 회피하고, 타협적이고, 심지어 자본에 투항하는 배신행위를 벌이는 노동운동 내 세력들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노동운동을 내세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운동이 되어야 할까? 그 답은 간단하다. 바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답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사상과 운동이라면, 노동자들이 받는 착취, 억압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노동자의 완전한 해방 전망을 제시하는 사상과 운동이어야 한다. 만약 노동자들이 받는 착취와 억압의 원인을 잘못 규명한다면, 그리고 그 착취와 억압을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강도만 그저 완화시킬 뿐이라면, 그것은 노동자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뿐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사상과 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바로 노동자들의 착취, 억압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노동자들의 해방 전망을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받는 착취, 억압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목적은 자본가가 이윤을 획득하는 것인데, 이 이윤이 바로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을 착취한 데서 나온다. 또한 이러한 착취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하는 반면 아무런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 후 임금노동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적대관계에 있고 자본가에 의한 착취, 억압에서 근본적으로 해방되기 위해서 자본주의를 철폐해야 한다(이것이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의 의의를 부정하는 뜻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가 우리 매체에 쓴 「반자본이 아니라 반자본주의다」를 참고하길 바란다). 또한 자본주의의 계급, 착취 구조는 『공산당 선언』의 표현대로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들의 착취에 근거하는 생산물의 생산 및 전유의 최후의, 그리고 가장 완성된 표현”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해방은 착취와 억압 일반, 계급 일반을 폐지하는 과제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즉 노동자들은 자신의 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보편적 해방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계급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은 이러한 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여 투쟁해야 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위와 같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관점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이 점하는 객관적 위치에서 나온 것이고, 노동자계급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밟아야 할 길을 제시한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해방되려면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정말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계급적 노동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말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말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회피해선 안 된다

이러한 주장에 ‘계급적 노동운동’ 용어를 사용하는 활동가들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이 대중적 접근법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여건이 허락지 않으니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계급적 노동운동’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적 접근법이라기보다는 반공주의가 오랫동안 강하게 지배해온 한국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1월 29일 『프레시안』에 실린 「국보법, 한국 사회 황폐화하는 주범」이라는 기고문에서 고승우 박사는 국가보안법이 너무 오랫동안 막강한 강제력을 행사해 일상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면서 “사람들이 항상 국보법을 의식하면서 대소사에 사상의 자유, 상상의 자유를 스스로 제약하는데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분단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비단 국가보안법뿐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 전반이 사회주의를 쉽사리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해왔다.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표현에는 바로 노동운동 활동가 스스로도 사회주의를 말하는 게 꺼려지는 이와 같은 상황이 깔려 있다.

그 다음으로,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용어는 활동가들 스스로가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활동가들 중에는 자신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대중적 여건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대중적으로 스스럼없이 제시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계급적 노동운동’ 용어를 쓰는 활동가 내면에 사회주의 정체성이 확고히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일 수밖에 없는데도 자꾸 그 내용이 불분명한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극도의 모순상태에 빠졌고 노동자들의 삶은 악화되기만 하고 있다. 장기침체 상황의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대공황을 향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제기하는 흐름 역시 강화되고 있다. 한 마디로 현재 전세계적으로나, 한국 상황에서나 사회주의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시기에 노동자계급 입장에 선 운동을 하려면 과감하게 사회주의를 내걸고 싸우며 노동자들의 의식을 높여가야 하고, 이제껏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어렵게 한 지배 이데올로기와도 충돌해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어정쩡한 용어가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나아가길 회피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며 돌려서 말하며 현실을 회피하는 풍토가 퍼져 있다. 사회주의, 진보세력의 경우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계급적 노동운동’이라는 용어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돌려 말하지 말고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말하자. 노동자계급이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 착취,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회주의 노동운동 밖에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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