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계급의식 확립을 방해하는 학습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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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회주의자]

[특집] 이제 사회주의노동운동을 하자

『사회주의자』는 129주년 노동절을 앞두고 사회주의노동운동으로의 전환을 주창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민주노조운동은 현재 노동자사상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채 조합주의, 경제주의의 협소한 틀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투쟁을 하고 있다. 노동자의 착취와 억압의 근원인 자본주의에 대해 맞선 싸움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더욱 가속화되고 곳곳에서 노동자의 삶이 악화일로에 있는 이유가 자본주의에 있음이 분명해지는 지금, 노동자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자본주의와 정면 대결하는 사회주의노동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제 사회주의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가 자신의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① 이제는 사회주의노동운동이다!

② 반자본이 아니라 반자본주의다

③ 노동자의 계급의식 확립을 방해하는 학습을 버려야 한다

④ 다람쥐 쳇바퀴 투쟁에서 벗어나자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말은 모든 학습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계급의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이 학습하고자 하는 분야가 노동문제이든 사회문제이든, 이 사회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의거하고 그것이 바로 지배 권력으로 되는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권력의 원천인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지 않고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게 노동자 계급의식의 핵심이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학습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도 계급의식을 벼릴 수 있는 올바른 사상과 이론으로 학습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학습을 하고 수많은 정책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계급의식을 갖지 못하면, 학습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계급의식을 갖추지 못한 모든 실천은 아무리 격렬한 양상을 띠더라도 결과적으로 양보와 탄압을 앞세운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민주노조운동의 답답한 현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장소모임 학습으로부터 출발했던 민주노조의 전통

7, 80년대는 현장에서 학습 소모임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이다. 학습 소모임은 학습모임으로만 끝나지 않고, 현장의 끔찍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한편 자신만의 이익을 넘어 체제의 근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며, 실천으로 스스로 배운 바를 검증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가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터져 나왔고, 노동자들을 사회변혁의 중심으로 세웠다. 노동자들은 변증법과 유물론을, 정치투쟁과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실천했다. 학습의 기본적 내용은 다름 아닌 ‘과학적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주노조운동의 훌륭한 전통은 잊혀졌다. 현실은 과거와 다르지 않은데도 학습 소모임의 치열했던 학습과 실천은 과거의 유물로 취급을 받고 있다. 점점 더 폭력적으로 마른 걸레를 쥐어짜는 이 체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고민을 하는 것은 철 지난 유행가가 된 지 오래다. 이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건 패배주의에 찌든 심신을 달래줄 어설픈 인문학과 보잘 것 없는 운동을 그럴 듯하게 포장할 화려한 실무능력이 됐다. 노동운동 내에서 ‘갑질’이니 ‘노동존중’이니 하는 몰계급적인 개념들이 유행하는 것도 학습의 부재,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후퇴를 말해주고 있다. (관련 글로는 박남일 동지의 글 「‘노동존중’, 노동착취 은폐하는 자유주의 용어」를 참고할 것.)

노동자는 무엇을 학습해야 하나

우리가 제대로 된 학습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본주의는 그 이전의 체제와 달리 착취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에서는 생사여탈권까지 가진 신분제도에 의해서, 노동력이나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을 직접 눈앞에서 빼앗았기 때문에 착취를 직접 경험하고 분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자유로운 계약’ 등으로 ‘잉여노동’이 은폐되어 착취가 직접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스펙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경쟁의식’이 내면화되면서 스스로 착취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학습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에 실린 이태하 동지의 글 「왜 노동자들이 『자본론』을 학습해야 하는가!」에 나온 내용을 경청하고자 한다. 이 글은 『자본론』을 빌어 학습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을 조합주의에 가두어두는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삼밭의 역할을 하는 『자본론』 학습이 중요하다. 『자본론』 학습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임금노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본축적의 적대적 성격, 즉 상대적 과잉인구와 노동자들의 빈곤화를 알게 된다. 또한, 자본가들의 이윤율이 점차 저하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한계를 알게 되고, 이러한 요소들의 상호 연관 속에서 발생하는 ‘공황’과 자본주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임금노동과 사적 소유의 철폐 없이는 노동자들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없는 임금 노예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노동자는 조합주의라는 협소한 ‘우물 안 개구리’식 관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학습이 노동자가 스스로 계급으로서 자각하고 계급투쟁의 무기를 손에 쥐는 과정이다. 감추어진 착취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피할 수 없는 계급갈등을 어정쩡한 화해와 타협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국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사적 소유가 폐지되는 노동자계급의 국가를 건설해야만 비로소 착취를 끝장낼 수 있다는 걸 배우는 것이 노동자의 학습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학습이 아니라 집단적인 학습을 통해서 토론과 민주주의, 공동의 책임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한다.

계급의식의 확립을 방해하는 노동자 학습의 모습들

199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조운동에서 이제는 현장 학습 소모임이 사라지고 단협으로 얻은 1년에 몇 시간도 안 되는 교육시간이 그것을 대체해버렸다. 그 대부분 교육시간도 임단협 설명과 정세강연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계급의식은커녕 탈정치화된 인문학 열풍이 현장을 휩쓸고 있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강사의 강연이 조합원 ‘교육’이라는 외피를 쓰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노동법 강의가 현실적 필요라는 이유로 모든 학습을 대체하고 있다. 더 커다란 문제는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조차 학습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계급의식의 확립을 방해하는 학습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면 아래와 같다.

① 인지도 높은 강사를 추종하는 잘못된 교육 분위기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는 것은 예리하지 못하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충분한 비판에 그치거나 그마저도 못한 수박 겉핥기식의 사실 나열에 그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면, 강원도에서 한국사와 관련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한 교수의 강연이 개최된 바 있다. 근현대사에 대한 강의를 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으나, 박정희의 혈연관계가 어떻고, 궁정동에서 어떻게 놀았는지 따위의 온통 가십거리만 늘어놓았다. 물론 가십거리는 재미있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이 독재정권 아래서 어떤 고통을 받았고, 그 고통을 끝장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며 투쟁했고, 그 결과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앞으로 운동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등,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 싶었던 사람들은 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자본주의의 착취를 말하지 않는 학습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학습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착취(이윤)에 대해서는 제대로 학습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억울함만 이야기하고 마는 경우가 가득하다. 그러니 자본가에 대한 원성은 가득하지만,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장기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조차 수년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열심히 일 한 죄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어디에서도 자신의 해고 등 고통의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자는 주장을 듣지 못한다.

③ 협소한 노동법 교육에만 치우친 교육

최근엔 ILO협약과 노동법개악에 대한 교육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동법을 알아야 제대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 교육의 취지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본가계급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목숨 줄을 옥죄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법에 숨어있는 교묘한 간계를 파악하고, 법과 제도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노동법 교육은 법률가에게 위탁한 법률적 대응을 투쟁의 주요한 수단으로 승인하며 투쟁을 회피하는 모습들을 만들었다.

실제 노동자의 투쟁도 법을 잘 아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비록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법률대응으로만 지금까지의 성과를 낸 것이 아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당하면서도 생산라인을 멈추는 등 치열한 투쟁들을 했기 때문에 그 성과들이 나온 것이다. 반면 10년이 넘도록 현대자본은 불법파견으로 처벌받지 않고 있다.

④ 계급의식은 잊게 만들고 힐링만 외치는 인문학 강연

최근에는 인문학 강좌가 노동운동 내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분석하고 대안을 탐구하던 사회과학이 어느새 ‘인문학’이란 말랑말랑한 말로 바뀌고 개인의 삶과 힐링을 말하기 시작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고통스럽다. 활동가들은 지치고 있다. 골치 아픈 분석보다 편하게 들으며 지적 만족을 높일 수 있는 인문학 강연이 이 틈을 어느새 파고든 것이다.

노동현장에 파고든 인문학은, 노동자가 겪는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고 올바른 계급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학습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대신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실제로 이런 제목의 팟캐스트가 있다)이나 ‘소확행'(이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자』에 실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확행’이라는 환상」을 참조할 것)과 같이 노동자의 의식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사례가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의 조합원 교육일 것이다. 작년 기아자동차지부는 “품격있는 장소, 품격있는 교육”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조합원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 내용을 보면,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고 한다. 인문학에 대해 듣고 재무설계를 하자고도 한다. 심지어 기아자동차지부의 교육은 내용의 부실함을 넘어 이제는 사측과 교육을 함께 진행하는 지경에 왔다. 거기 어디에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들어갈 수 있는가? 90년대에는 자본가계급이 조직적으로 노동자 계급의식을 파괴하기 위해 진행했던 다물단 교육이란 게 있었다. 또 다른 이름의 다물단 교육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고, 노동조합은 이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이 문구는 19세기 독일의 사회주의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남긴 말이다. 리프크네히트는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노동자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실천으로 학습과 선전, 조직을 주창한 것이다. 실천의 첫걸음이 바로 ‘학습하라’는 것이고, 그 학습은 결코 다른 실천 활동인 선전, 조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일하는 현장에서, 투쟁의 공간에서 학습은 여전히 자신의 현장과 동떨어진 고리타분한 것이거나 현안문제의 대응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고, 그래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실천’이라는 식으로 ‘학습’과 ‘실천’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하다. 그러나 이런 사고의 결과가 민주노조 운동의 답답한 현재 모습을 낳았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장의 학습 소모임은 노동조합의 교육으로 대체됐다. 현장에는 정치조직들도 존재하지만, 일상적인 학습 소모임은 겨우 명맥만 존재하고 있다. 여러 학습조직이 활동하고 있지만, 노동조합의 요구인 임단협과 정세에 대한 강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학습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운동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현재의 운동 상태 자체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노동자 계급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학습이 부재한 결과이기도 하다. 가슴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데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인식의 한계는 조합주의자와 관료들의 본질을 대중적으로 폭로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끌려 다니는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고 있다. 또한 단지 단기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판단의 모든 기준이 되어버린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교묘하게 노동자들을 포섭하고 있는데, 그 계급적 본질을 파헤칠 수 있는 계급의식이 학습으로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신을 지키지도 못할 뿐 아니라 비판적 대안의 모색과 실천은 불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가벼운 한 번의 불만 표출이나 엉뚱한 실천으로 대중과 괴리되는 결과를 낳는다.

사회주의를 학습하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면서 투쟁의 무기가 되었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인 맑스주의를 학습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에서도 사회주의가 퍼지고 있다. 오죽하면 자본가계급의 대변인인 트럼프조차 사회주의의 위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미국의 10대 패션잡지인 틴보그(Teen Vogue)에서조차 사회주의를 거론하겠는가? 그만큼 이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며,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핵심적 이론인 맑스주의를 학습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가 그 광폭한 폭력성을 드러내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했던 맑스주의가 실천적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제 계급의식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학습을 버리고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무기인 맑스주의를 학습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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