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와 주택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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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 보다 건물주가 위대하다” 2014년 PD수첩 1000회 특집인 <임대업이 꿈인 나라>에서 한 재무설계사가 던진 말이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2014년 소위 ‘갓(God)물주’들이 한 해 동안 부동산으로 벌어들인 소득은 대략 422조로 GDP 대비 28.4%를 차지했다. 그리고 최근 현대경제원에 의하면 지난 2분기 말 1,250조를 돌파한 가계대출 중 60% 이상이 ‘주택담보대출’이라고 한다. “복과 덕을 주는 곳(복덕방)”이 천지에 널려 있음에도 인구의 절반이 전월세 임대주택을 전전하며 주택담보대출을 갚는데 소득 대부분을 써야 하는 현실을 두고 아마 살만하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토지와 주택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경향에 발맞춰 각종의 투기와 편법 등이 난무한다. 이에 대해 소위 전문가들은 주택수요공급의 불일치 또는 투기자본의 개입이나 금리정책 실패가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투기가 나쁜 걸 누가 몰라서 그러겠나? 이미 토지와 주택이 상품으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수요공급에 의한 가격 변동이나 금리변동 등에 따른 문제는 기정사실이다. 진정한 문제는 현상 아래에서 토지와 주택의 가격을 결정짓는, 본질적으로 그것들을 사고파는 상품관계, 그 자체에 천착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토지와 주택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토지와 주택의 가격, 나아가 그것의 임대료 등은 일차적으로 지대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지대라는 건 일정기간 동안 특정의 공간을 사용할 대가로 화폐를 지불하는 걸 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자본가가 사업을 하려면 자본을 투하할 토지가 있어야 하는데 만약 자기 소유의 토지가 없다면 타인의 소유지를 일정기간 동안 일정액을 지불하는 식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토지 소유자에게 있어 이렇게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일정의 지대는 자본에 대한 이자와 마찬가지다. 쉽게 생각해 평균이자율이 2%라면 연간 2원의 지대는 자본 100원에 대한 2%의 이자와 같다. 고로 연간 2원의 지대를 받는 토지는 100원의 자본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즉 토지에 대한 지대가 곧 그 토지의 구매가격이자 매매가격을 형성한다.

여기에 추가적인 개량을 가한다면 개량을 위해 소모된 자본의 이자 역시 지대에 추가된다. 일례로 토지 개량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면 다음 계약 시 임대료가 올라가게 된다. 결국 수요와 공급 이전에 토지의 매매가를 결정하는 건 토지의 절대적 소유로부터 기인하는 지대인 것이다. 특히 토지는 여타 금융상품보다 안정적이고 또한 제한적이기 때문에 토지이용이 증가하고 산업자본의 이윤율이 하락할 경우 보다 많은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토지에 집중되어 지대와 토지가격 모두가 폭등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토지 소유자는 토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생산의 보다 많은 몫을 차지하고 요구할 수 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이것이 “경제 발전의 진행에 따라 토지 소유자들의 부가 증대하고 지대가 끊임없이 팽창하며 그들의 소유지의 가치가 증대하는 비밀”이라고 폭로했다.

지대, 토지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는 토지의 가격 뿐만 아니라 임대료에도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주택의 가격은 주택을 건설비용과 기대이윤을 포함한 ‘건물의 가격’, 그리고 건물이 들어선 토지가격의 합이다. 세월이 갈수록 건물은 낡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건물의 가격은 하락한다. 그러나 토지의 가격은 토지 위의 건물과 무관하게 지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주택의 건물가격이 떨어지더라도 토지가격이 하락분에 비해 높아진다면 주택 가격 자체는 올라간다. 당장 강남 대치동의 낡은 건물들이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는 건 이 때문이다. 실제로 신도시 개발 사례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건설자본은 주택건설 자체로부터 이익을 얻기보다 지대의 상승과 그로부터 나타날 토지가격의 상승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주택의 임대료는 공장이나 농지의 지대에 비해 독점적이란 점에서 보다 무자비하다. 최근 문제시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높은 지대에 쫓겨났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침체된 지역이 활성화되면 어느 새 투기자본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온다. 결국 과거의 토지소유자나 세입자들 대신에 자본가와 투기자들이 빈 토지와 주택을 소유하고 기존의 사람들은 다시 내쫓겨 이전보다 못한 곳을 찾아 헤매게 된다. 마치 과거 영국에서 지주들이 경작지의 농업노동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양모 생산을 위한 양을 길렀을 때,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비유한 것처럼 이윤추구를 위해 자본화된 토지와 주택이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다. 이건 결코 개별 지주의 성품 탓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착취의 정당화

토지와 주택의 문제는 그것들의 소유자가 다른 모든 사람을 배제하면서 지구의 일정한 부분을 자기 개인의 배타적인 영역으로 지배할 수 있는 독점력을 갖고서 그것을 경제적으로 행사한 결과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와 한 국민, 동시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전체도 땅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은 다만 땅의 점유자이자 이용자일 뿐이며” 이를 잘 보전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토지와 주택이 상품으로 교환된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 나아가 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처분과 처리 역시 오로지 내가 결정한다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사고방식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즉 자본화된 지대가 토지의 가격으로 나타나고 토지가 온갖 다른 거래품[상품(인용자 주)]과 마찬가지로 매매될 수 있다는 사정―에 의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기반한 착취가 은폐된다.

그럼 대체 소유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런 모순에 빠지게 되는 걸까? 사실 소유란 사전적으로는 특정 주체가 어떤 물건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최초의 소유권은 한 인간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가정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장에선 상호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상품소유자들이 대면하여 상품을 교환하는데 타인의 상품의 취득하는 수단은 오직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는 것뿐이고 자기 소유의 상품을 얻는 유일한 길은 상품을 생산할 자신의 노동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노동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는 소유권의 본래적 형태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기 노동에 의한 소유가 부정되고 그 의미 자체가 변화하게 된다. 왜 그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상품생산사회이다. 내가 직접 만들지 않는 이상 먹고 쓰고 입는 모든 건 누군가의 것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상품의 구매로 획득된다.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은 사적으로, 배타적으로 소유되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인간은 자신의 무언가를 상품으로 내놓아야 한다. 즉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즉 ‘노동력’을 자본가들에게 판매한 대가로 임금을 받고 자본가는 자신의 생산수단과 타인의 노동력을 결합시킨 상품를 소유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발휘해 생산수단을 생산적으로 소비하여 보다 증대된 가치인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지만 이렇게 증식된 가치와 상품은 오로지 생산수단 소유자, 자본가의 몫일 뿐이다.

결국 자본주의 하에서의 ‘소유’란 자본가 측에서는 타인의 잉여노동 또는 잉여생산물을 갈취하는 권리가 되고, 노동자의 측에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취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뒤바껴 버린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정당한 거래와 교환이란 자본주의 물신성 아래에 감춰진다. 애당초 노동력을 팔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를 사들여 그 이상의 잉여가치를 뽑아내고자 하는 자본의 목적이 임노동관계로 정당화되듯이 토지에 대한 소유가 토지로부터 배제된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응당 그들은 토지를 자신이 만들어 냈노라 주장하고 증명해야 할 것이나 지구 상의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토지를 창조해냈노라 주장할 수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토지의 점유자이지 생산자가 아니다.

물신성을 넘어 새로운 사회로

자본가에게 있어 지대, 나아가 대부자본에 대한 이자와 주식의 배당금 등은 공짜로 얻은 게 아니라 일정한 등가를 지불하고 얻은, 그리고 특정한 기대를 갖고 사들인 상품의 효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앞선 청구권은 그러한 상품을 구매하는 데 소요된 자본의 이자이며 당연히 얻어야 할 것에 다름 아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토지에 대한 소유와 지대의 추구, 주식의 구매와 배당의 추구, 임노동관계와 잉여가치의 추구는 “흑인 노예를 구입한 노예 소유자에게 흑인소유가 노예제도에 의해 얻어진 게 아니라 이 상품[노예]의 구매에 의해 얻어진 것처럼 나타나는 것”처럼 당연한 현상이며 정당한 권리이다.

그러나 ‘구매’라는 행위가 구매 대상에 대한 소유권을 창조하는 건 아니다. 구매는 단지 무언가의 소유권을 이전시킬 뿐이며 구매하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고서는 소유권의 이전은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흑인을 소유할 수 있는 건 흑인을 매매해서가 아니라 흑인을 노예로 만든, 또 다른 인간을 소유하게 만든 노예제도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토지의 구매와 대출이라는 상품, 주식의 구매가 전제하는 소유권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타인의 잉여노동 또는 잉여생산물을 착취하는 권리이고, 동시에 지구의 일정부분을 점유하고 그것의 대가를 배제된 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폭력이며 지배권이다.

토지와 주택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유는 그것이 토지와 주택을 소유한 진정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노예제와 식민지배가 그랬듯이 타인의 잉여노동과 삶을 착취하는 무늬만 다른 노예제도인 지대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모순은 오직 그것을 강제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투쟁으로서만 지양될 수 있다. 문제를 명확히 하자. 싸워야 할 대상은 현상이 아닌 문제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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