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개헌실패와 급진 좌파정치의 현주소

0
1761

12월 4일 이탈리아에서 진행된 개헌투표에서 반대 59.11%가 나와서 개헌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한국에도 전해졌다. 이번 개헌을 주도한 민주당 마테오 렌치 총리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 글은 개헌 부결을 기회로 이탈리아 개헌투표의 배경에 깔려있는 이탈리아의 정치지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탈리아 정치의 많은 측면들이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에도 생각해 볼만한 중요한 고민들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헌투표 과정에서 급진좌파세력과 대중운동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여전히 이탈리아의 급진적 대안세력은 부재한 실정이다. 수십 년간 이탈리아가 겪어온 경제적 후퇴와 부패한 정치 그리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대안은 나오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지배계급이 계속 정치적 주도력을 발휘해왔고 급기야 불안정한 지배질서를 안정화하기 위해 헌법 개정에 나섰다. 이제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반공주의에 기반한 부패한 정치

이탈리아 급진 좌파 정치의 무력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이탈리아 정치사를 간략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이탈리아 정치구조는 1945년 파시즘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은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하여 민중 속에서 큰 정치적, 도덕적 권위를 누렸고, 해방 이후 집권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동유럽이 아닌 유럽 중심 국가에서 공산당이 집권하는 것이 큰 위협이라고 생각한 미제국주의는 이를 봉쇄하고자 했다. 국내 지배계급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다.

전체적으로 이탈리아 정치는 공산당의 집권 저지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반공체제였다. 공산당을 고립시킨 채 기민당을 중심으로 정당들이 결집하여 정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기민당은 30년 이상 장기집권할 수 있었다. 이렇다보니 이탈리아 정치는 왜곡,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 거물 정치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정치계급’이 정치를 틀어쥐고,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콩고물을 나누어주는 후견주의(clientelismo)가 판을 쳤고, 부패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말로 정부를 끼고 ‘삥땅’치는 것을 의미하는 ‘탄젠테(tangente)’가 만연했고, 마피아와 기업이 연루되었다.

국내외적 변화가 수십 년간 지속된 부패한 반공 정치 구조에 균열을 일으켰다. 우선 공산당이 오랜 시간동안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우경화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유로코뮤니즘을 표방했고, 그 후에는 사실상 사민주의화 했다. 국외적으로는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이미 사민주의화한 공산당은 소련 붕괴에 함께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내팽개치고 ‘좌파민주당’으로 개명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왜곡되고 부패한 정치구조를 변명해주던 근거가 사라졌다.

1992년 초 ‘마니 푸리테(깨끗한 손)’이라고 이름 붙은 대대적 부패 조사는 수천 명의 관료와 의원들을 조사하고 기소하였고, 이로 인해 정치체제 자체가 존립이 위태로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 부패 사건들을 통칭해 ‘탄젠토폴리’, 즉 ‘부패의 도시’라 불렀다. 반공이란 이름으로 부패를 용인해주던 구조 자체가 사라지면서, 이전에는 쉽게 덮어두고 지나갔던 부패사건들이 더 이상 쉽게 넘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92년 집권을 하고 있던 기민당, 사회당, 사회민주당, 자유당이 모두 1년 만에 해체되어 사라졌다.

이탈리아는 이후 ‘제2공화국’이라고 칭할 정도로 대대적인 제도 개혁을 했다. 세 차례나 총리를 한 베를루스코니가 등장하게 된 계기도 이때였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미 성공한 언론자본가였고 무엇보다 기성세력을 비판하는 ‘아웃사이더’로 스스로를 포장했다. 기성 정치인들이 권력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반면 이미 부를 축적한 그는 부패, 비리가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고, 스스로도 이를 강조했다. 이렇게 등장한 제1차 베를루스코니 내각은 연정한 극우 ‘북부동맹’과의 이해관계가 틀어지면서 7개월로 단명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정치를 20년간 지배해온 것은 바로 반베를루스코니였다. 즉 베를루스코니의 집권을 막기 위해 중도부터 그 왼쪽에 존재해는 모든 정치세력이 단결하자는 정치논리가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해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베를루스코니는 극우가 아니라 사실 중도우파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탈리아 정치를 좌지해온 중요 세력과 인물은 대개 기성세력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를루스코니 뿐 아니라 기성세력을 ‘정치 카스트’라며 비판한 오성운동, 나이 든 정치인을 ‘쓰레기차’에 내다버리고 젊은 사람들로 대체해야 한다고 떠든 렌치 총리가 그 대표적 예이다. 이는 이탈리아 민중이 비록 환상에 빠지고 배신당하기를 반복하지만 기존 정치세력이 아닌 새로운 대안세력이 나오길 꾸준히 갈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경제의 쇠퇴

베를루스코니의 실각 이후 ‘좌파민주당’ 중심의 중도좌파 연합인 ‘올리브나무’가 선거에 승리하여 프로디 내각이 수립된다. 이탈리아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 도입되는 것은 바로 이 프로디 내각과 후속 내각인 달레마 내각에서였다. 공산당 출신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자로 변신한 것이었다. 중도좌파 정부는 고용을 불안정화하고 노동권을 후퇴시켰고, 교육을 전반적으로 시장화, 기업화했다. 대규모 사유화 정책과 세르비아 공습참여도 이때 이루어졌다.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을 불러온 것은 이런 중도좌파 정부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심이반이었다. 중도좌파 세력을 대체할 급진적 대안세력이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은 급진화되지 못하고 베를루스코니의 중도우파세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책은 사실상 중도좌파 정부 정책의 연속이었다. 좌파, 우파라고 서로 구분하지만 실내용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은 유럽 정치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진실을 감추고 이른바 중도좌파세력은 한편에서는 베를루스코니를 악마화하여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부패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반베를루스코니 투쟁을 이어갔다. 심지어 좌파정당 중 사회운동에 결합하려 하고 그나마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공산주의재건당조차 반베를루스코니 연합에 가담하여 2006년 중도좌파연합이 승리한 후 사회연대장관으로 입각하였다. 이런 공산주의재건당의 정치행보는 결국 당 지지율이 무의미한 수준으로 하락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시기 동안 이탈리아는 만성적 경제쇠퇴를 맞는다. 경제성장률이 2000년 3.97%로 반짝한 후, 단 한 해만 2% 성장을 달성했을 뿐 마이너스 성장한 해가 네 차례나 될 정도로, 이탈리아는 해 뜨는 날이 없는 상태로 들어간다. 청년실업도 심각해서 2014년 43.6%에 이르렀고 현재에도 40%에 가까운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2008년 경제공황은 이런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것은 그해 중도좌파 정부를 무너트리고 베를루스코니의 세 번째 집권으로 이어졌다.

급진적 좌파세력의 부재 속에서 등장한 오성운동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의 해체는 노동자, 민중을 대변할 정치제도 내에 유력한 정치세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히려 구 공산당 세력은 이탈리아 지배질서의 주축이 되었다. 2006년 대통령이 되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지오르지오 나폴리타니는 공산당 우파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구 공산당 계열이 만든 ‘좌파민주당’의 후신 ‘좌파민주주의자’는 1993년 해체된 기민당 계열이 만든 데이지당(원 당명은 ‘민주주의는 자유다’임)과 2007년 합당하여 민주당을 창당했다. 20년 전만해도 서로 대립하던 두 세력이 이제 하나가 되어 중도‘좌파’ 행세하는 당을 만든 것이다. 당명을 민주당으로 정한 것은 미국 민주당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블레어의 노동당과 클린턴의 민주당을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공산주의재건당 같은 좌파정당 역시 중도로 수렴되는 정치와 반베를루스코니 연합에 휩쓸리면서 우경화되었다. 이렇다보니 이탈리아는 급진적 대안세력이 공백인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중은 기존의 기성세력(establishment)과는 다른 새로운 세력과 정치를 계속 바랐다. 특히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더더욱 그러했다. 이 와중에 유명한 정치풍자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이끄는 ‘오성운동(M5S)’이 태동했다. 그릴로는 1970년대 카바레에서 스탠딩 코미디로 시작하여 점차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의 정치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86년 당시 총리였던 크락시를 풍자했다가 텔레비전 출연이 금지되었고, 그 후부터 거리와 극장에서 정치풍자 일인극을 계속 이어갔다. 인터넷이 보급되자 그는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했고,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블로그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IT 전문가 지안로베르토 카사레지오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2009년 이 둘은 정치체제에 반기를 드는 오성운동을 만들었다. 오성은 물, 환경, 교통, 상호연결, 개발 이 다섯 가지 핵심 이슈를 상징했다. 오성운동은 2013년 첫 총선에서 20% 중반의 지지율을 얻어 제2정당으로 단숨에 올라섰다.

오성운동에는 일부 진보적 성격이 있다. 가령 기성 정치를 부정하며 전혀 연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선거에서 후보의 TV출연을 금했다. 당선이 되면 의원들은 중위임금만을 받고 나머지는 공적 목적에 이용해야 했다. 지지세력 역시 기성정치에 실망한 노동자 민중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2013년 선거결과를 보면 오성운동은 육체노동자, 소자영업자, 학생, 실업자들에게서 중도세력보다 더 많은 득표를 했다.

그러나 오성운동은 기본적으로 잡탕으로 이루어진 정당이고 급진적 대안이 되기는 힘들다. 우선 그들은 좌, 우파 모두가 기성세력이고, 노조역시 기성세력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들 모두를 싸잡아 부정한다. 중요한 사회문제인 실업에 대해서도 근본적 처방이 아니라 보수적 반이민정책을 선호하고 있다. 유럽의회에서는 우파정당인 영국독립당과 연합하고 있다. 조직 운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성운동은 인터넷 민주주의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릴로가 개인 회사처럼 비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은 사회적 모순의 원인을 사회경제체제에서 찾는 게 아니라 정치의 부패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보니 대안 역시 부패한 기성세력의 인적 청산으로 귀결된다. 결국 오성운동은 민중이 갖고 있는 불만을 자본주의와 연관시켜 더욱 근본적 인식으로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정치적 부패와 개혁 문제로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개헌 투표의 의미

2011년 이탈리아는 다시 심각한 경제후퇴로 들어간다. 경제공황으로 집권한 베를루스코니가 이제 경제공황으로 자리를 내놓을 상황에 놓였다. 대통령 나폴리타노는 유럽연합의 자본가들에게 우호적 태도를 취하며 2011년 베를루스코니 내각을 해산시키고, 경제관료 출신에 골드먼 삭스의 선임고문을 지낸 마리오 몬티를 총리로 세우고 유럽연합의 긴축정책을 수행케 했다. 그러나 경제 상황은 심각해져서 2012년 경제성장률이 -2.85%로 하락했다. 이로 인해 정부 역시 취약해졌다. 결국 2013년 4월 총선을 통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가까스로 연정에 성공하면서 민주당 엔리코 레타 내각이 들어섰다.

1990년대 초 기민당 중심의 반공블럭 장기집권이 붕괴된 이래, 이탈리아는 다양한 정당들이 선거연합을 통해 이합집산하여 집권해왔다. 그러나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민심이탈이 가속화되면서 지배계급은 점차 안정적 정부를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2005년 1위 정당이나 선거연합에 무조건 54%의 의석을 배분하는 프리미엄을 도입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대표성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었고, 이것의 입안을 책임진 장관조차 ‘포르첼룸(porcellum)’, 즉 ‘돼지새끼’라고 경멸할 정도였다.

2013년 총선 결과 민중의 이반은 더욱 심각해져 정부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우선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 80-90%의 매우 높은 투표율을 보여주었는데, 이때 선거에서는 75.2%로 하락했다. 민주당이 주도한 ‘공공재’란 이름의 선거연합은 1위를 했으나 29.54%만 득표했을 뿐이고, 2위 베를루스쿠니의 ‘중도우파연합’(29.18%)을 0.36%로 따돌렸을 뿐이다. 반면 돌풍을 일으킨 오성운동은 단일정당으로 선거에 참여했는데도 불구하고 25.5%나 득표했다. 이 속에서 민주당은 ‘포르첼룸’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어렵사리 중도우파연합과 대연정하여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차기 선거에서는 오성운동이 집권할 가능성도 높아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마테오 렌치였다. 젊은 나이로 플로렌스 시장이 된 마테오 렌치는 야심찬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기민당 성향이었고, 그 역시 오랫동안 기민당 계열이 만든 정당에서 활동해왔다. 베를루스코니처럼 부유한 대자본가는 아니지만, 베를루스코니처럼 개인적 매력과 SNS 및 대중매체를 잘 활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어떤 대단한 전망을 가진 인물은 아니고, 단지 기성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자신의 젊음을 내세웠다. 그는 베를루스코니 이후 두드러진 인물정치(personalization of politics)을 대변했다. 또한 그의 등장은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사람들의 변화 열망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2013년 민주당 대표 베르사니가 내각 구성에 실패한 후 사임하자 12월 공석인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열렸다. 여기서 렌치는 당대표가 된다. 그 후 렌치는 당을 자신을 지지하는 주변 인물들로 채워나간다. 이듬 해 레타 총리가 사임하면서 렌치는 39세의 나이에 무솔리니 이후 최연소 총리가 된다. 렌치는 블레어를 숭배하던 인물로, 이탈리아에서 블레어식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면서 정치구조를 영미식 양당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는 여전히 민주당의 기반이었던 사민주의, 구 공산당 계열의 노동조직과 유권자들의 의지에 반하는 노골적 친자본 기조로 전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내 ‘쿠데타’로 불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렌치 개인의 바람이 아니라 이탈리아 지배계급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왔다. 계속 불안정한 통치체제를 안정적인 자본가계급의 지배체제로 바꾸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민주당 대표 선출 직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악명 높은 ‘포르첼룸’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30%도 못 얻은 정당이 54%의 의석을 가져가는 등 제도의 민주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기 선거에서 1위당 프리미엄이 사라진다면 중도 지배세력의 안정적 통치가 더욱 불가능해질 것이다. 렌치는 이에 대해 중도우파연합을 이끈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선거법과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나중에 베를루스코니가 여기서 이탈하지만, 이 장면은 중도 우파와 좌파가 사실은 동일한 지배계급의 일원임을 재차 보여준다.

우선 선거법을 포르첼룸을 조금 수정하여 1위당이 40% 이상 득표해야만 프리미엄을 받는 것으로 개정했다. 만약 1차 투표에서 40% 이상 득표 정당이 없는 경우 1, 2위의 결선투표를 통해 1위를 결정하게 했다. 집권 민주당 세력은 영미식 단순다수제 양당구조를 선호하긴 했지만 급진세력을 2차 선거에서 걸러내는 이런 프랑스식 이중선거제 역시 지배질서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또 다른 대안으로 선호했다.

이와 함께 헌법개정에 돌입했다. 헌법개정 논의는 1990년대 말부터 나오긴 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본적으로 1947년 제정 이래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었던 이탈리아 헌법은 상원과 하원에게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는 양원제였다. 이는 파시즘을 겪은 후 특정세력의 권력독점을 막기 위한 제도였지만, 이제 지배계급이 안정적 집권을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상원을 사실상 선출되지 않은 지역 명사들의 자문기관 정도로 격하시켜 하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로써 선거법과 결합하여 내각의 집행력과 안정성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제도개혁은 모두 지배계급이 민중의 의사반영을 어렵게 하여 자신의 정치, 경제적 이해를 안정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정치제도를 수립하는 데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주류 정치에 대한 반감은 거셌다. 특히 렌치가 개헌을 자신의 신임과 연동시키면서 이는 사실상 민주당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렌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인 오성운동, 전통적 우파세력, 렌치에 반대하는 민주당내 구 공산당계열 뿐 아니라, 좌파 대중운동세력이 대거 참여했다. 대중운동세력은 개헌에 반대해 집집마다 방문하고, 거리에서 리플렛을 나눠주고 항의시위를 조직했다. 그 결과 12월 4일 개헌 투표는 부결되었다.

교훈

이탈리아의 개헌은 자본가계급이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제도적 민주주의를 축소하려고 한 시도들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1992년 제2공화국 수립 이후 내내 불안정한, 그리고 2008년 경제공황으로 더욱 악화된 경제, 정치체제, 그리고 이에 대한 민중의 불만과 이반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1992년 탄젠토폴리 이후에도 끊임없이 등장하는 정치부패 스캔들, 이른바 중도좌·우파 정치세력의 지속적 몰락, 비록 정치적 부패와 타락에 인식이 갇혀 있지만 기성세력에 대한 불만에서 표출된 대중들의 새로운 인물과 정치세력에 대한 갈구(이것이 베를루스코니, 렌치, 오성운동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왜 이탈리아가 이런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분명히 설명하고, 기성세력을 정말로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을 반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제시하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것이 이탈리아가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으로 빠진 결정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불만에 찬 민중이 이런저런 선택지들을 택해보았지만, 급진적 대안세력이 부재한 상태다보니 정치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여전히 교육개악에 반대하는 교사, 학생, 학부모의 투쟁이 일어나고, 물사유화 반대투쟁, 대규모 반전투쟁, 주거권운동, 35만 조합원의 금속노동조합 FIOM의 전투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고, 개헌을 부결시키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급진적 전망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못하다보니 이탈리아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급진적 대안세력이 등장하지 못한 것은 나름 유력한 좌파정당 등이 자본주의 지배질서와 분명히 선을 치지 못하고, 자본가계급에게 유리한 정치구도에 휩슬려 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수년 동안 이탈리아 급진좌파 세력은 베를루스코니의 집권을 막는 걸 최우선의 과제로 삼으면서 이른바 지배질서의 핵심축인 중도좌파의 틀 안으로 흡수되었다. 공산주의재건당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정치현실은 우리에게 교훈이 될 경험을 제공한다. 반베를루스코니 중도좌파 연합은 민주대연합, 야권연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자유주의 세력과의 오랜 야합 역사, 이로 인해 몰락상태에 빠진 진보운동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고 있고, 정치 역시 유동적인 현실에서 진정한 급진적 대안세력을 만들어내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역시 서로 비슷하다. 우리는 이탈리아라는 반면교사를 통해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곳에 이름을 적어주세요.